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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92)화 (9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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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의원을 불러라!

놀란 듯 움찔거리던 익제의 눈동자가 이내 만족스러운 빛을 띠었다. 그것만으로도 용기를 낸 보람이 있었다.

하아.

문득, 그녀의 팔목에서 입술을 뗀 익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말없이 채선을 쳐다보았다. 

나른한 한숨을 흘리던 그녀의 눈동자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채선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갈증이 나는 듯 입술을 핥던 익제가 별안간 목소리를 높였다.

“의원을 불러라!”

“의원을요?”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문밖의 하녀가 어디론가 달려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익제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혀를 찼다. 그는 몹시 초조해 보였고, 한편으로는 짜증이 나 보였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채선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익제가 “아니오.” 하고 고개를 저었다. 깜빡깜빡, 두 눈을 감았다가 뜨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도 아프지 않은데, 의원은 어찌하여 부르십니까?”

“응?”

딴생각에 빠져 있던 익제가 한 박자 늦게 채선을 돌아보았다. 그는 눈썹을 일그러뜨린 채 갈급하게 입매를 쓰다듬었다. 채선의 눈동자가 점점 더 의아한 빛을 띠었다.

“내 그에게 물어볼 것이 있소.”

“물어볼 것이요?”

익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멀뚱멀뚱,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채선은 부리나케 뛰어온 의원에게 던지는 익제의 말을 듣고서야 슬그머니 얼굴을 붉혔다.

“…….”

혹 채선에게 무슨 변고가 생겼나, 숨도 쉬지 않고 달려온 의원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멍한 얼굴을 했다. 익제가 답답한 표정으로 그를 채근했다.

“그래서, 회임과 운우지정이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어서 대답하지 않고 무얼 하느냐. 혀가 잘리기라도 했느냐.”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방 안에 익제의 성마른 다그침만이 가득했다. 채선은 쥐구멍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의원은 목덜미에 흐른 땀을 닦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

“가셨던 일은 잘 끝나셨습니까?”

“그대가 시킨 대로 하였소.”

이선은 표정 없는 얼굴로 달지를 응시했다. 생쥐 같은 생김새의 사내가 작은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소름 끼쳤다. 음흉한 속내가 느껴진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마치 물건의 값을 매기는 것 같은 냉정하고 무기질적인 눈이었다. 

그래서 그 앞에서는 늘 발가벗은 것 같은 수치심이 들곤 했다.

문득, 달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쌍생아였다니.”

끌끌, 혀를 차는 그의 모습에 이선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한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오르는 것은 어렵지만, 굴러떨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달지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감쪽같이 저를 속였습니다.”

“속인 것이 아니오. 묻지 않았으니 말하지 않은 것뿐이오.”

“아니요, 그건 속인 것입니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귀인의 별과 흉인의 별은 마치 한 몸과 같습니다. 지나치게 가까운 탓에 서로의 힘을 상쇄시키지요. 그 탓에 귀인의 별과 흉인의 별을 혼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두 별이 같은 날에 태어난 건 수천 년 동안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의 적은 확률이지만 말입니다.”

이선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상념에 빠진 달지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귀인의 별에 어리는 상서로운 기운을 보았을 때, 처음에는 부인께서 회임을 하신 줄 알았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했습니다. 부인께서 귀인의 별이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부인을 진맥한 의원은 회임이 아니라고 하였지요.”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는지 달지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누런 앞니가 도드라졌다.

“그때, 흉인의 별이 회임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제야 잊고 있던 가능성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만약 두 사람이 쌍생아라면 운명이 엉켰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대의 말은 흉인의 별인 내가 작정하고 귀인의 별인 척 모두를 속였다는 것이오? 혹시 잊었나 본데, 나를 찾아온 것은 달지, 그대요. 내가 그대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이선의 목소리에 시퍼런 날이 섰다. 

“큼큼.”

헛기침을 한 달지가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어쩌다 운명이 이렇게 고약하게 엉켰나 싶은 마음에 그만 실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광무대군께서 부인이 흉인의 별이라는 걸 알고도 내치지 않으셨으니 참으로 다행이지 않습니까?”

비록 두 번 다시 그녀를 찾지는 않겠지만.

그 뒷말은 달지도, 그리고 이선도 알고 있었다. 어딜 가든 이선을 옆에 끼고 다니던 광무대군은 그녀가 흉인의 별이라는 사실을 듣자마자 태도가 일변했다.

정실부인의 자리마저 위협했던 이선은 순식간에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광무대군은 두 번 다시 그녀를 찾지 않았고, 이선의 거처도 그의 처소에서 가장 먼 곳으로 바뀌었다. 

그녀를 시샘하던 부인들은 꼴 좋다며 조소를 흘렸고, 하인들의 태도는 무례하게 변했다.

이선은 느릿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흉인의 별.

그것이 대관절 무엇인데.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대우가 믿기지 않았다.

귀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이는 자신이 아니라 채선이라고 하였다. 어릴 적부터 온갖 불행을 달고 살던 그녀가 사람들에게 길운을 가져다주는 귀인이라고 하였다.

더없이 고귀한 운명.

불현듯, 누구에게도 쌍둥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말라던 엄마의 당부가 떠올랐다. 어쩌면 제 어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말은 정말로 그녀가 흉인이라는 뜻이었다.

“하.”

