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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90)화 (9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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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

    잘하고 계십니다, 주인님!

    화영의 당당한 발언에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는 익제의 입에서 호통이 터지기 전에 얼른 뒷말을 이었다.

    “회임을 하셨으니 곁에서 살갑게 챙겨 줄 여인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은원군께서 마음을 쓰신다고 해도 남자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제가 한배에서 난 동기처럼 군대부인을 살뜰하게 보살피겠습니다.”

    익제의 눈매가 슥, 하고 가늘어졌다. 그의 안광이 서늘한 빛을 띠었다. 어디서 개수작이냐는 듯.

    잘하고 계십니다, 주인님!

    송하가 속으로 익제를 응원했다. 남자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일은 그녀가 하면 그만이다. 송하는 어림도 없다는 듯, 뾰족한 눈으로 화영을 노려보았다.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챈 화영이 눈물을 글썽이며 채선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군대부인,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도와주세요. 정말로 성심을 다해 부인을 보필하겠습니다. 제발요, 제 평생의 소원입니다.”

    그녀를 난감하게 바라보던 채선이 결국 체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인들도 고된 여정이었을 텐데 곧장 돌아가라고 하기는 너무 매몰차니, 일단 사나흘 쉬면서 얘기를 나눠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송하가 대번에 흰 눈을 떴지만, 익제는 채선의 조심스러운 당부를 거절할 만큼 강심장이 아니었다.

    “과연, 현명한 절충안이로군. 부인 말대로 합시다.”

    익제가 다정하게 웃었다. 고작 사나흘 늦어지는 정도로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뒤끝이 긴 성격이었고, 화영을 자신의 집에 놔둘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그 사이 저 너구리도 단념을 하겠지.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너구리가 제 앞날도 모르고 채선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익제가 낮게 코웃음을 쳤다.

    ***

    “군대부인을 뵙습니다.”

    채선이 영락궁의 후원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고관대작의 부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채선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인애대군의 부인, 선우는 궁 밖에 있는 여인 중 가장 품계가 높았다. 

    그래서 그녀의 곁에는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 아양을 떠는 여인들이 줄을 이었다.

    다른 이들도 있는 자리였구나.

    채선은 곤혹스러움을 숨기려는 듯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화영이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였다.

    선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모두 모였다는 말을 듣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을 터다.

    부인들은 저들끼리는 제법 친분이 있는 사이인 듯 하녀들이 따라주는 차를 마시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채선은 자신을 보는 눈들이 썩 곱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불쑥 나타난, 그들보다 신분이 높은 여인. 그러나 무엇 하나 눈에 띄는 게 없는 비루해 보이는 여인.

    그런데 그 여인이 선우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그러니 영락궁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그들의 눈에 채선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채선은 가시방석 같은 자리에 앉아 소리 없는 한숨을 삼켰다. 불편하다고 하여 도망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건 군대부인이 할 법한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뒤에는 익제가 있었고, 그녀의 무례한 행동은 익제에 대한 험담으로 이어질 터였다.

    채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들의 행동이 조금씩 도를 넘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얼핏 “촌에서 자란.”, “아무것도 모르는.” 같은 말들이 들렸다.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이 틀림없었다.

    으으, 송하가 분한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당장 도영에게 저들의 목을 베라고 하고 싶었지만, 도영은 후원으로 들어올 수 없는 처지였다.

    물론, 들어온다고 해도 정말로 목을 벨 수는 없을 테지만.

    화영은 미심쩍은 눈으로 채선을 힐끔거렸다.

    어째서 가만히 참고 있는 거지?

    누가 봐도 채선이 화를 내야 마땅했다. 그런데 그녀는 묵묵히 시선을 떨군 채 조용히 침묵할 뿐이었다.

    저를 입도 벙긋 못 하게 만들던 그날의 패기는 어디로 간 것인가.

    “오셨습니까?”

    그때, 여인들이 하던 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선과 화영도 덩달아 엉덩이를 뗐다.

    선우가 등 뒤에 하녀들을 줄줄이 달고 걸어왔다. 

    “왔는가.”

    채선에게 눈인사를 건네던 그녀가 옆에 선 화영을 보더니 기억을 되짚듯 가만히 미간을 모았다. 뒤늦게 그녀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선우가 화영을 향해 가벼운 안부를 물었다.

    “국태부인의 조카라고 하였지? 또 보는군.”

    “예, 국대부인. 주화영이라고 합니다.”

    화영이 흠잡을 데 없는 태도로 예를 표했다. 그녀의 눈에 들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래. 도성에서의 생활은 잘 즐기고 계시나? 어려운 일이 있거든 언제든 말을 하게.”

    “덕분에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지방에서 올라와서 그런지 아직도 도성의 문화에 익숙하지가 못해서 가끔 당혹스러울 때가 있을 뿐입니다.”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채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송하가 ‘안 그래도 열불 터지는데 저건 또 왜 저래?’하는 눈으로 화영을 흘겨보았다.

    상석에 앉던 선우가 문화 차이라는 말에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도성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이곳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지방 사람들은 무엇이 다를까, 그녀가 화영에게로 호기심 어린 눈길을 주었다.

    “그래? 이를테면 어떤 것인가?”

    그녀의 물음에 화영은 악의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순진무구한 어투로 대답했다.

