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개의 별이 뜨는 밤 (95)화 (95/131)

16645624450683.jpg

95

산이구나.

서릿발처럼 차가운 분노가 발밑을 얼렸다. 어금니를 꽉 깨문 그가 느릿하게 뇌까렸다.

“내 그자를 결코 편히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살을 저미고 뼈를 으깨어 살려 달라는 말조차 하지 못하도록,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 만큼, 고통스럽게 서서히 죽일 것이다. 그 후 그자의 피를 마시고, 그자의 내장을 한 점 한 점 도려내어 씹어 먹을 것이다.”

마치 저주 같은 그 말에 도영의 심장이 선득하게 식었다. 그는 이제까지 익제가 저토록 화를 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동시에 그가 저토록 초조해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분노와 두려움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주군…….”

다음 순간, 익제가 일갈을 터뜨렸다.

“지금 당장 사병들을 풀어라! 도성을 이 잡듯이 뒤져라! 길가에 널브러진 시체도 빠짐없이 뒤집어보아라. 그리하여 반드시 부인의 행방을 찾아내라. 그렇지 않으면.”

거기서 잠시 말을 끊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익제와 도영의 눈이 마주쳤다. 도영은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냉혹한 눈빛 앞에서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벌겋게 핏발이 선 눈과 흉포한 표정, 익제는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 집에서 누구도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예.”

꿀꺽, 마른침을 삼킨 도영이 한참 만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가 곧장 등을 돌려 방을 나갔다.

***

화영은 마치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향덕원에 머무는 모든 이들, 비단 가신과 하인들뿐 아니라 심지어는 동물들마저도 침통한 빛을 숨기지 못했다. 

풍오는 채선이 사라진 걸 아는지 통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고 했다. 한껏 신경이 예민해진 풍오가 마구 뒷발질을 해대는 통에 누구도 마구간 주위를 얼씬거리지 못했다.

“하아아.”

화영은 송하의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통함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이 바로 송하였다.

그녀는 살아 돌아온 것이 무에 그리 서러운지 운신을 하지 못할 정도로 울어댔다. 지금도 방문 너머에서는 송하의 울음소리가 꾸역꾸역, 닫힌 문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잠시 들어가마.”

화영은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침상 위의 이불이 봉긋했다. 그 속에서 끊임없는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문 앞에서 머뭇거리던 그녀가 침상 옆으로 걸어갔다.

화영은 누군가를 위로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삶이었다. 모두가 그녀를 추앙했고 칭송했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 위에 선 고귀한 존재였고, 다른 이의 아픔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괜찮니?”

흐윽, 끅. 흐으읍.

젖은 숨이 공기를 눅진하게 만들었다. 이불이 들썩거렸다. 하아, 나직한 한숨을 쉰 화영이 안타까운 눈으로 송하를 바라보았다.

한참 만에야 화영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괜찮지 않겠지. 하지만 그 일은 네 잘못이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그 순간, 송하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화영은 퉁퉁 부은 그녀의 얼굴에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어지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송하라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요, 제 잘못입니다. 제 잘못이어요. 군대부인은 저 때문에……!”

하아, 화영은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삼켰다. 듣자 하니, 채선은 하인들을 살려 보내는 조건으로 그들을 따라갔다고 했다.

화영은 아직도 그런 채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주인을 지키는 것이 하인의 의무였다. 

반대로 주인이 목숨을 걸고 하인을 지킨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다.

하지만 군대부인이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군대부인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화영으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아무리 배우려고 애쓴다 한들, 애초에 그릇의 크기가 달랐다.

그녀는 채선이 돌아오면 고향으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씁쓸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채선이 무사히 돌아오면.

심장이 불안하게 너울댔다. 어쩌면 그녀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알려주듯이.

화영은 자신의 시끄러운 속내를 모른 체하듯 평소와 같은 태도로 송하를 나무랐다.

“언제까지 울고만 있을 것이냐. 네가 이러고 있으면 군대부인이 돌아왔을 때, 널 믿고 의지할 수가 있겠느냐. 가뜩이나 홑몸도 아니신데.”

“읍…….”

그 말에 송하가 또다시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머금었다. 그녀의 뺨 위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다음 순간, 송하가 소매로 눈가를 슥슥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이럴 때가 아니지요. 군대부인께서 돌아오시면 드실 수 있도록 음식을 준비해야겠습니다. 방에 화로도 피워야지요. 찬 기운이 들면 안 되니까요. 목욕물도 데워야 하고. 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 그러거라.”

화영은 애써 씩씩한 척 방을 나서는 송하의 뒷모습을 보며 마지막 한숨을 떨구었다. 발치로 떨어진 숨이 가을바람처럼 황량하게 흩어졌다.

***

“으윽.”

채선은 인상을 찡그리며 짧은 신음을 흘렸다. 뒤통수에 둔중한 통증이 느껴졌다. 

조용히 숨을 삼키며 고통이 가라앉길 기다리는 사이,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맞아. 그 사내를 따라나섰지.

거기까지 생각하던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다른 무엇보다 아이가 걱정되었다.

