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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94)화 (9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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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빌어먹을, 광무대군.

도영이 그들에게 검을 겨누며 다시 물었다. 대답 대신 핑, 하는 파공음이 들렸다.

화살 하나가 날아와 맨 앞에 서 있던 호위의 가슴에 꽂혔다. 마치 각목이 쓰러지는 것처럼 그가 픽 하고 넘어갔다.

“꺄아악!”

송하가 비명을 지르며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람이 죽음을 목도하는 것은 생각보다 무섭고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녀의 다리가 힘없이 풀렸다.

그 순간, 도영이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검은 복면을 쓴 괴한이 아니라 승재의 가슴에 꽂혔다. 

푹.

도영은 냉정한 얼굴로 승재의 가슴에 박힌 검을 뽑았다. 두 눈을 홉뜬 승재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풀썩, 말에서 떨어진 그는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경악으로 두 눈을 크게 뜨던 채선이 다음 순간, 조용히 숨을 삼켰다. 그녀의 눈동자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승재에게 머물렀다. 그제야 두서없는 의문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인적 드문 길로 오라던 익제의 당부는 정말이었을까?

아니, 그 전에 그가 자신을 불렀다는 말은 진실이었을까?

그러나 채선은 상념을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괴한들이 한꺼번에 달려든 탓이었다.

캉, 캉, 날카로운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자작나무 숲을 가득 메웠다. 사방을 둘러싼 검은 눈동자들이 그들을 지켜보았다. 

요란한 소리에 놀란 새들이 푸드덕, 날갯짓을 하며 창공으로 솟구쳤다.

채선은 치맛자락을 꽉 움켜쥔 채, 손바닥보다 조금 큰 창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손끝이 차게 식었다. 그건 결투라기보다 학살에 가까웠다. 

호위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괴한의 수는 호위의 세 배는 넘어 보였고, 팽팽한 듯 보였던 분위기는 급격하게 전세가 기울었다.

다섯 번째 호위가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걸 본 채선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순간, 가마가 기울었다.

“!”

가마꾼 하나가 활에 맞아 쓰러진 모양이었다. 

“이보게!”

비명처럼 고함을 지른 가마꾼 하나가 얼른 두 손으로 손잡이를 쥐었다. 가마는 균형을 되찾았고, 기울어졌던 채선의 몸도 바로 섰다. 

“죄송합니다, 부인.”

채선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가마꾼은 옆의 동료가 죽어가는 것보다 채선의 불편함을 더욱 걱정했다. 그 사실이 슬프고 애틋하며 미안했다.

이윽고 결심한 듯, 채선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부인! 가마 안에서 꼼짝도 하지 마셔요!”

반쯤 정신이 나간 와중에도 송하가 열리는 가마 문을 보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도영이 힐긋, 시선을 던졌다.

“송하의 말에 따르십시오! 이들이 노리는 것은 부인입니다. 제가 어떻게든 길을 내겠습니다!”

그러나 채선은 두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녀를 발견한 괴한의 수장이 궁수를 향해 한 손을 들었다. 시위에 살을 재던 그가 천천히 활을 내려놓았다.

“저 여인은 털끝 하나도 다쳐선 안 된다.”

괴한의 수장은 빽빽한 자작나무 숲에서 채선이 실수로 활을 맞을까, 염려스러운 듯했다. 그리고 그 한마디에 채선은 그들의 배후가 누구인지 눈치챘다.

광무대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왜 자신을 원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는 먼발치에 흉인의 별이 보이기만 해도 꺼림칙한 얼굴로 도망가던 이가 아닌가.

그런데 왜? 

“멈추어라.”

채선이 괴한의 수장을 보며 나직하게 명령했다. 이미 그녀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한 명 한 명의 목숨이 묵직한 납덩이가 되어 그녀의 가슴에 매달렸다. 마치 깊은 늪 속으로 끌려간 듯, 숨쉬기가 힘들었다.

익제는 다른 이들보다 그녀를 귀하게 여기라고 하였지만, 그것이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라면 채선은 아마 평생 그의 말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목숨이 그들의 것보다 비싸거나 무겁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마꾼의 시체 옆에 서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수장을 쏘아보았다. 우두머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가 다시 한 손을 들었다. 괴한들이 주춤주춤, 검을 거두었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내뱉은 도영이 한숨 돌린 듯 채선을 돌아보았다.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도영의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린 핏물이 그의 발밑에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흡, 채선이 조용히 숨을 삼켰다. 

도영이 다급한 목소리로 채선을 불렀다. 

“부인!”

채선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한층 더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가 수장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내 발로 따라갈 것이니 이들을 그냥 돌려보내 주게.”

말 위에 앉은 수장이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가 무감정했다.

채선은 길어지는 침묵이 거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쥐었다.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호위의 손에 들린 검이었다.

처음 잡는 날붙이는 생각보다 서늘하고 무거웠다. 하지만 그녀는 겁먹은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입술 사이로 천천히 숨을 뱉었다.

“군대부인!”

송하가 그런 그녀를 만류하듯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채선은 괴한의 우두머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고 생각한 순간, 무심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설마 그 검으로 내 목을 치시렵니까?”

