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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97)화 (9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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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

    도망가야 해.

    채선이 천천히 눈동자를 들었다. 그녀는 시커먼 그림자가 내려앉은 광무대군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무어라?”

    그녀의 물음에 광무대군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채선의 잇새로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로 귀인의 별을 손에 쥐면 모든 일이 광무대군께서 마음먹은 대로 풀리리라 생각하십니까?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아도 하늘이 광무대군께 그 운명을 점지해 준다고 여기십니까? 고작 귀인의 별 하나로.”

    “주제도 모르고 내게 훈계를 늘어놓는 것인가? 하. 까불지 마라, 지금이라도 너 정도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가 있으니.”

    광무대군이 흉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는 제법 자존심이 상한 듯, 분노로 부들부들 몸을 떨어댔다. 

    이상했다. 광무대군이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그녀의 머릿속은 냉정해졌다. 채선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불쑥,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를 죽인다……, 제가 귀인의 별인데도 말입니까?”

    “윽.”

    정곡을 찌르는 그녀의 물음에 광무대군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다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더 격렬한 역정을 터뜨렸다.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했나? 천만에. 나는 황제가 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한배에서 난 형제의 등에 칼을 꽂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지. 그런데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

    “그러니 그깟 귀인의 별 따위는 없어도 상관없다.” 

    거기서 잠깐 말을 멈춘 광무대군이 싸늘한 눈으로 채선을 응시했다. 그의 잇새로 포악한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대신, 내가 갖지 못하면 누구도 갖지 못한다. 은원군은 물론이고, 누구도. 나는 다른 자가 황제의 자리를 차지할 일말의 가능성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내가 너를 놓는 순간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운명이다.”

    꿀꺽.

    채선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두려움이 등골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광무대군은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한 협박도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채선을 죽일 기세였다. 

    그의 입매가 비틀렸다.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사라진 네 자식과 똑같은 꼴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 입 다물고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것이다.” 

    “!”

    그 순간, 채선이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잊고 있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머릿속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익제가 아니었다면, 그와 자신의 아이는 광무대군의 말처럼 지금쯤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배로 향하는 손을 멈추며 대신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아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되었다. 그랬다가는 손쓸 새도 없이 자신의 아이마저 잃고 말 것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새파랗게 날 선 눈으로 광무대군을 노려보았다. 악다문 잇새로 잘게 짓이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신이…… 당신이 이선으로 하여금 내게 그 약을 전해주라 시켰소?”

    하나 마나 한 물음이었다. 그가 아니면 누가 그런 짓을 하겠는가. 

    광무대군은 용의주도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이었다. 훗날, 귀인의 아이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불안의 씨앗을 남겨 두고 싶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로 인해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된 두 자매는?

    만약 채선이 그로 인해 정말로 아이를 잃었다면, 그녀는 자신과 피를 나눈 이선을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분신이라고 하나, 그것은 채선이 용납할 수 있는 선 밖의 일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이선 역시 평생 무거운 짐을 지게 될 터였다. 그녀의 선택이었다고는 하나, 실상 그녀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선은 제가 저지른 일에 짓눌려 살아갈 터였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떠올리던 채선이 참혹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익제는 또 한 번 그녀를 구원했다. 아니, 그녀와 이선, 그리고 두 사람의 아이를.

    익제님.

    채선이 입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일순, 참을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밀려왔다. 울고 싶기도 했고, 소리를 지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채선은 그 수많은 감정을 삼키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곳에는 익제가 없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다정한 미소로 어루만져줄 그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리광은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층 더 빳빳이 고개를 쳐들며, 광무대군을 마주 보았다. 

    광무대군은 채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늘한 조소를 흘렸을 뿐이다.

    “뭐, 어차피 내일이면 배를 타고 도성을 빠져나갈 테니 배짱을 부릴 수 있는 것도 오늘뿐이다. 그 후로는 누구도 너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넓은 땅에서 사람 하나 정도 숨기는 거야 일도 아니지. 그래, 그러고 난 뒤에는 내 노력으로 황제의 자리를 움켜쥐어 보는 것도 좋겠군.”

    그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광무대군은 지금 당장 그녀를 죽일 마음이 없는 듯했다.

    어째서 그가 자신을 귀인의 별이라 믿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그녀의 생명을 연장시켰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했다.

    그는 만에 하나의 경우를 위해 그녀를 제 입김이 닿는 곳에 두려는 것이다. 귀인의 별 따위는 필요 없다고 큰소리를 뻥뻥 쳐놓고도 마지막 미련을 버리진 못했다.

    할 말을 그것으로 끝이라는 듯, 광무대군이 등을 돌렸다. 문을 닫으려던 그가 문득 고개를 들어 싸늘한 시선으로 채선을 응시했다.

    “도망칠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깊은 산중이다. 이곳에서 나간다 한들 어디로 갈 것이냐.”

    그는 마치 채선의 생각을 꿰뚫듯 여유로운 목소리로 그녀를 조롱했다.

