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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96)화 (96/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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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

    귀인의 별.

    표정 없는 얼굴의 익제가 의자에 앉아 있는 인애대군을 내려다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위압감과 압박감이 그를 짓눌렀다. 공기가 몇 곱절은 무거워진 것 같았다.

    “!”

    일순, 본능적인 위기감이 느껴졌다. 마치 익제가 그의 심장을 덥석 움켜쥐기라도 한 것처럼.

    오금이 저렸다. 목덜미가 선득하고, 등골이 오싹했다.

    그건 꽤 당혹스러운 감각이었다. 자신이 은원군의 살기에 눌리다니,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인애대군이 불쾌한 낯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수견인 줄 알았던 개가 설마 호랑이였던 것인가, 익제를 바라보는 인애대군의 눈에 경계심이 어렸다. 

    인애대군은 처음으로 익제의 존재감을 의식한 듯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무슨 일인가?”

    “사병을 빌려주십시오.”

    “사병을?”

    밑도 끝도 없는 그 말에 인애대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게다가 사병을 빌려 달라니, 생각할수록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사병을 빌려달라니 그게 무슨…….”

    “제 부인이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했습니다.”

    “!”

    인애대군이 두 눈을 홉뜨며 숨을 삼켰다. 그가 경악한 표정으로 입술만 달싹이고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익제가 싸늘하게 읊조렸다.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 도성을 이 잡듯이 뒤져서라도 그자를 찾아내야겠습니다. 그리고 뼈째 씹어 먹을 겁니다.”

    황족들은 도성 내에 백 명 이상의 사병을 두지 못했다. 그들이 딴마음을 품고 황위에 도전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

    인애대군이 도성 밖에서 따로 군사를 키우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의 군사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순간 군권을 장악한 태자의 귀에 들어갈 것이고, 전쟁은 불가피한 일이 될 터였다. 

    “자네 부인이……, 으음.”

    인애대군이 침통한 표정으로 신음을 흘렸다.

    그제야 그가 귀신같은 형상으로 들이닥친 연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그는 팔불출로 소문이 자자했고, 부인의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인사였다.

    인애대군은 오해가 풀린 듯 한풀 누그러진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게. 내 사병을 내어주지.”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서슬 퍼런 익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군대부인이 납치라니……. 자네나 군대부인이나 다른 사람의 원한을 살 만한 이들은 아닌데. 혹, 누구의 소행인지 짐작 가는 바가 있나?”

    “광무대군.”

    익제의 잇새에서 짓씹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인애대군은 또다시 “흐음.” 하는 침음을 흘렸다. 그가 돌다리를 두들겨보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확실한가?”

    “얼마 전, 광무대군이 회임 축하 선물을 보냈습니다. 임신한 여인에게 좋은 약재라고 하였지요. 그런데 거기에 태아를 사산시키는 낙태약이 들어 있었습니다.”

    더 말할 것 있냐는 듯, 익제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그가 인애대군을 향해 도전적인 시선을 던졌다.

    군대부인이 유산을 했다는 소문은 인애대군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그렇군. 그 일이…….”

    뒷말을 흐린 인애대군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익제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태자 전하를 찾아가야겠네. 태자 전하께 도성 내에 있는 군사를 움직여 달라고 말씀드려야겠어. 늦지 않게 군대부인을 찾고, 흉악한 무리를 소탕해야 하지 않겠는가. 감히 자네의 부인을 건들다니.”

    “고맙습니다.”

    익제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는 인애대군의 꿍꿍이를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고 있었다. 

    인애대군은 채선을 찾는 일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다만, 이 일을 빌미로 광무대군에게 타격을 주고 싶은 것뿐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인애대군을 찾아온 것은.

    태자의 군사.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사병만으로는 부족했다. 인애대군의 사병을 빌린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광무대군이 그녀를 숨기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웬만한 병력으로는 채선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모래사장에 떨어진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막막한 일이었다.

    그에게는 도성을 이 잡듯이 뒤질 막대한 병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채선의 납치를 대대적으로 알려야 했다. 행여 광무대군이 딴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모두의 눈이 그에게 쏠리도록 만들어야 했다.

    익제는 분노로 머릿속이 새빨개진 와중에도 간신히 이성을 유지했고, 가장 현명한 방법을 모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어먹을. 

    그가 주먹을 틀어쥐었다. 당장이라도 말을 달려 직접 도성을 수색하고 싶었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사려 물며 고개를 숙였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익제가 등을 돌렸다. 뒷모습에서도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멍하니 그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던 인애대군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나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가 허둥지둥 출타 준비를 서둘렀다. 이 일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상상하는 인애대군의 입가에 기분 좋은 웃음이 걸렸다.

    ***

    채선은 어둑어둑한 실내를 응시하며 하나씩 생각을 정리했다. 

    방안을 꼼꼼히 훑었지만, 문과 창문 외에 다른 출입구는 없었다. 이곳에서 도망가려면 일단 저 둘 중 하나는 무조건 통과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문은 밖에서 자물쇠를 채워놓았고, 창문은 나무판자를 덧대 못을 박아놓았다.

    그녀의 시선이 창문에 머물렀다. 자물쇠가 잠긴 문보다는 나무판자를 덧댄 창문이 그나마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이곳을 지키는 인원이 얼마나 되느냐는 거다. 오두막에서 도망쳤는데, 수십 명의 괴한이 저를 둘러싸지 말란 법도 없었다.