    “제가 자란 곳에서는 사람을 앞에 두고 귓속말을 하는 게 무례한 행동입니다. 하녀들이 그랬다가는 경을 치곤 하였지요. 그런데 도성에서는 높은 부인들도 아무렇지 않게 귓속말을 하니, 문화가 달라 내심 당혹스러웠습니다.”

    “…….”

    선우의 시선이 저들끼리 둘러앉은 부인들을 향했다. 그녀들이 당황한 얼굴로 두 눈을 크게 떴다. 차마 선우를 마주 보지 못한 이들이 하나둘, 고개를 떨구었다.

    화영은 태연한 낯으로 차를 마셨다. 

    군대부인에게 배운 돌려까기가 이렇게 먹히는구나. 역시 도성에서는 나보다 한 수 위라니까. 앞으로도 열심히 배워야지.

    화영을 바라보는 송하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누그러졌다. 송하는 마치 화영을 응원하듯 불끈,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네들은 이만 돌아가도 좋네.”

    “구, 국대부인!”

    선우의 축객령에 부인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들에게 일갈하는 선우의 목소리가 제법 매서웠다.

    “내가 초대한 귀한 손님을 내가 없는 자리에서 욕보인다는 건 나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간과할 수 없는 일이네. 이만 돌아들 가게.”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그녀들의 행동에 화영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이것도 채선에게 배운 처세술이었다.

    “혹, 제가 괜한 말을 하였습니까? 저 때문이라면 괜찮습니다. 정작 촌에서 자라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을 들으신 군대부인께선 아무 말 않으시는데, 괜히 제가 나서서…….” 

    “!”

    화영의 한마디가 쐐기를 박았다. 선우의 기세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부인들은 눈도 크게 뜨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말할 것 없네. 이만 물러가게. 그리고 내가 다시 부르기 전까지는 영락궁의 문턱을 넘지 마시게.”

    “……예.”

    선우의 서슬 퍼런 기세에 그녀들이 머뭇거리며 물러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선우가 채선을 돌아보며 부드럽게 위로했다.

    “마음 쓰지 말게. 어딜 가든 시샘하는 무리는 있기 마련이네.”

    “예.”

    채선이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힐긋, 눈동자를 돌려 화영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전전긍긍하던 화영은 태연한 낯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문득, 채선의 눈매가 웃음을 띠었다.

    “그건 그렇고.”

    화제를 바꾼 선우가 말을 하다 말고 화영에게 시선을 주었다. 화영이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락하신다면 영락궁의 후원을 둘러보고 와도 되겠습니까?”

    “그러게.”

    선우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영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전 월성궁에서의 축객령과 달리 그녀는 제법 기분이 좋았다. 도성의 난다 긴다 하는 부인들에게 멋지게 한 방 먹인 덕분이었다.

    “잘하셨습니다.”

    등 뒤에서 날아온 목소리에 화영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와 함께 쫓겨난 송하가 부루퉁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멋있으셨습니다. 제 속이 다 시원했어요.”

    화영은 송하가 자신을 마뜩잖게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그렇게 티를 내는데. 

    다만, 채선이 아끼는 하녀라 손을 대지 못한 것뿐이었다. 채선의 심복만 아니었다면 경을 쳐도 열 번은 더 쳤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제게 다가와 칭찬을 늘어놓았다. 화영이 선명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아까 그 부인들의 얼굴을 보았어?”

    “예. 아주 볼 만하였습니다.”

    송하가 고소하다는 듯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킥킥거리며 꿍꿍이 가득한 웃음을 터뜨렸다. 

    화영은 의외로 채선보다 송하와 더 마음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영락궁의 후원을 거닐었다.

    ***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네.”

    “심상치 않다 하시면……?”

    채선의 물음에 선우가 아무도 없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채선은 긴장한 기색으로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며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광무대군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짙어지고 있어.”

    “아.”

    “인애대군의 말씀으론, 태자 전하께서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하셨다는군.”

    “태자 전하께서 움직이셨다면 혹……?”

    “그래. 두 명의 황자께서 사망한 사건과 광무대군의 관계를 파헤치시려는 거지. 이건 내 짐작이네만, 그냥 넘어가진 않으실 걸세.”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걸음을 옮기던 채선의 발이 문턱에 걸렸다. 

    “앗!”

    나직한 비명을 터뜨리며 앞으로 고꾸라지는 그녀를 도영이 재빨리 붙잡았다. 속절없이 무너지던 몸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괜찮으십니까?”

    “고맙네.”

    채선이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툭툭, 매무새를 가다듬고 대문 앞에 있는 가마를 향해 걸어가던 그때.

    “군대부인.”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던 채선이 별안간 두 눈을 부릅떴다.

    “이……!”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던 채선이 입을 다물었다. 미처 터져 나오지 못한 이름이 채선의 입안에서 휘몰아쳤다.

    이선이 그런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길에서 이러실 것이 아니라 다른 날 미리 전갈을 주시고 향덕원으로 찾아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송하가 한발 앞으로 나서며 에둘러 거절을 표했다. 그녀는 행여 채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이선을 바짝 경계했다.

    도영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낯이 익었다. 어디서 그녀를 봤더라, 생각하던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무대군과 함께 왔던 여인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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