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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91)화 (9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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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

    이선아…….

    “타시지요.”

    도영이 가마를 가리켰다. 그건 이선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난처한 표정으로 송하와 도영을 보던 채선이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주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오겠네.”

    “군대부인!”

    송하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만류했다. 그녀는 홑몸이 아니었다. 떨어지는 가랑잎도 조심해야 할 시기인데, 저 여인이 누구인 줄 알고 덜컥 보낸단 말인가.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느니 애초에 소를 잃지 않도록 조심하는 편이 나았다.

    채선이 그런 송하를 조용히 다독였다.

    “괜찮아. 아는 사람이란다. 송하 너도 일전에 월성궁에 만나지 않았느냐? 그러니 걱정할 것 없어. 멀리 가진 않으마.”

    그녀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던 송하가 “눈에 닿는 곳에 계셔야 해요.” 하고 단단히 다짐을 받았다.

    “그래.”

    채선이 송하를 다독이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선 역시 등 뒤에 하인들을 남겨 두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인들이 두 사람을 지켜볼 수 있는, 그러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적당한 거리였다.

    “이선아…….”

    채선의 잇새에서 참았던 이름이 터져 나왔다. 오랜만에 부르는 그 이름에 수많은 감정이 북받쳤다. 애정과 그리움, 애틋함, 그리고 미안함.

    이선이 가볍게 웃으며 잔소리를 했다.

    “이선이가 뭐니? 언니한테.”

    언니.

    그 말에 채선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언니이자, 분신이었고,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었다. 

    채선은 일부러 입술을 삐죽이며 불퉁한 눈을 했다. 어린 날의 철부지 아이처럼 고집스럽게.

    “치, 고작 나보다 조금 먼저 태어난 것 가지고 유세는.”

    “그 말 엄마 앞에서 했어 봐, 너 엉덩이에 먼지 나도록 맞았을걸?”

    “이제 엄마도 없는데 뭐 어때.”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채선의 눈동자가 일렁였고, 이선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평소와 같은 미소다. 자신의 머리에 묻은 새똥을 닦아주고, 넘어진 그녀에게 손을 내밀던 바로 그 미소.

    “잘 지내지? 별일 없지?”

    채선의 성마른 물음에 이선이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잘 못 지낼 일이 뭐 있겠어?”

    “하지만……!”

    무심코 입을 열던 채선이 그대로 뒷말을 삼켰다. 방금 전, 선우부인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만약 광무대군이 권좌에서 밀려난다면, 이선은 어떻게 될 것인가.

    더럭, 심장이 내려앉았다. 채선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선이 의아한 듯 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걱정 마. 언니는 내가 지킬게.

    채선의 눈동자가 결의로 반짝였다. 그 모습을 지그시 응시하던 이선이 들고 있던 보자기를 건넸다.

    “이게, 뭐야?”

    “들었어. 회임을 하였다며?”

    “응.”

    채선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떨구었다. 어째서인지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웠던 탓이다.

    “언제는 시집 안 가고, 나랑 엄마랑 평생 같이 살겠다더니. 나보다 먼저 회임을 하였어? 거짓말쟁이.”

    “그, 그건……!”

    채선의 얼굴이 한층 더 발갛게 물들었다. 그제야 이선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꽃망울이 터지는 것처럼 해사한 미소였다. 

    그래서 채선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슴이 일렁였다. 그것은 돌아가지 못하는 날에 대한 그리움 같기도 했고, 두 번 다시 잃지 않겠다는 다짐 같기도 했다.

    “태아에게 좋다는 약재야.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나라도 챙겨야 하지 않겠어? 명색이 네 언니인데 말이야. 이걸 주려고, 서로 난감할 줄 알면서도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언니.”

    채선이 기어코 눈물을 떨구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똑같이 배를 곯으면서도 속이 안 좋다며 채선에게 밥 한 덩이를 양보하고, 손이 얼 만큼 추운 날에도 행여 동생이 먼저 빨래를 할까 아침 댓바람부터 얼음물을 깨던 여인.

    이선은 그녀의 언니였다.

    손등으로 가볍게 그녀의 눈물을 훔친 이선이 등 뒤에 선 하인들을 가리켰다.

    “가 봐. 너무 늦어지면 걱정하겠다.”

    “응.”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이선과 함께 돌아가고 싶었다.

    이선이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 듯, 억지로 채선의 등을 떠밀었다. 그제야 채선이 미적미적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채선은 가마에 탈 때까지 몇 번이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때마다 이선은 그 자리에 서서 눈으로 그녀를 배웅했다.

    가마에 올라탄 채선은 이선이 건네준 보자기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고, 감은 눈꺼풀 아래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

    흐으, 이선아……. 

    황금색 보자기가 눈물로 얼룩졌다.

    ***

    “무얼 하는 중이오?”

    불쑥, 날아든 익제의 목소리에 채선이 고개를 들었다. 동그란 두 눈이 금세 수줍은 빛으로 굽어졌다. 그러다 뒤늦게 그가 한 물음을 떠올리곤 머쓱하니 눈길을 떨구었다.

    “화영이 가지고 있는 서책 중 재미있는 것이 많아 빌려 읽고 있었습니다.”

    “호오, 책만 펴면 잠이 드는 부인께서 어쩐 일로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단 말이오? 태교를 하시는 건가?”

    짓궂게 놀리는 그의 말에 채선이 시무룩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그러나 반박할 수 없는 건 정말로 책만 펴면 잠을 자기 때문이다.

