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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99)화 (9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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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져라.

교교했다. 구름에 반쯤 몸을 숨긴 달이 어둠을 몰아내려 애썼으나,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사방에는 캄캄한 밤이 내렸고, 키 큰 나무는 마치 높은 담장처럼 오두막을 에워쌌다. 검은 천을 두른 것처럼 밤하늘엔 별 하나 떠 있지 않았다.

채선은 신중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있나 싶어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여전히 인기척은 없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녀가 이곳에서 탈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제발, 그렇다면 좋을 텐데.

채선은 광무대군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성정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곳을 알고 있는 자의 수는 극소수일 터였다.

그녀에게 식사를 가져다준 사람도, 광무대군에게 문을 열어준 사람도 모두 같은 사람이었다.

괴한들의 수장.

그렇다면 이곳을 지키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어.

비로소 반짝이는 희망이 그녀의 앞에 한 줄기 빛을 드리웠다. 채선은 재빨리 의자를 밟고, 창문 턱을 넘었다. 

사박, 발밑에 풀이 밟혔다. 풀잎에 맺힌 이슬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적셨다. 서늘한 바람이 뺨을 훑고 지나갔다. 오싹했다.

서늘한 한기에 비로소 감옥 같은 오두막에서 탈출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아차.”

그대로 도망을 치려던 그녀가 별안간 등을 돌리고, 열려 있던 창문을 닫았다. 자신의 부재가 조금이라도 늦게 발견되기를 바라며.

그러고 나서야 채선은 빽빽한 나무 사이로 달음박질을 쳤다. 산은 그녀가 나고 자란 곳이었다. 이곳에서만큼은 누구도 그녀를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또한 불행 중 다행이었다.

채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을 가르며 달렸다.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희미한 물소리를 따라 달렸다. 일단 물길만 찾으면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그녀의 잇새로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

산기슭에 군사들이 쫙 깔렸다. 줄지어 선 횃불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병사들은 은원군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언제든 뛰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어코 이리 나온단 말이오?”

광무대군이 은원군의 앞을 가로막으며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피를 나눈 형제만큼 가깝다며, 살갑게 웃던 그의 얼굴이 마치 원수라도 보는 것처럼 일그러졌다. 

익제가 그런 그를 무심하게 응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하무인 같은 형님의 태도를 더 이상 참아줄 수는 없겠소. 폐하의 아들, 광무대군으로서 명한다. 은원군은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라. 내 허락 없이 내 땅을 짓밟을 수는 없단 뜻이다.”

광무대군과 익제의 등 뒤에는 그들의 명을 기다리는 각자의 사병들이 도열해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전장에서 마주친 적군의 장수들처럼 첨예하게 대립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익제는 물러설 마음이 없었고, 광무대군은 길을 터 줄 마음이 없었다. 

광무대군은 서슬 퍼런 눈으로 익제를 노려보았다. 그는 익제가 그 자리에서 한발이라도 움직이면 병사들에게 즉각 공격 명령을 내릴 기세였다. 

픽. 

익제가 웃음을 흘렸다. 그는 광무대군을 짓밟고서라도 갈 생각이었다. 설령 그로 인해 책임을 져야 할 일이 생긴다면, 어떤 벌이든 달게 받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심채선, 그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건 그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고작 그녀 하나 때문에 눈앞이 시뻘겋게 변할 만큼 화가 나고, 뒷일을 생각하지 않을 만큼 막무가내가 될 것이라곤 그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웃음이 나지 않고 배기겠는가.

익제가 광무대군을 뚫고 가기 위해 입을 열려는 찰나.

“비켜라.”

등 뒤에서 묵직한 음성이 날아왔다. 광무대군이 흠칫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익제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말을 탄 태자가 걸어 나왔다. 

“형님!”

광무대군이 그를 불렀다. 익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태자를 응시했다.

익제를 일별한 태자가 광무대군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군대부인이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끌려 이 산으로 들어가는 걸 본 목격자가 있다고 한다.”

“목격자라니요? 누가 감히 제 땅에 제 허락도 없이 발을 디딘단 말입니까?”

광무대군도, 익제도 그의 말이 거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태자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뒷말을 이었다.

“황족의 부인이 납치를 당했다. 이건 예삿일이 아니다. 황권에 대한 도전이고, 역모의 씨앗이다.”

“역모라니요…….”

모골이 송연한 단어에 광무대군이 주춤, 물러서는 기색으로 대꾸했다. 역모 앞에서는 황족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대로 길을 내어줄 수는 없다는 듯, 광무대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여긴 제 사유지입니다.”

“세간에서는 네가 군대부인을 납치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

태자의 직설적인 발언에 광무대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 소문은 그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누가 퍼뜨린 것인지, 발 없는 말은 고작 반나절 만에 도성을 한 바퀴 빙 돌았다.

태자의 눈치를 살피던 그가 긴장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 형님께서 그런 유언비어를 믿는 건 아니시지요?”

“당연한 소릴 하는구나. 네가 군대부인을 납치하다니.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어서 그런 수고로운 짓을 저지르겠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그렇지요. 이유가 없지요.”

광무대군이 안도의 한숨을 쉬는 순간, 태자가 무심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 길을 내주거라.”

“…….”