    “하물며, 은원군이 구하러 올 것이라는 기대 역시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이곳은 내 집 뒤에 있는 내 소유의 산이다. 가끔 사냥제를 벌이곤 하는 내 땅이란 말이다. 네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누구도 나의 허락 없이 이곳에 발을 디딜 수 없다. 설령 은원군이라 하여도.”

    “!”

    그 말에 채선이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낯빛이 시꺼멓게 변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참담한 얼굴에 광무대군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끼이익.

    문이 닫혔다. 곧이어 절그럭절그럭, 자물쇠 잠기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보다 짙은 어둠이 사방을 에워쌌다. 그제야 채선의 얼굴에 표정이 돌아왔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나직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도망가야 해.”

    광무대군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곳에서 한가하게 익제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내일이면 그녀는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될 터였다. 게다가 익제는 이곳에 발을 디딜 수조차 없었다.

    채선이 결연한 표정으로 어둠을 노려보았다.

    ***

    이슥한 밤이었다. 익제는 정안궁의 문턱을 성큼, 넘어섰다. 

    하인들이 광무대군께선 벌써 침수에 드셨다며 완곡하게 그를 만류하였지만, 익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걸음은 한층 더 거침없어졌다.

    그의 서슬 퍼런 기세에 하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굴렀다. 익제는 마치 귀신같은 낯빛으로 광무대군의 처소까지 쳐들어갔다.

    “시각이 늦었습니다. 내일 다시 오시지요.”

    그때, 호위무사 하나가 익제의 앞을 가로막았다. 말투는 정중했지만, 행동은 무례했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익제의 가슴을 툭 하고 밀었다.

    익제가 천천히 눈동자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새카만 안광이 달빛을 받아 기묘하게 번득였다.

    도성을 지키는 군사들까지 풀어 채선의 행방을 수색한 지 몇 시각이 지났다. 그러나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남은 것은 광무대군뿐이었다.

    익제는 시간을 끌수록 제게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광무대군 정도 되면 군사들의 눈을 피해 그녀를 빼돌릴 방법 정도야 널리고 널렸을 것이다.

    만에 하나, 채선이 도성을 벗어나기라도 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그녀를 찾을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질 터였다. 일을 그르치기 전에 그와 담판을 지어야 했다.

    “비켜라.”

    익제의 잇새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러나 호위무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익제가 한 발을 내디뎠고, 호위무사가 다시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밀었다. 도영의 어깨가 움칠했다.

    걸음을 멈춘 익제가 다시 한번 싸늘하게 경고했다.

    “비켜라.”

    “광무대군께서는 이미 침수에 드셨습니다. 내일 다시…….”

    호위무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익제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물러가려는가 보다, 하고 호위가 입을 다무는 순간.

    익제가 도영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었다. 스릉, 예리한 날붙이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호위의 가슴을 검으로 베었다. 그 모든 과정이 춤동작처럼 매끄럽게 이어졌다. 

    “!”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호위무사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털썩,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크윽.” 

    뒤늦게 신음을 뱉은 그가 가슴을 움켜쥐며 몸을 웅크렸다. 그의 손바닥이 시뻘건 피로 물들었다. 

    “이게 무슨……!”

    뒤에 있던 다른 호위무사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하인들은 경악한 얼굴로 입을 가렸다. 그렇지 않으면 비명을 지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익제는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을 들고 그대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 모습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야차와 같았다. 

    그가 천천히 눈동자를 들었다. 살을 에는 겨울바람처럼 한기를 품은 시선이 길을 막고 있는 호위무사들에게 꽂혔다.

    “비켜라.”

    익제의 눈동자에서는 분노도,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방금 전, 사람을 벤 것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래서 더욱 섬뜩했다.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호위무사가 언성을 높였다.

    “은원군! 이곳은 광무대군께서 머무시는 정안궁입니다! 이 무슨 무례한 행동이십니까!”

    “무례라. 저자의 숨을 붙여놓은 것만으로도 나는 내가 갖추어야 할 예를 모두 갖추었다. 마지막 경고다. 지금부터 내 앞을 가로막는 자는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익제는 검을 든 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검 끝에 고인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도영과 익제의 호위무사들이 그를 호위하듯 비장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광무대군의 호위무사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이게 무슨 짓이오!”

    벽력같은 노성이 날아왔다. 어느새 광무대군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익제는 무감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침수에 들었다던 광무대군은 의관을 정제하고 있었다. 마치 이제 막 외출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하.”

    익제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광무대군은 처음 보는 익제의 생소한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얀 달빛 아래에 창백한 낯으로 서 있는 그의 모습이 흡사 귀신 같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았다.

    그 말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채선이 사라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익제는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했다.

    한 가령이 안달복달하며 애원했지만, 그는 밥 대신 노여움을 씹어 삼켰다. 지금 그를 움직이는 건 오직 하나, 새파란 분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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