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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98)화 (9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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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이게 뭐지?

그녀를 빼앗긴 결과가 이토록 참혹할 거라고는 익제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광무대군을 씹어 먹고 싶었다. 그의 사지를 도륙 내고 난도질하고 싶었다.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오로지, 심채선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두려움에 떨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면 한낱 자신의 감정으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돌아온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려면 남들이 보는 앞에서 죄를 지어서는 안 되었다. 

못마땅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광무대군이 이내 달래는 투로 말했다.

“군대부인에게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도성의 군사들이 군대부인의 행적을 찾고 있다 하니, 곧 발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원하면 언제든 내 사병도 내어주겠습니다.”

“어디 있습니까.”

익제가 그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나직하게 물었다. 광무대군은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그 가증스러운 모습에 익제의 잇새에서 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이 냉담하게 변했다.

“어디 있습니까.”

“어디 있냐니, 설마 제가 군대부인을 어찌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불쾌하기…….”

익제가 검을 든 손을 느릿느릿 들어 올렸다. 광무대군의 시선이 검 끝을 따라 이동했다. 마침내 그 검이 광무대군의 목을 겨누었다.

열 보 정도의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광무대군은 본능적으로 움찔, 몸을 떨었다. 등 뒤에 있던 그의 호위무사가 한 발 앞으로 나와 광무대군과 익제 사이에 끼어들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좀 전까지 이곳에 있던 무사가 아니라, 광무대군과 함께 등장한 호위였다.

익제의 서늘한 시선이 잠시 그를 향했다가 다시 광무대군에게로 옮겨갔다.

광무대군은 자신이 겁먹었다는 사실이 탐탁잖은 듯 한층 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사촌 형님에 대한 예우를 벗어 던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오. 아무리 형님이 제정신이 아니라 해도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오.”

그건 자신이 황제의 아들임을 주지시키는 발언이었다. 

하, 실소를 흘린 익제가 스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만에 하나.”

거기서 잠깐 말을 멈춘 그가 불현듯, 한쪽 입꼬리를 당겼다. 하지만 웃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미소는 손끝이 시릴 만큼 차가웠다. 

“내 부인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했다면.”

익제의 웃음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교교한 달빛에 비친 그 모습은 사람이 아닌 양 보는 이의 심장을 선득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광무대군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두 번 다시 살아서 하늘을 볼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익제가 등을 돌렸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안궁을 빠져나갔다. 

광무대군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멀어지는 익제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감히, 감히 제깟 놈이.”

뒤늦게 광무대군이 분통을 터뜨렸다. 등 뒤에서 소리 없이 나타난 달지가 어둠이 내린 뜰을 내려다보았다.

“은원군을 제거하셔야겠습니다. 아무래도 불길합니다. 요 며칠, 구름이 잔뜩 끼어 별의 흐름을 읽을 수 없어 더욱 불길합니다.”

달지의 얼굴에 불안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익제가 이제까지 본성을 숨긴 것인지, 혹은 군대부인의 납치가 그를 각성시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들이 호랑이의 발톱을 건드렸다는 사실이다.

광무대군이 제법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겠군.”

***

익제는 곧장 풍오의 등에 올라탔다. 풍오는 평소처럼 거드름을 피우지도 않았고, 잘난 체를 하지도 않았다. 딱딱한 표정과 꿈틀거리는 근육이 사뭇 침울해 보였다.

익제가 풍오의 배를 가볍게 걷어찼다. 방금까지 우두커니 서 있던 풍오가 적당한 속도로 어둠을 갈랐다. 정안궁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도영이 곁으로 다가왔다. 

익제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싸늘하게 내뱉었다.

“침수에 들었다던 광무대군이 의관을 정제하고 있었다. 그의 신발에 붙어 있는 밤송이 가시를 보았나?”

“…….”

도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구름이 짙게 깔린 한밤중에 용케 그것을 눈치챈 그의 관찰력에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밤나무는 음기가 가득한 나무라 집 안에 심지 않는다. 그런데 신발에 밤송이 가시가 붙어 있다? 우습군. 게다가 그의 신발 밑창은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낙엽 부스러기와 함께. 마치 깊은 산속을 헤매다 온 것처럼 말이다.”

“예.”

익제가 말을 멈추며 고삐를 당겼다. 풍오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다 이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허리를 틀어 정안궁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까맣게 가라앉았고, 그의 잇새로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안궁 뒷산이다.”

“예.”

도영이 고개를 숙였다 들며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비장한 빛을 띠었다.

***

채선은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잠시 숨을 죽이고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 광무대군이 들어올 때,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던 하늘이 캄캄했으니 지금쯤이면 한밤중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촛불 하나 없는 어두운 방을 더듬으며 주춤주춤, 창가로 향했다. 좀 전까지 희미하게나마 방안을 밝히던 화로는 수명을 다하고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쿵. 

의자에 무릎을 부딪쳤다. 

“으으.”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무리 흉인의 별이라지만, 이럴 때까지 다칠 필요는 없는데.

툴툴거리며 무릎을 문지르던 그녀가 다시 두 팔을 뻗고 벽을 더듬었다. 어정어정, 조심스러운 걸음이 창가를 향했다.

마침내 그녀의 손끝에 꺼끌꺼끌한 나무판자가 걸렸다.

채선은 어둠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눈이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졌다.

빛 하나 들어올 틈이 없는 것 같은 오두막도 해 질 녘에는 지금보다 밝았다. 그 말은 어디선가 빛이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채선은 그 틈을 몇 군데 찾아냈다. 지붕과 벽 사이의 비틀린 공간, 나무와 나무 사이의 이음새, 그리고 창문과 나무판자 사이의 좁은 틈새.