“거리낄 게 없는데 길을 내주지 못할 연유가 무엇이냐. 군대부인을 찾고 싶은 건 모두가 한마음이 아니더냐.”

“……예, 그렇습니다.”

여기서 더 버티면 의심의 눈길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재빨리 머리를 굴린 광무대군이 마지못해 한발 옆으로 물러섰다. 

그가 익제를 쏘아보며 나직하게 뇌까렸다.

“찾아보시오. 허나, 이것만은 명심하시오. 내 산에서 군대부인을 찾지 못한다면, 오늘 내가 당한 모욕은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오.”

익제는 서늘한 눈으로 광무대군을 쏘아보았다. 그의 군사가 산을 수색하기 직전인 상황에서도 광무대군의 태도는 당당했다. 아마도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찾아라.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져라.”

“예!”

익제의 명에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마치 산을 포위하듯 둥글게 에워쌌다. 

그때, 수많은 인기척이 가까이 다가왔다. 익제가 고개를 돌려 어둠 속을 응시했다.

태자의 등 뒤로 도성을 수비하는 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끝도 없이 이어진 행렬이 속속 그곳에 도착했다.

“고맙습니다, 태자 전하.”

익제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태자가 대수롭지 않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군대부인을 찾는 데 힘을 쓰게.”

“예.” 

수백 명의 병사가 정상을 향해 한 발씩 나아갈 때마다 길게 이어진 횃불 띠가 똑같이 움직였다.

광무대군은 초조한 눈으로 어둠에 잠긴 산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시간을 버는 동안 심관이 채선을 무사히 빼돌렸기를 바라면서.

“풍오.”

익제의 부름에 저만치에 서 있던 풍오가 곧장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능숙한 동작으로 말 등 위에 올라탔다. 그가 풍오의 허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흑마가 결연한 표정으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

“으아앗!”

젖은 낙엽을 밟은 채선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비탈길 아래로 하염없이 굴러떨어지던 채선은 황급히 몸을 웅크리며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 

그녀의 등이 나뭇등걸에 부딪히고 나서야 구르던 몸이 멈추었다.

“아으.”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몸이 아픈 것보다 행여 아이가 잘못되지는 않았을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채선은 배를 감싼 팔에 힘을 주며 울상을 지었다.

“미안해……. 조금만 버텨 줘.”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보다 더한 순간들도 많았다. 

혼례식 날 신랑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그가 익제라는 걸 알아봤을 때, 그를 파멸의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그의 곁에서 도망쳤을 때.

그러니까 이 정도 불행은 불행 축에도 끼지 못했다. 채선은 씩씩하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분명 익제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가끔 한 번씩 보여주는 어린 동물 같은 가여운 얼굴로.

“돌아가야지.”

하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없어진 걸 알아차린 이들이 추격을 시작했을지도 몰랐다. 그들과 맞닥뜨리면 두 번의 기회는 없을 터였다. 

일단 몸을 숨겨야 했다.

“어?”

발밑이 축축했다. 채선은 가죽신이 젖고서야 바로 옆에서 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얼마나 정신을 빼놓고 있었는지, 물소리도 눈치채지 못했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개울물이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이쯤 되면, 비탈길에서 굴러떨어진 게 전화위복인 성싶었다.

“아차, 발자국을 남기면 안 되는데.”

채선은 흙이 아니라 낙엽과 돌멩이를 골라 밟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젖은 낙엽은 미끄러워 균형을 잃기 일쑤였지만, 추격의 빌미를 남겨 두고 싶지는 않았다. 괴한의 수장은 만만한 사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려가야 하나, 올라가야 하나.

그녀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를 보며 짧은 고민에 빠졌다. 아래로 내려가야 민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저를 찾고 있는 익제와 조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하산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녀를 추격하는 수색조가 만들어졌다면 아래쪽이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예기치 못한 행운을 기대하기에 그녀는 길운보다 불운에 익숙했다.

채선의 시선이 이번에는 산 정상을 향했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산을 오르는 것 또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몸을 숨길 수 있는 굴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물이 있는 곳에는 살아 있는 생명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물을 마시러 오는 짐승과 그곳에 터를 잡은 동물들. 

그러니 잘 찾아보면, 짐승이 버리고 간 굴 하나 정도는 있을 법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굴 비슷한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곳에 오래 머물면 안 돼.”

채선이 다급하게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불현듯,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저건……!”

채선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그녀의 짐작이 맞다면 저건.

***

“낙엽 하나, 돌멩이 하나 허투루 보지 마라. 떨어진 바늘도 찾을 기세로 빈틈없이 수색하라.”

“예!”

익제의 명에 병사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들은 기다란 띠를 두르듯 느릿느릿, 산을 올라갔다. 병사들이 든 횃불 덕분에 주변은 마치 대낮처럼 환했다.

익제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턱뼈가 도드라지고 핏대가 섰다. 그는 시퍼렇게 날이 선 눈으로 전방을 응시했다. 행여 무언가 놓치는 게 있을까,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마 심장이 바싹바싹 탄다는 게 이런 기분일 것이다. 숨을 내쉴 때마다 수명이 깎이는 느낌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되찾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보다 먼저 자신이 죽을 것 같았다.

“오두막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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