    그녀의 잇새로 마치 변명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화영이 요즘에도 심심하면 저자에 들러 책을 한 권씩 사 옵니다. 이렇게 책을 좋아하는 줄 미처 몰랐어요. 모범을 보여야 할 제가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리고 화영이 사 오는 책 중에는 가볍게 읽을 만한 것들이 많아서 저도 졸지 않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하하하. 그렇소?”

    너구리가 요즘 하는 짓이 기특하단 말이지.

    영락궁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는 영악한 너구리를 좀 더 채선의 곁에 둘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채선의 생활반경이 넓어지고 있었다. 비단, 국대부인의 눈에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군대부인으로서 참석해야 하는 자리도, 얼굴을 비추어야 하는 자리도 많았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익제는 갈 수 없는 부인들의 모임이었다. 잘만 하면, 화영을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앗!”

    그때, 책장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던 채선이 짧은 비명을 흘렸다. 

    “무슨 일이오?”

    익제가 서둘러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침울한 얼굴을 했다.

    “종이에 손을 베었습니다.”

    “저런.”

    평소라면 소매에서 깨끗한 천을 꺼내 들고 한달음에 달려올 송하가 보이지 않았다. 방 안으로 들어온 익제가 눈짓만으로 하녀들을 물린 탓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채선의 손을 쥐었다. 

    그리고.

    “익제님!”

    채선의 경악성을 뒤로하고, 익제는 태연하게 그녀의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가 비어져 나온 핏방울을 핥았다.

    비릿한 피 맛조차 달콤하게 느껴진다면, 정녕 자신이 미친 것인가. 그녀의 살점은 또 얼마나 감미로울 것인가. 

    아니, 차라리 뼈째 씹어 먹는다면 영원히 제 곁에서 도망칠 수 없을 터인데.

    “…….”

    속으로 무시무시한 생각을 떠올리던 익제는 파르르, 떨리는 채선의 눈동자를 보고서야 속으로 혀를 찼다. 

    생각이 겉으로 드러났던 모양이다. 소심하고 겁많은 이는 은근히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어느새 불안한 기색으로 제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익제가 얼른 다정한 미소를 걸었다. 그가 한층 더 노골적인 태도로 그녀의 손가락을 핥았다. 마치 그녀의 혼을 쏙 빼놓을 것처럼.

    “읏.”

    아니나 다를까, 울상이던 채선의 얼굴이 금세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방금 전 느꼈던 심장이 선득해지는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상처 난 곳이 쓰라렸지만, 통증 때문도 아니었다.

    그보다 그녀의 몸속에서 알 수 없는 열기가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그 낯설고도 익숙한 감각에 채선은 어찌할 바를 몰라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희미한 불씨가 말초로 뻗어 나갔다. 점점 숨이 가빠졌다.

    익제의 눈동자가 탁한 빛을 띠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 뒤에 찾아올 열락과 환희를 기대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자신이 한 생각을 깨닫고는 부끄러운 듯 눈가를 붉혔다.

    더 이상 피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익제는 여전히 그녀의 손가락을 입안에 머금고 있었다. 그의 혀가 상처를 헤집듯이 집요하게 움직였다.

    “이, 이제 괜찮습니다.”

    채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손을 거두려 했지만, 크고 단단한 손이 손목을 쥐고 있는 탓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따뜻하고 축축했다. 부드럽고 간지러웠다. 야릇하고 모호했다. 수많은 감정이 일시에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고 싶기도 했고, 울음을 뱉고 싶기도 했다.

    그때, 익제가 천천히 눈동자만 들었다. 새카만 시선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덜컥.

    심장이 큰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채선은 어쩌면 자신의 심장이 손가락 끝에 달린 건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손끝이 터질 것처럼 쿵쿵거렸던 탓이다.

    “소, 손을…….”

    그제야 익제가 천천히 그녀의 손가락을 뱉었다. 채선은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와 아쉬움이 반씩 섞인.

    그 순간.

    “!”

    익제의 입술이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손등으로 내려갔다. 채선은 숨을 멈추며 두 눈을 부릅떴다. 손목을 더듬던 입술이 앞으로 건너와 그녀의 푸른 핏줄에 이를 박았다. 

    “아.”

    채선의 잇새에서 미처 삼키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프기도 했고, 당혹스럽기도 했으며, 부끄럽기도 했다.

    손목에 박힌 자신의 잇자국을 보던 익제가 흡족한 듯 두 눈을 가늘게 휘었다. 그의 입술은 폭 넓은 소매를 헤치며 그녀의 팔을 타고 조금씩 아래로 이동했다.

    채선은 점점 가빠오는 숨을 고르느라 어깨를 들썩였다. 익제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의 눈동자 안에서 이글거리는 욕망을 눈치채지 못할 수는 없었다.

    익제는 노골적으로 탐욕을 드러냈다. 그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부인.”

    나직하게 채선을 부른 그가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흐으, 채선의 잇새에서 울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익제가 저를 부를 때마다 그녀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무서운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온몸의 솜털이 한 올 한 올 곤두섰다.

    그녀를 쓰다듬는 손은 더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가끔 그녀를 보는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나곤 했다. 마치 심연에 가두어 두었던 괴물이 번쩍, 눈을 뜨는 것같이.

    그 괴물과 눈이 마주칠 때면 채선의 심장은 아득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익제의 일면이라는 것을. 

    그녀라고 하여 왜 모르겠는가. 그가 자신의 본성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다만, 그 마음이 고마웠을 뿐이다. 무정하고 툭툭거리는 남자가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자신에게는 다정한 가면을 쓴다는 것이.

    그래서 채선은 조금 더 용기를 내었다. 그녀가 두 팔을 뻗어 익제의 목에 둘렀다. 그리고 수면 아래로 숨은 괴물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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