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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01)화 (10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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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늦어서 미안하오.

“조심하십시오, 덫…….”

황급히 다가온 도영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익제가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던 탓이다.

그가 손으로 낙엽을 쓸었다. 사방에서는 연신 군대부인을 찾는 목소리가 메아리쳤고, 횃불은 그 일대를 대낮처럼 훤히 비추었다.

그러나 그곳만 적요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한 공기가 그를 에워쌌다.

익제는 조용히 숨을 죽였고, 풍오는 말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한 귀퉁이의 낙엽을 걷어내자, 그 아래에 깔린 그물이 보였다. 

낙엽 위에 쌓여 있던 흙이 그물 아래로 푸스스 떨어져 내렸다.

도영이 말없이 곁으로 다가와 횃불을 비추었다.

“!”

익제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마침내.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눈동자가 새카맣게 가라앉았다. 그 속으로 짐작도 하지 못할 감정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부인!”

도영이 그답지 않게 고함을 터뜨렸다. 주변을 수색하던 병사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익제는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구덩이 아래에 동그랗게 웅크린 작은 등을 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안도, 분노, 초조, 불안.

어쩌면 그 모든 것을 뭉뚱그린 것 같은 새카만 감정의 덩어리. 

익제는 섣불리 손을 뻗지 못했고, 그 모습에 병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도영이 재촉하는 듯한 어조로 “주군.”하고 그를 불렀다. 

그제야 익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영은 자신의 손으로 나머지 낙엽을 치웠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병사들은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고, 곁에 선 풍오가 주둥이로 낙엽을 밀었다.

이윽고 도영이 그물을 걷었다. 그가 아래로 내려가려는 순간. 

“!”

익제가 한발 먼저 다리를 뻗었다. 더없이 조심스럽고 신중한 움직임으로.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가장자리의 흙이 무너졌다.

노루를 잡기 위한 구덩이는 두 사람이 들어가기엔 지나치게 좁았다. 익제와 그녀의 몸이 틈 없이 맞닿았다. 주춤거리는 팔을 뻗은 그가 비로소 채선을 와락, 끌어안았다. 

두 번 다시 풀어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부인.”

익제가 품 안의 그녀를 소리 내어 불렀다. 새카만 덩어리가 뭉쳐 있는 목소리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끝이 조금 떨렸다. 

그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삭이려는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다 다음 순간.

“!”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제야 채선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 탓이었다. 축 늘어진 몸은 마치 딱딱한 각목 같았다. 

내려앉은 눈꺼풀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고, 미동 없는 가슴은 그녀가 숨을 쉬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일순,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상상하기 싫은, 최악의 상황이 떠올랐다. 익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한 팔을 들어 올렸다. 

“…….”

그러나 그의 손은 끝내 채선의 가슴에 닿지 못했다. 한 줌의 망설임이 기어코 마지막 한 뼘을 뻗지 못하게 만들었다.

만약, 이대로 그녀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면?

사고가 멈춘 것처럼 머릿속이 텅 비었다. 그의 인생에서 채선이 함께한 것은 고작해야 두어 계절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익제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죽은 듯이 늘어진 그녀의 가슴에 손을 대는 것이 소름 끼치도록 싫을 만큼.

아니, 그것은 싫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보다는 오히려 두려움에 가까웠다. 눈앞의 사실을 확인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

그의 손가락이 움칫, 오므라들었다.

“주군.”

머리맡의 도영이 다시 한번 그를 다그쳤다. 오랫동안 익제의 곁을 지켰지만, 그가 이토록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웃음 하나, 행동 하나에도 의도가 담겨 있던 익제가 두려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평범한 사람인 양.

“주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키듯, 두 눈을 감았다 뜬 익제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의 얼굴은 표정을 잃었고, 손끝은 아주 느리게 채선의 가슴으로 향했다.

세상이 멸망하고 다시 태어나는 억겁의 시간처럼 길고 지난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쿵. 쿵.

그의 손끝에 닿은 채선의 심장이 느리게 박동했다.

쿵, 쿠웅.

“…….”

그제야 익제의 고개가 툭, 하고 떨어졌다.

안도, 혹은 불안함.

익제는 북받치는 감정을 삼키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그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익제의 눈매가 일그러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심채선.”

그가 그녀의 귓가에 그 이름을 속삭였다. 언젠가의 그날처럼, 자신의 부름에 그녀가 눈을 뜨길, 동그란 갈색 눈동자에 저를 담아 주길 간절히 기도하며.

기도라.

익제는 방금 제가 떠올린 생각에 덧없는 조소를 흘렸다. 그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빌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운명은 자신의 힘으로 개척하는 것이라 믿었고, 신 같은 건 의지 약한 인간을 위한 위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믿기엔 지나치게 강퍅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익제는 누구인지도 모를 신에게 빌고 있었다. 만약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그녀를 살려 달라고.

귀인이라는 그녀의 운을 모두 끌어다 써도 좋으니, 아니 그것으로 모자란다면 자신의 남은 생을 뚝 떼어가도 좋으니 채선을 제게 안배해 달라고, 그는 어떤 신도보다 절실하게 기도를 올렸다.