조롱은 아니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인 양 그의 시선은 채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처음 잡아보는 검으로 사람 죽이는 데 이골이 난 자의 목을 치다니, 어불성설이네. 허나.”

거기서 말을 끊은 그녀가 검의 방향을 바꾸었다. 검 끝이 채선의 목을 겨누었다.

“나를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데려오라 하였다지 않았나.”

“부인!”

송하가 날카로운 비명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녀는 담담한 눈으로 수장을 바라보았다.

“이들을 몸 성히 돌려보내지 않겠다면, 자네도 나를 온전한 몸으로 데려갈 수는 없을 것이네.”

그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광무대군이 무슨 연유로 자신을 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채선이 다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녀의 말에 송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쓰러질 듯이 비틀거렸다. 송하의 뺨이 눈물로 흠뻑 젖었다.

“…….”

채선의 심장이 쿵쾅쿵쾅, 엉망으로 날뛰었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의연함을 가장했다.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고, 겁먹은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다행히 모 아니면 도라고 생각했던 도박이 통했다. 잠깐 고민하는 듯하던 수장이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알겠소.” 

그렇게 말한 수장이 괴한들에게 “물러나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도영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한 발씩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쳤다.

수장이 궁수에게 무슨 말인가 했고, 고개를 끄덕인 그가 즉시 활시위를 당겼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화살은 그대로 말 목을 꿰뚫었다. 

“히이잉!”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말 두 마리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는 추격의 빌미를 끊고 나서야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쪽에서 약조를 지켰으니 그쪽도 약조를 지키라는 듯.

꿀꺽, 마른침을 삼킨 채선이 천천히 걸음을 뗐다. 검날은 여전히 그녀의 목 끝에 닿아 있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예리한 검 끝이 살갗에 닿으며 붉은 생채기를 냈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두려웠다. 이 앞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무섭고 겁이 났다.

“안 돼요, 부인!”

“멈추십시오!”

송하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고, 도영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챘다. 

“…….”

채선은 도영이 붙잡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천천히 손목을 비틀었다. 툭, 도영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채선이 평소와 다름없는 조용한 어조로 속삭였다.

“여기서 몰살을 당하면 누가 은원군께 내 이야기를 전해줄 것이오.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은원군과 함께 오시오.”

그 순간, 말을 몰고 다가온 수장이 채선의 허리를 낚아챘다. 그는 어렵지 않게 그녀를 들어 자신의 앞자리에 앉혔다.

“가자!”

그 한마디에 복면을 쓴 괴한들이 눈 깜짝할 새 물러났다. 

“모두 흩어져라!”

“부이이인!”

송하의 비명이 숲을 찢을 듯 메아리쳤다.

수십 명의 괴한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후, 수장은 호위 다섯만 데리고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이면 남의 눈에 띌 것을 염려한 탓이었다.

계획적이구나.

채선이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둔탁한 무언가가 목 뒤를 내리쳤다. 일순,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와 동시에 채선의 손에 들린 검이 떨어지고, 그녀의 의식이 까맣게 흐려졌다.

***

도영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감히 익제의 얼굴을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슨 핑계를 댄들,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없었다.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선 익제는 마치 석상처럼 시커멓게 굳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무심한 눈동자로 도영을 쳐다보았다.

벌건 핏물로 범벅이 된 도영의 참혹한 모습이 뒤늦게 현실감을 일깨웠다.

“정체불명의, 괴한 일당에게, 납치를 당했다. 누가? 내, 부인이?”

그의 잇새로 우물 밑바닥에서 울리는 것 같은 음산한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삼키듯 그의 말이 뚝뚝 끊겼다.

도영은 꿀꺽, 마른침을 삼킨 후에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짰다.

“예.”

“그런데 네 놈은 살아 돌아왔다?”

“…….”

“내가 나를 지키듯 그녀를 지키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내 부인이 납치를 당했는데, 네 놈은 사지 멀쩡히 살아서 돌아왔다, 이 말이군.”

화를 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노성을 터뜨리지도 않았고, 길길이 날뛰지도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평연한 어조로 입술도 거의 달싹이지 않고 말을 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등골이 서늘했다. 잘 벼린 칼날이 살갗을 한 점 한 점 베어내는 것처럼 도영을 둘러싼 공기가 예리한 살기를 띠었다.

“송구합니다.”

“너는 내가 위험에 처하더라도 네 안위부터 챙길 놈이구나.”

“…….”

도영이 더욱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는 그 순간.

“빌어먹을!”

쾅.

그제야 익제가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며 서탁을 내리쳤다. 호두나무로 만든 두꺼운 서탁이 쩌억, 하고 비틀리는 소리가 났다. 그 위에 올려져 있던 종이 다발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러고도 익제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도저히 삭일 수가 없는지 악다문 턱을 바르르 떨었다. 그의 손등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옆에 있던 한 가령이 전전긍긍했지만, 익제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의 얼굴 위로 수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그는 분노했고, 노여워했으며, 동시에 두려워했다. 행여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광무대군.”

익제가 한 자 한 자 짓씹듯이 그 이름을 내뱉었다. 숨을 들이켜는 그의 목에 굵은 핏대가 섰다. 

그는 제 눈앞에 광무대군이 있기라도 한 양 벌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 눈에 광기가 서렸다.

“빌어먹을, 광무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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