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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00)화 (10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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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

    이게 무슨 소리인가?

    선봉에 선 병사 하나가 소리쳤다. 익제가 병사의 외침을 따라 서둘러 말을 몰았다. 

    그곳에 작고 낡은 오두막 한 채가 있었다. 사냥꾼이 잠시 머물며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오두막인 듯했다.

    익제는 천천히 목울대를 울렸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광무대군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오두막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 선 태자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무심한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밤나무라.

    오두막 앞에 있는 커다란 밤나무를 보던 익제가 말에서 내렸다. 그는 곧장 오두막을 향해 걸어갔고, 도영이 그런 익제를 호위했다.

    익제의 시선이 문에 걸린 자물쇠를 응시했다. 비바람에 시달린 자물쇠치고는 지나치게 새것 같았다.

    “부숴라.”

    도영의 명에 도끼를 든 병사가 달려들어 자물쇠를 힘껏 내리쳤다. 쩌억, 쩍, 자물쇠가 아니라 문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덩치가 산만 한 병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도끼를 휘둘렀다.

    끼이익.

    마침내 자물쇠가 통째로 뜯겨나가고 문이 열렸다. 익제는 다시 등 뒤를 돌아보았다. 고삐를 쥔 광무대군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그의 시선이 긴장한 빛을 띠었다.

    “…….”

    익제가 오두막 안으로 한발을 내디뎠다. 병사에게 횃불을 건네받은 도영이 따라 들어와 어두운 방을 비추었다. 

    횃불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였고, 익제의 시선이 그를 따라 느릿하게 이동했다.

    조금 전까지 누군가 누워 있었던 듯 정리가 안 된 침상, 탁자 위에 놓인 질그릇과 음식의 흔적, 창문 옆에 놓인 의자, 바닥에 떨어진 나무판자.

    익제는 곧장 침상으로 걸어갔다. 그가 이불 밑에 손을 넣었다. 온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기분 탓인지, 풀 내음이 났다. 채선의 향이다.

    그가 두 눈을 감았다. 침을 삼키듯 느릿하게 목울대를 울리며 주먹을 틀어쥐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욕설이 그의 안에서 거칠게 소용돌이쳤다. 

    다음 순간, 눈을 뜬 익제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주군.”

    도영이 곁으로 왔다. 익제는 말없이 창문으로 걸어갔다. 네 귀퉁이에 못이 박힌 나무판자와 그 옆에 놓인 의자. 

    익제가 도영의 손에서 횃불을 가져가 의자 위를 비추었다. 희미한 발자국이 있었다. 사내의 것이라기엔 작은, 가죽신의 흔적이다.

    “…….”

    익제는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그가 없는 곳에서 벌어졌을 일들이 선명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낑낑거리며 나무판자를 뜯어내고 창문으로 도망치는 채선의 모습이.

    그녀가 느꼈을 심정이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두려웠겠지. 무섭고 겁이 났을 것이다. 어쩌면 저를 애타게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그녀는 체념하지 않고 이곳에서 도망쳤다. 

    다행이었다. 그 말은 광무대군이 채선을 빼돌린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익제가 감은 눈을 떴다. 그는 이제까지 채선을 찾아내지 못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이번에도 그녀를 찾아낼 것이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짐승이 파놓은 굴과 썩은 나뭇잎, 무엇 하나 허투루 보지 마라.”

    그의 명에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광무대군은 반쯤 안심하고, 또 반쯤은 불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태자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익제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그 옆에 서 있는 자신의 말을 불렀다.

    “풍오.”

    나직한 부름을 알아들은 풍오가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단숨에 말 등 위에 올라타며 고삐를 바투 쥐었다.

    “그녀를 찾아라.”

    히잉.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짧은 울음을 흘린 풍오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채선은 맨손으로 낙엽을 걷어냈다. 마른 낙엽과 젖은 낙엽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그 말은 누군가 낙엽을 인위적으로 모아 놓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채선은 그 누군가가 누구일지, 꽤 정확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와 비슷한 것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채선은 이따금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면서 빠르게 낙엽을 헤집었다. 살얼음이 내린 낙엽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손이 시렸다. 

    하지만 얼음물을 깨고 빨래를 하던 때와 비하면 이 정도는 약과였다.

    “역시.”

    채선은 희미한 달빛에 비친 그물과 구덩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덫이다. 물을 마시러 오는 짐승을 잡기 위해 사냥꾼이 쳐놓은 덫.

    노루나 사슴 같은 큰 사냥감을 노린 것인지 구덩이의 깊이가 제법 깊었다. 그 위로 그물을 고정해 두었고, 그물 위에는 낙엽을 덮어 위장했다. 

    평평한 땅이라 생각하고 그곳을 밟았다간 반 길 아래의 구덩이로 떨어질 것이다.

    채선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먼 곳에서 부엉이 울음소리만 들릴 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물의 한 귀퉁이를 벌리고 스스로 덫 안으로 뛰어내렸다. 구덩이는 그녀의 키만 했다. 

    손을 뻗어 그물의 모서리를 고정한 그녀가 그물의 구멍 안으로 손을 뺐다. 그리고 주변의 낙엽을 그러모아 그물 위를 덮었다.

    “하아.”

    짙은 어둠이 사방을 에워쌌다. 진한 흙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제야 채선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냥꾼의 교묘한 덫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그녀를 감추어 줄 것이다. 

