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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93)화 (9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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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

    이선이, 나를.

    차를 가지고 돌아온 송하가 낯빛이 변한 채선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송하의 시선이 그녀의 앞에 쌓여 있는 서신을 더듬었다.

    그녀의 눈매가 대번에 뾰족해졌다.

    “설마 서신에서도 부인의 험담을 하는 것입니까? 이번에야말로 더는 참지 않을 것이어요! 당장 주인님에게……!”

    “그런 것이 아니다.”

    “……예?”

    채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송하가 뛰쳐나가려다 말고 “그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채선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신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나같이 나를 위로하는 서신이구나.”

    “위로요?”

    송하가 영문 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채선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잃은 것을 위로하는 서신이구나.”

    “아이를 잃었다니요? 부인께서요? 이런 망할…… 아!”

    당장이라도 선물을 불 싸지를 듯 손매를 둘둘 걷어붙이던 송하가 문득, 무슨 생각을 떠올린 것인지 입을 다물었다. 

    채선이 그 모습을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이들은 왜 내가 아이를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혹, 짐작 가는 일이라도 있느냐?”

    “아, 아닙니다.”

    송하는 누가 봐도 어색한 태도로 시선을 피했다.

    “아, 참. 연산댁 아주머니가 이불을 걷으라고 하였는데…….”

    “송하야.”

    채선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송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울먹거리는 얼굴로 입술만 짓씹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문 앞에 서 있던 도영이 방 안으로 들어오며 입을 열었다. 채선이 도영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왠지 싫은 예감이 들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저와 제 아이에 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부인께서 요즘 아침저녁으로 드시고 있는 약, 기억하십니까?”

    이선이 준 약이다.

    채선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침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갔다.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어쩌면 그녀는 도영의 뒷말을 짐작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심장이 불안하게 일렁이는 것을 보면.

    도영은 채선의 어깨 너머를 응시하며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채선이 처소에 드는 것을 보고 곧장 익제에게로 향했다. 

    그녀에 대한 보고는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탓이다.

    “그때 그 여인이라?”

    “예.”

    익제가 하던 일을 멈추었다. 생각에 잠긴 그의 모습에 도영은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 보따리에는 뭐가 들었더냐?”

    “태아에게 좋은 약재가 들었다고 합니다. 부인께서 연산댁에게 보따리를 건네주며, 귀한 이에게 받은 선물이니 아침저녁으로 먹을 수 있게 준비해 달라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당장 그 보따리를 가져와라. 그리고 의원도.”

    “예.”

    거기까지 떠올리던 도영이 채선의 흔들리는 동공을 보며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약에 태아를 사산시키는 약재가 들어 있었습니다.”

    “말도 안 돼!”

    채선이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등 뒤의 의자가 덜컹, 하는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채선의 동그란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다. 그녀는 하얗게 얼어붙은 시선으로 도영을 응시했다. 

    그가 무심한 눈으로 채선을 마주 보았다. 그의 행동은 수백 마디의 말보다 진실했다.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

    작고 동그란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만 달싹이던 그녀가 별안간 눈매를 찌푸렸다. 갈색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소. 그건, 그건 내…….”

    언니가 준 것이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지금 그녀는 산골에 살던 천방지축 처자, 심채선이 아니라 태부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태부의 조카에게는 여자 형제가 없었다.

    파르르, 그녀의 긴 속눈썹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송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나 도영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주군께서 의원을 불러다 직접 확인하신 일입니다.”

    “은원군께서…….”

    채선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에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녀의 의문을 알아차린 듯 도영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부인께서 놀라실까, 주군께서 저희의 입단속을 철저히 시키셨습니다.”

    털썩, 채선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공허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반쯤 넋이 나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도영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쪽에서 원한 것이 유산이라면, 그리 소문을 내는 것이 부인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라 판단하시어 거짓 소문을 낸 것입니다.” 

    “…….”

    채선은 더없이 참혹한 표정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이선이 자신에게 낙태약을 먹이려 하다니.

    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익제가 제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하인들에게 함구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반대로 텅 빈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없었다. 아니, 무엇보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선이, 나를.

    발밑이 아득하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혹은, 자신의 몸 반쪽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손끝부터 차갑게 식었다.

    그것은 형체가 없는 고통이 아니었다. 정말로 살점이 저미는 듯 온몸이 아팠다. 채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으으, 잇새로 희미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군대부인…….”

    이선과 대척점에 서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되리라는 것도.

    하지만 그건 두 사람을 둘러싼 상황이 그런 것뿐이었다. 채선에게 이선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중 하나였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선 역시 똑같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맞은편에 서 있지만, 마음만은 늘 서로를 향해 있다고.