이선은 코웃음을 쳤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모든 일이 그녀의 뜻대로 풀렸다. 모든 이들이 그녀를 사랑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이 가진 힘이 아니라, 단지 채선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선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애초에 그녀가 흉인의 별이라고 했다면 이토록 큰 상실감과 모멸감을 느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마치 제 것을 빼앗긴 듯 억울하고 화가 났다.

그러나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어떻게 이곳까지 올라왔는데.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빈손의 그녀가 간신히 권력의 끄트머리를 움켜쥐었다. 부드러운 비단옷과 화려한 장신구, 그녀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떠는 하인들까지.

이선은 손에 쥔 것을 놓을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흉인의 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광무대군은 두 번 다시 이선을 찾지 않을 것이다. 그는 보기보다 겁이 많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길은.

“…….”

이선의 침묵을 무어라 해석했는지 달지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흘렸다.

“문제는 귀인의 별이 은원군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알고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은원군이 귀인의 별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불길합니다. 은원군의 별이 광무대군의 별을 가로막는 게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차라리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이선은 달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꼭대기가 붉게 물든 단풍나무가 보였다. 아래에 매달린 나뭇잎은 아직도 초록빛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붉은 저고리에 푸른 치마를 걸친 여인 같았다. 

그 여인 너머로, 자신감 넘치던 한 사내가 떠올랐다. 운명 따위에 주눅 들지 않을 것 같은 기세등등한 사내.

“일단은 귀인의 별이 은원군의 아이를 낳을 수 없도록, 태아를 떨어뜨리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해야지요. 그 아이가 훗날 우리의 목을 조를지 어떻게 압니까?”

달지의 음침한 목소리가 바닥을 기는 뱀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선은 단풍나무 너머에 있는 사내를 좀 더 자세히 보려는 듯, 두 눈을 가늘게 떴다.

***

“음?”

채선은 제 앞에 쌓인 수많은 선물과 서신을 보며 난감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옆에 서 있는 송하를 바라보았다.

“이게 다 무엇이냐?”

“그날 영락궁에서 쫓겨난 고관대작들의 부인이 보낸 것입니다. 겉으로는 군대부인의 회임을 축하하는 선물이지만, 그 속내는 국대부인께 잘 좀 말씀드려 달라는 아부가 아닐까요? 듣자 하니, 아직도 영락궁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꼴 좋지 뭐여요.”

송하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 말에 채선은 한층 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선물을 받는다면 국대부인에게 그녀들의 이야기를 해야 할 터이고, 받지 않는다면 그녀들의 성의를 거절하는 모양새가 될 터였다.

채선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과연. 어디에 줄을 대야 할지 아는 것을 보니, 하나같이 약삭빠릅니다. 그냥 돌려보낼까요?”

“허나, 그러면 그네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겠느냐?”

“상한들 어떻습니까? 군대부인의 눈앞에서 군대부인의 험담을 하며 부인의 마음을 상하게 한 악독한 부인들인데요.”

팔이 안으로 굽는 송하의 말에 채선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는 듯, 송하가 눈에 불을 켰다.

채선은 그런 송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를 대신해 화를 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꽤 행복한 일이었다.

저보다 더 분한 얼굴로 방방 뛰는 그녀를 보면, 슬그머니 고개를 들던 부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불현듯, 이선이 떠올랐다. 그녀도 그랬다. 채선이 마을 사람들에게 험한 꼴을 당하고 돌아오면, 이선은 마치 제가 그 일을 당한 양 화를 냈다.

당장이라도 그들의 멱살을 잡으러 갈 듯한 기세에 오히려 채선이 그녀를 뜯어말려야만 했다.

이상하지.

그러고 나면, 자신의 서러운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왜 그리 보십니까? 제가 틀린 말이라도 하였습니까?”

송하가 입술을 삐죽삐죽 내밀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발언이 과하다 싶었던 모양이다.

채선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 화영도 저를 대신하여 화를 내주었다. 그녀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또 한 명 늘어났다.

그건 몹시 이상한 기분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멀리서 그녀의 그림자만 보여도 피하기 바빴다. 채선은 그들에게 있어 재앙을 몰고 다니는 역신이었고, 불운을 퍼뜨리는 액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를 걱정하고, 그녀를 대신해 화를 내주는 이들이 있었다. 채선은 그것이 익제를 만나고 난 뒤에 일어난 변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제가 주위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을까, 근심했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워 도망가는 대신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키리라 다짐했다.

이 또한 익제로 인해 생긴 마음의 변화였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그가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지도 몰랐다. 단 한마디 말로 그녀를 구원했던 그 날처럼.

채선이 송하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웃었다.

“아니다. 고마워서 그런다.” 

“그럼 모조리 돌려보낼까요?”

송하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때다 싶었는지 앞에 있는 보자기 몇 개도 얼른 주워들었다.

“음…….”

곤란한 듯 침묵하던 채선이 서신 한 장을 펼쳤다.

“답신을 쓰려면 서신 정도는 읽어봐야 하지 않겠느냐?”

“예.”

시무룩하게 대답한 송하가 차를 가져오겠다며 방을 나갔다.

채선은 손에 든 서신을 펼치고 신중하게 읽어 내려갔다. 꾸준히 글공부를 한 덕분에 크게 막히는 곳 없이 술술 읽을 수 있었다.

“어…….”

“왜 그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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