제발.

“심채선.”

그녀의 이름은 그의 기도였다.

“심채선.”

더없이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

“주군.”

도영이 비통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서서히 이성을 되찾은 익제가 품 안의 몸을 안고 구덩이 위로 기어 올라왔다. 도영이 채선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누구의 손에도 그녀를 넘겨주지 않았다.

그래, 돌이켜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산적의 습격으로 행방불명된 그녀를 찾던 날, 채선이 산골 처자가 아니라 태부의 조카라고 생각했던 그 날에도, 그는 쓰러진 그녀를 아무에게도 넘겨주지 않았다.

채선을 두 팔에 안은 그가 풍오를 불렀다. 곁에 있던 말이 곧장 옆으로 다가와 다리를 굽히고 몸을 낮추었다. 명민한 그의 말은 주인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을 헤아렸다.

익제는 그녀를 풍오의 등에 태우고, 자신도 그 뒤에 올라탔다.

사방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병사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고,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 오직 눈동자만 움직이며 익제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을 따름이다.

고삐를 잡던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문득, 광무대군과 눈이 마주쳤다. 

익제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병사가 든 횃불이 익제의 새카만 눈동자 속에서 일렁거렸다. 

그것이 흡사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처럼 보여 광무대군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아마도 채선이 정신을 차리면 그녀는 자신을 납치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힐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광무대군의 표정이 여유로웠다. 겁에 질려 꼬리를 말고 도망가도 모자랄 그가 히죽, 입꼬리를 당겼다. 그와 동시에.

핑.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익숙한 소리였다. 이를테면, 한껏 당겨진 시위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소리.

“!”

익제는 본능적으로 채선을 감쌌다. 그의 커다란 등이 그녀를 온전히 덮었다. 생각을 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머리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그러고 나서야 조각조각 흩어진 사실들이 한데로 모였다. 광무대군의 치부를 쥐고 있는 채선과 자신의 뒤를 쫓아다니던 광무대군, 그의 여유로운 표정과 예리한 파공음.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진실에 도달하는 순간.

“주군!”

푹.

그의 등에 화살이 꽂혔다. 익제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서슬 퍼런 눈으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쏘아보았다. 

“잡아라! 놓치지 마라!”

도영이 호위무사들을 향해 일갈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호위무사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어둠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병사들도 우르르, 뛰어갔다.

“…….”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또다시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그는 더없이 냉혹한 눈으로 광무대군을 노려보았다. 등 뒤에 박힌 화살보다 그것이 채선을 향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분노케 했다. 그의 얼굴 위로 싸늘한 살기가 어렸다.

익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던 그때. 

“!”

품 안의 몸이 꿈틀거렸다. 일순,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익제의 초조한 시선이 품 안의 여인에게로 떨어졌다.

들썩거리던 채선의 눈꺼풀이 서서히 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가 눈을 떴다. 느리게 움직이는 눈꺼풀 사이로, 갈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듯,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저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을 보며 영문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훑었다.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병사들과 일렁이는 횃불, 적막강산 같은 고요, 그런 것들을.

평소보다 시야가 높은 것 같았다. 그게 몹시 이상해 채선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다 저만치에 서 있는 광무대군과 눈이 마주쳤다.

“흡!”

그녀의 등이 딱딱하게 굳었다. 경악으로 가득한 눈동자가 요동쳤다. 익제는 어금니를 사려 물며, 그런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그제야 채선은 자신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아…….”

그녀의 잇새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동그란 눈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오셨구나.

그 사실을 실감하자, 그간 꾹꾹 눌러두었던 서러운 감정이 무너진 둑처럼 와르르 터질 것 같았다.

익제는 등 뒤의 통증을 눌러 참으며 그녀를 향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났다.

“늦어서 미안하오.”

“윽.”

채선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염치없는 울음이 자꾸만 틈새를 비집고 나왔다. 

그녀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행여 익제가 자책이라도 할까, 그녀는 목이 떨어질세라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상한 곳 하나 없이 무사하니 괜찮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향덕원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많이 무서웠을 것이오.”

“아닙니다. 산은 제게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것을요. 하나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많이 두려웠을 것이오.”

“아닙니다. 곧 다시 만날 거라 생각했습니다.”

“나를, 기다렸겠지.”

“윽……”

그 말에는 차마 아니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기다렸다. 그녀는 익제를 기다렸다. 그를 향해 달려가면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그를 기다렸다.

그가 자신을 구해줄 거란 믿음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그가 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녀는 언제 어느 때고, 그가 그리웠다.

끝내 채선의 눈동자에 동그란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참으려고 하면 할수록 눈가가 뜨거워졌다.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채선은 익제의 모습이 흐려지는 게 두려워 황급히 눈을 깜빡였다. 고여 있던 눈물이 또로록 떨어지고,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이 선명함을 되찾았다.

익제가 그녀를 당겨 안으며 온화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피곤할 것이오. 한밤중에 추운 산속을 헤맸으니 고단하기도 하겠지. 내 품에서 한숨 주무시오. 눈을 뜨면 향덕원에 도착해 있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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