    그럼 그녀의 고생은 말짱 도루묵이 될 터였고, 경계는 더욱 삼엄해질 터였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다행히 그녀는 도망에 능숙했다. 게다가 산은 그녀에게 더없이 익숙한 장소였다. 일전에 익제에게서 도망을 친 전적도 있지 않았던가.

    “……물론, 멀리 가지 못하고 붙잡혔지만.”

    채선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재수 없는 생각은 떨치려는 듯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우고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단 한 번의 기회.

    “아직 한밤중은 아니겠지?”

    사내가 식사를 들고 왔을 때, 그의 등 뒤로 노을이 졌으니 지금도 그리 야심한 시각은 아닐 것이다. 채선은 식어가는 화로를 보며 시각을 가늠했다.

    그런데 그 순간.

    “?”

    자물쇠가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까 그 사내인가?

    채선은 긴장된 눈으로 문을 쳐다보았다. 끼익, 나무 문이 비틀리며 다시 한번 바깥의 풍경이 드러났다. 

    산중의 찬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꺼져 가던 화로가 완전히 식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았다.

    한 사내가 천천히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 등 뒤의 문은 닫히지 않았지만, 바깥이 어두운 탓에 방안이 더 밝아지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짙게 늘어진 그림자 탓에 문 앞에 선 사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채선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광무대군.”

    광무대군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검은 시선이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일순, 채선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긴장인지 두려움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흡사 뱀 앞의 개구리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숨도 크게 쉴 수 없었다.

    다음 순간, 광무대군의 시선이 느릿하게 그녀를 훑어 내렸다. 무기질의 눈동자가 불현듯, 이채로 번들거렸다.

    그것은 기쁨인 것 같기도 했고, 한탄인 것 같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아쉬움인 것 같기도 했다.

    가까스로 마른침을 삼킨 채선이 입술을 떼려는 순간, 뱀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먼저 그녀를 향했다.

    “귀인의 별.”

    그 한마디를 중얼거린 광무대군이 도로 입을 다물었다. 잠시 기다려 보았으나 그는 친절히 설명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채선이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천천히 심호흡을 한 뒤에야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나를 이곳까지 데려온 연유가 무엇입니까?”

    “하.”

    광무대군이 조소를 흘렸다. 비죽이 올라가는 입꼬리가 유독 선명하게 시야를 파고들었다.

    “그렇게 점잔을 빼고 있으니 꼭 태부의 조카 같군.”

    “…….”

    광무대군의 빈정거림에 채선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따지고 보면, 그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이선을 빼앗아간 것도, 자신을 태부의 조카로 위장해 거짓 혼약을 맺게 한 것도, 익제의 목숨을 노리는 것도 모두 그, 광무대군이었다. 

    황제의 자리에 앉고자 하는 그의 탐욕이 지금의 이 사태를 만들었다.

    그래서 지고 싶지 않았다. 다른 이에게는 모두 머리를 숙인다 해도 그에게만큼은 굽히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먼발치에서도 제가 보이면 빙 둘러 가시던 분이, 행여 저와 눈이 마주칠까 시선도 주지 않던 분이, 저를 이곳까지 데려온 연유가 무엇입니까?”

    그 말에 광무대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늠하는 듯 눈으로 채선을 바라보던 그의 잇새에서 미심쩍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로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인가.”

    “?”

    이번에는 채선이 미간을 좁혔다. 이럴 때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 게 나았다.

    그녀의 표정을 들여다보던 광무대군이 “정말로 모르는 모양이군.”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잠시 틈을 둔 그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입을 열었다.

    “네가 귀인의 별이라는 것을.”

    “!”

    일순, 채선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멍한 얼굴로 방금 들은 말을 천천히 되뇌었다.

    귀인의 별이라고? 누가? ……내가?

    그러다 슬그머니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질 나쁜 장난을 치는 아이를 나무라듯 엄한 표정으로 광무대군을 쏘아보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귀인의 별은 언니, 아니 이선이 아닙니까? 광무대군께서 직접 그녀를 데려가셨지요. 잊으셨습니까?”

    “두 사람이 쌍둥이라지?”

    “!”

    채선은 다시 한번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잇새로 망연한 혼잣말이 비어져 나왔다.

    “그걸 어떻게……?”

    “그 때문에 운명이 뒤엉켰다는군. 네가 귀인의 별이고, 내 부인이 흉인의 별이었다. 그래, 어쩐지 요즘 하는 일마다 꼬인다 했는데, 흉인의 별이 내 곁에 있어서 그런 것이었어. 제기랄.”

    그녀를 바라보는 광무대군의 안광이 번들거렸다. 그 속에 광기가 어린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빠르게 말을 뱉었다. 그는 꽤 초조하고 화가 나 보였다.

    “흉인인 줄 알았던 네가 귀인이었다니, 이렇게 우스운 일이 다 있나. 하하, 내가 어리석게도 은원군의 손에 귀인을 쥐여준 꼴이 되었어. 그게 내 목을 조를 줄도 모르고 말이야. 감히 나를 속이다니!”

    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었다. 격한 감정을 쏟아낸 광무대군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채선은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를 받아들이느라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광무대군이 비죽, 입꼬리를 당겼다.

    “하지만 이제 내 손에 들어왔으니,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도 시간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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