    그녀는 동그랗게 몸을 말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익숙한 적막이 찾아 들었다. 부엉이와 풀벌레, 그리고 간간이 들리는 늑대의 울음소리까지.

    그래서 무섭진 않았다. 그것은 그녀에게 더없이 익숙한 침묵이었다. 다만, 머리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했을 뿐이다. 

    광무대군의 손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실감한 순간, 그간의 일들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이선의 배신과 저 때문에 죽은 하인들, 광무대군과의 만남, 오두막에서의 탈출, 그 모든 일들이 미처 손쓸 새도 없이 그녀의 머리를 잠식했다.

    고작 하루 안에 일어난 일이라기엔 지나치게 많았다. 뒤늦게 그녀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우는 건 아니었다. 그저 몸을 덮치는 한기를 견딜 수 없었던 탓이다. 산속은 산 아래보다 한 계절이 빠르다. 산 아래는 가을일 테지만, 한밤중의 산중은 겨울과 다름없었다.

    “이선아…….”

    채선의 잇새에서 그녀의 이름이 나왔다. 실은,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이선이 자신을 궁지로 내몰았다는 사실이.

    ‘채선아. 그분께서 황제가 되시면 나는…… 황후가 되는 거야.’

    언젠가 이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후.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

    “그 자리가 그렇게 탐이 났던 거야? 나를…… 만큼?”

    그녀의 혼잣말이 바닥으로 떨어져 땅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목소리 끝이 젖어 들었지만, 채선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척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리자, 무지막지한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피곤했다. 아니, 피곤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할 만큼 고되고 지쳤다.

    다음 순간, 채선의 의식이 까맣게 날아갔다. 어쩌면 그건 잠이 들었다는 말보다 정신을 잃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몰랐다. 

    ***

    “주군. 그러다 갑자기 짐승이 덤벼들기라도 하면…….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도영은 직접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익제를 만류하며 한발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는 도영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허리를 숙이고 네발로 기다시피 낮은 동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익제가 텅 빈 공간을 보며 혀를 찼다. 

    짐승이 버리고 간 지 오래된 굴이었다. 사람이 머문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그가 몸을 물렸다.

    익제는 초조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서 횃불이 일렁거렸다. 병사들이 “군대부인!”하고 목청을 높여 채선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를 찾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다. 다만, 그 사이 그녀가 두려움에 떨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언제까지 제가 이 무례를 참아야 합니까?”

    광무대군이 태자에게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비어 있는 오두막을 보고 안도했다. 하지만 차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똥 마려운 개마냥 익제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중이었다.

    태자로부터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광무대군이 익제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내 이번 일은 태자 전하를 봐서라도 적당히 넘어가 줄 테니, 이만 군사를 물리는 게 어떻겠소?”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익제는 그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도영을 돌아보았다. 광무대군이 윽, 하는 신음을 삼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무슨 소리 말씀이십니까?”

    “물소리군.”

    익제는 과거 풍주로 가는 도중 채선이 산적에게 납치당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산적의 우악스러운 손에서 탈출한 그녀는 물줄기를 따라 이동했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치밀함을 내보이며.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산에서 나고 자랐다. 누구보다 산의 생리에 대해 잘 알았다. 다시 말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내가 왜 그 사실을 잊고 있었을까.

    “병사들을 개울가로 이동시켜라.”

    “예.”

    익제도 말을 타고 물가로 향했다. 

    병사들은 낙엽 한 장, 바위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았다. 그곳에 채선이 몸을 숨길 수 있을 리도 없건만, 서슬 퍼런 익제의 기세에 나뭇잎을 들추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익제는 기운차게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빽빽한 나무 너머 어딘가에 있을 오두막을 향했다.

    그가 천천히 말을 몰기 시작했다. 

    “군대부인!”

    우렁찬 병사들의 목소리가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잘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새들이 후다닥, 밤하늘 위로 날아갔다.

    그들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는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먼 곳에 있거나 대답할 만한 상황이 아니거나.

    대답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

    익제의 입매가 조금 더 초조한 빛을 띠었다. 그의 머릿속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그건 몹시 생경한 감각이었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가자.”

    익제가 고삐를 당겼다. 

    그 순간, 낙엽이 쌓인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던 풍오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마치 무언가를 피해가듯 길을 빙 둘렀다.

    익제의 시선이 무심코 아래를 향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풍오가 길을 둘러 간 이유를 알아차렸다. 

    거기에 짐승을 잡기 위한 덫이 있었다. 영리한 풍오는 낙엽으로 위장된 그것이 덫임을 알아보고 스스로 피해간 것이다.

    익제의 시선이 다시 앞을 향했다. 초조한 눈동자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횃불이 일렁이는 숲과 비탈길, 덤불 같은 것들을.

    그중 어느 곳에 채선이 몸을 숨기고 있을까, 그의 입매가 조급한 기색을 띠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 터였다. 도무지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그곳을 지나치려던 찰나.

    “…….”

    익제의 시선이 다시 덫을 향했다. 문득,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멈춰라.”

    풍오의 고삐를 당긴 익제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덫을 향해 걸어갔다. 

    뭔가가 눈에 띄었던 것은 아니다. 무슨 소리가 들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떠한 예감이 그를 그곳으로 이끌었을 따름이다. 뒷골이 당기는 느낌. 

    어쩌면, 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녀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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