회임을 했다고는 하나, 그녀의 배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크게 부풀지도 않았고, 눈에 띌 만한 변화도 없었다.

그러나 채선은 그 안에서 박동하는 작은 심장을 느낄 수 있었다.

쿵쾅쿵쾅.

그녀의 것보다 조금 더 빠른 박동이었다. 채선의 몸 안에 있는 또 다른 생명은 끊임없이 그녀에게 살아 있음을 주장했다. 

그녀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흘리려는 찰나,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내가 유산했다는 소문이 났다고 했지.

정말로 이선이 건넨 약재에 낙태약이 들어 있었다면, 그건 분명 광무대군의 계략일 것이다. 

그리고 채선을 납치한 배후에 광무대군이 있다면, 그는 그녀의 유산을 믿고 있을 것이다.

들켜서는 안 돼.

그녀는 자신의 배를 감싼 손을 느릿하게 떨구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만은 지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은 무사히 돌아가야 했다.

채선은 눈을 뜨기 전까지 오감을 집중했다. 마지막 기억은 흔들리는 말 위에서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딱딱한 침상 위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그자들의 은신처인가?

거기까지 생각하던 채선이 마침내 결심한 듯 천천히 눈을 떴다. 아니나 다를까, 나무로 만든 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문은 닫혀 있었고, 창문에는 덮개가 내려져 있었다. 그러나 사물의 윤곽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채선은 천천히 눈동자를 굴렸다.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작고 딱딱한 침상과 허름한 의자, 낡은 화로와 동그란 탁자 하나가 전부인 좁은 오두막이었다.

방 안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그제야 채선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번 방안을 둘러보았지만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발소리를 죽이며 문으로 걸어갔다. 슬쩍 밀어 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당겨 보았다. 역시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긴. 인질을 그렇게 허술하게 가둬둘 리가 없지.”

머쓱하게 중얼거린 채선이 창가로 향했다. 

창문에는 나무판자가 덧대어져 있었는데, 네 귀퉁이에 못이 박혀 있었다. 왼쪽 아래의 못이 헐렁하긴 했지만, 손으로 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창밖을 내다볼 수 없으니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어?”

문득, 채선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눈을 감자, 주변의 소리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렸다. 고요한 적막을 깨고 수많은 소리가 쏟아졌다.

찌르르.

까악까악.

찌르레기와 물까치의 울음소리였다. 근처에서 지저귀는 듯, 소리가 제법 또렷했다.

조금 더 집중하자, 희미하게 물이 흐르는 소리도 났다. 아마 이곳에서 꽤 떨어진 곳에 개울이 있는 모양이었다.

창가에서는 황소바람이 비어져 들어왔다. 바람에 섞여 짙은 흙냄새와 나무 냄새가 났다.

“산이구나.”

채선이 감은 눈을 떴다. 그녀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다시 오두막 안을 둘러보았다. 킁킁, 코를 울렸다. 비릿하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짐승의 내장 냄새였다.

“사냥꾼의 오두막인가.”

어느 산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그리 오래 정신을 잃은 게 아니라면 도성 근처에 있는 산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상하게도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결 차분해지고 냉정해졌다. 어쩌면 단지 실감이 나지 않는 것뿐인지도 모르지만,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때, 오두막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채선은 얼른 침상으로 돌아가 몸을 뉘었다. 더러운 이불을 덮는 순간,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찬 바람이 먼저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자, 한 사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광무대군은 아니었다.

사내는 복면을 하고 있었지만 채선은 그가 괴한의 수장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감정한 눈빛. 

닫히는 문 너머로 붉은 노을에 젖은 커다란 밤나무가 보였다.

“드십시오.”

사내는 탁자 위에 투박한 질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는 채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채선은 침상에 앉아 사내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말을 걸지도 않았고, 겁에 질리지도 않았다. 오두막 안에는 불편한 침묵이 먼지처럼 내려앉았다.

능숙한 솜씨로 화로에 불을 붙인 사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문밖에서 다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고서야 채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질그릇 안에 든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희멀건 죽이었다. 그마저도 이미 식은 것인지 김이 나지 않았다.

“먹자.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했어.”

채선이 암팡지게 숟가락을 쥐었다. 그녀는 곡식을 갈아 만든 죽을 꾸역꾸역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먹어야 여차할 때 도망칠 힘이 생기지.”

더욱이 그녀는 홑몸이 아니었다. 지켜야 할 아이가 있었다. 채선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결연한 표정으로 숟가락질을 시작했다. 

식은 죽에 목이 막혔지만, 그녀는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

“은원군께서 오셨습니다.”

“은원군이……?”

인애대군이 하인의 말에 미간을 모으는데, 기척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하인들의 난처한 얼굴 사이로, 익제가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연통도 없이 들이닥친 그를 보며 쓴소리를 하려던 인애대군은 다음 순간,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건 그가 아는 은원군이 아니었다.

인애대군이 아는 은원군은 욕심 없고 사람 좋은, 달콤한 말로 구슬리면 장기 말로 사용하기 쉬운 호락호락한 사내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은 포악한 맹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