    그런데 그 믿음이 흔들렸다. 마치 불안정한 돌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이루고 있는 근간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야. 말도 안 돼……. 분명 무언가가 잘못된 거야.”

    채선의 잇새로 망연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고집스러운 아이처럼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이 아니게 되기라도 하는 양.

    채선이 송하에게 다급한 시선을 던졌다.

    “은원군을 직접 뵈어야겠다. 지금 어디 계시느냐?”

    “인애대군께서 부르셔서 영락궁에 가셨습니다.”

    이번에도 대답은 도영에게서 돌아왔다. 채선은 차마 그를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구었다. 

    도영과 눈이 마주치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을 대면해야 할 것만 같았다. 아직 그럴 만한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가.”

    그녀가 나직한 한숨을 내쉴 때였다. 

    “부인.”

    문밖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도영이 들라고 이르자, 어설프게 낯이 익은 사내 하나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를 보던 도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승재, 주군을 모셔야 하는 자네가 어찌 이곳에 있는가.”

    채선은 그제야 그가 익제를 호위하는 무사 중 하나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가 채선과 도영에게 차례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주군께서 지금 당장 영락궁으로 오시라는 전갈을 넣으셨습니다.”

    “부인을 영락궁으로?”

    도영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와 채선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그녀 역시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예. 인애대군께서 부인을 만나고자 하십니다. 긴히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하여, 불편하지 않으시면 잠시 영락궁으로 와 주십사 하였습니다.”

    “그런가.”

    도영이 채선을 돌아보았다. 

    “거절하셔도 됩니다. 회임을 하신 몸이라 혹 무리가 될까, 걱정입니다.”

    긴히 의논할 일……. 혹시 광무대군과 관련된 일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채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절할 수 있는 명이었다면 익제의 선에서 차단했을 것이다. 그럴 수 없는 명이었기에 승재가 여기까지 그녀를 데리러 왔을 것이다.

    “괜찮소. 내가 가지 않으면 은원군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이오. 서둘러 출발할 것이니 도와주렴.”

    마지막 말은 송하를 향한 것이었다. 

    “예.”

    송하가 곧장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채선은 물끄러미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대한 폭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

    도영과 승재는 말을 탔고, 나머지 여덟 명의 호위무사와 송하는 가마에 보폭을 맞추며 걸었다. 승재가 이끄는 대로 말을 몰던 도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후, 그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이리로 가는 것인가? 이 길은 영락궁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닌데.”

    채선이 살짝 창을 열었다. 옆에서 걷고 있던 송하가 묻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채선은 그녀를 향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잠깐 그녀를 일별한 승재가 도영을 향해 목소리를 낮추었다.

    “은원군께서 이왕이면 사람들 눈을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도영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익제가 그런 명을 내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애대군과 국대부인, 그리고 익제와 채선. 

    네 사람의 합을 그리던 도영이 알겠다는 듯 걸음을 서둘렀다. 가마는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 영락궁으로 향했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숲으로 들어섰다. 자작나무가 하늘을 가릴 만큼 높게 자란 숲이었다. 해가 중천에 떴음에도 그곳은 빛이 들지 않아 어둑어둑했다.

    도영이 괜히 가마꾼들을 재촉했다.

    “서둘러라. 지체할 시간이 없다.” 

    “예.”

    가마꾼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반쯤 뛰다시피 걸었다. 채선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눈썹을 휘었다.

    하얀 껍질 위에 새겨진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떨어져 나간 자국이다.

    그게 꼭 사람의 눈처럼 보여 어쩐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수십, 수백 쌍의 눈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듯했다.

    “바람이 찹니다. 창문을 닫으셔요.”

    송하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꺄아악!”

    그녀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복면을 쓴 괴한 수십 명이 순식간에 그들을 에워쌌다. 

    “웬 놈들이냐!”

    도영이 즉시 검을 꺼냈다. 가마를 호위하던 무사들도 뒤늦게 검을 꺼내 응전 태세를 갖추었다. 송하가 벌벌 떨며 뒷걸음질 치다 가마에 딱 붙어 섰다.

    채선의 놀란 눈동자가 창문 밖을 향했다. 새까만 그림자처럼 보이는 이들이 무감정한 눈을 번득였다.

    도영이 무사들을 향해 “가마를 호위하라! 부인을 지켜라!” 하고 소리쳤다. 도영을 비롯한 열 명의 호위가 가마를 겹겹이 둘러쌌다. 

    가마꾼들은 가마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들고 있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겁먹은 눈동자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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