판자의 왼쪽 아래에 비뚤게 박힌 못이 제법 헐거워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맨손으로 나무판자에 박힌 못을 뺄 수는 없었다. 

“한쪽만 뜯으면 나머진 조금 더 쉽게 뜯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채선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나무판자 아래에 밀어 넣어 지렛대처럼 사용할 수 있는 단단한 금속이 있으면 좋으련만, 오두막 안에는 그 비슷한 물건도 찾을 수 없었다. 

사내는 용의주도했고, 화로 안에 불쏘시개조차 남겨놓지 않았다. 

“어쩌지.”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뇌리를 번득,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선이 다급하게 품을 뒤적였다.

“그게 어디 있…….”

있었다.

손끝에 딱딱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은 노리개.”

채선은 어둠 속에서 엄마의 유품인 노리개를 내려다보았다. 캄캄한 탓에 노리개의 모양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는 눈을 감고도 그 모양을 떠올릴 수 있었다.

노리개의 윗부분은 동그랗고 납작한 모양으로 모란이 새겨져 있을 테고, 아래에는 손때 묻은 붉은 술이 달려 있을 테다. 

채선은 모란 문양을 나무판자와 벽 사이에 밀어 넣었다. 노리개의 두께와 틈새의 높이가 비슷해서 잘 들어가지 않았다.

“으, 제발.”

그녀는 끙끙거리며 젖 먹던 힘까지 끌어다 썼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얼마나 그렇게 용을 썼을까.

“됐다!”

기어코 은 노리개가 나무판자와 벽 틈새에 끼었다. 채선은 노리개를 지렛대 삼아 판자를 들어 올렸다. 나무판자가 끼긱, 하는 소리를 내며 들썩이기 시작했다.

“으으.”

채선은 다시 한번 기합을 넣으며 있는 힘껏 노리개를 당겼다. 모란 문양의 은 조각이 조금씩 휘어지기 시작했다.

“엄마, 미안해.”

엄마의 유품이 일그러지는 모습에 채선이 울상을 짓는 순간.

“!”

끼긱.

판자가 들리고 못이 빠졌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혹시 누가 눈치챘을까 싶어 조용히 숨을 죽였지만 다가오는 기척은 없었다. 

그제야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 개만 더.”

채선이 이번에는 판자의 오른쪽 아랫부분에 노리개를 집어넣었다. 한쪽이 들떠 있어서 그런지 처음보다는 쉽게 들어갔다. 

으그그, 정체불명의 신음을 내지르며 힘을 주었다. 역시나 좀 전보다 쉽게 못이 빠졌다.

그런데 그때.

“어?”

채선의 잇새에서 당혹스러운 외침이 터졌다. 모란 문양이 반으로 쩍 갈라졌던 탓이다. 

“으아, 이를 어째.”

그녀의 눈매가 이지러졌다. 아직 빼야 할 못이 두 개나 더 남아 있었다. 반쪽으로 힘을 받을 수 있을까, 그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노리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입속으로 자신의 좌우명을 읊조렸다.

“채선을 다하자…… 응?”

그녀가 모란을 판자에 밀어 넣으려는 순간, 갈라진 노리개 안에 뭔가 들어 있는 게 보였다. 채선은 이미 형체를 잃은 모란을 비틀어 아예 반으로 쪼개 버렸다. 

곱게 접힌 종이가 나타났다.

“이게 뭐지?”

의아한 얼굴로 종이를 꺼낸 채선이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것은 손가락 두 마디 크기로 접힌 얇은 종이였다. 

어째서 엄마의 노리개 안에 이것이 들어 있을까.

종이를 펼쳐 보려던 채선이 “아차, 여기서 꾸물거릴 때가 아니지.” 하며 그것을 가슴팍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녀가 한쪽에 있던 의자를 끌고 왔다. 의자를 딛고 선 채선이 이번에는 위쪽에 박힌 못을 빼기 시작했다.

덜컹.

마침내 네 군데의 못이 모두 뽑혔다. 채선은 혹시나 나무판자가 큰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질까, 얼른 두 귀퉁이를 붙잡았다. 

판자를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고 창밖에 귀를 기울였다. 여전히 인기척은 없었다.

창문은 밖으로 밀어서 열게 되어 있었다. 밖에서 나무판자를 덧대면 의심의 눈길을 받을까 봐 안에다 못을 박은 모양이었다. 그것이 채선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나무 창문을 밀었다.

끼이익.

고요한 밤, 그 작은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어깨가 흠칫 떨렸다.

조마조마했다. 문을 열면, 건너편에 정체불명의 사내가 서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채선은 다시 한번 숨을 들이켜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

조금씩 문이 열렸다. 서서히 벌어지는 틈새로 바깥의 어둠이 쏟아져 들어왔다. 오두막 안의 것과는 채도가 다른 어둠이다. 

“!”

반쯤 문을 연 채선이 잠깐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린 탓이다. 

그자인가?

그녀는 숨도 쉬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자물쇠가 열리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채선은 다시금 귀를 기울였다. 스스슥, 바람이 풀을 쓸고 지나가는 소리가 마치 사람의 발소리처럼 들렸다.

“하아.”

또다시 심장이 내려앉았다. 다리에 힘을 풀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채선은 입술을 꾹 깨물고 다시 창문을 밀었다. 

삐걱, 새된 비명과 함께 마침내 바깥의 풍경이 드러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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