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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89)화 (8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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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

    회임하셨습니다.

    “한 가령.”

    “예.”

    “가마를 준비해라. 내려가는 길이 험하겠구나.”

    “……예.”

    마찬가지로 바보천치가 아닌 한 가령이 허둥지둥거리며 황급히 달려갔다. 그는 꽁지에 불이 붙은 개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였다. 채선이 별안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불안한 얼굴에 익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그녀를 향해 다시 한 발을 떼는 순간.

    “으앗!”

    말벌이 그녀의 눈앞을 맴돌았다. 채선이 휘휘 손을 저었지만, 말벌은 끈질기게 그녀를 따라다녔다. 어디선가 두 마리의 벌이 더 날아왔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울상을 띠었다.

    말벌의 공격을 버티지 못한 채선이 결국 “으아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익제에게로 뛰어왔다.

    풀썩.

    “!”

    익제는 한달음에 달려와 제품을 파고든 채선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먼저 저를 끌어안은 것은 처음이었다.

    채선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익제의 겨드랑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걸 무슨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익제는 적당한 말은 찾지 못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위잉.

    말벌이 이곳까지 그녀를 쫓아왔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그녀를 덮듯 채선을 꼭 끌어안았다.

    “하하하.”

    익제의 잇새에서 호탕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채선이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만 웃으십시오. 남의 불행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적해질수록 익제의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그는 채선을 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아마도 행복이 형체를 가진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

    “감축드립니다. 회임하셨습니다.”

    의원의 말에 송하가 “군대부인!”하고 감격에 겨운 비명을 터뜨렸다. 연산댁이 눈물을 글썽였고, 한 가령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감회에 젖어 있던 한 가령이 대뜸 하녀들에게 호통을 쳤다.

    “무얼 멀뚱히 보고만 있느냐. 부인께서 회임을 하셨다지 않느냐. 곧 찬 바람이 불 터인데, 행여 부인께서 풍한이라도 드시면 어쩔 것이냐.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할까?”

    “예.”

    멍하니 서 있던 하녀들이 서둘러 방을 나갔다. 송하가 입술을 삐죽이며 연산댁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평소에는 부인을 그리 못마땅해하시더니, 회임하셨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손바닥을 뒤집듯이 태도가 싹 바뀌셨어요.”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낸 연산댁이 한 가령의 옷소매를 잡아끌고 방을 나섰다.

    “응? 에잉, 이게 뭐 하는……. 놔 보게, 내 직접 군대부인을…….”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한 가령을 보던 송하가 눈치 빠르게 의원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의원과 도영까지 데리고 방을 나선 그녀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탁.

    닫히는 문 사이로 표정 없는 익제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 그것은 표정이 없다기보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에 가까웠다. 송하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당겼다.

    “…….”

    익제는 채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울컥, 뜨거운 무언가가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느낌이 비로소 형체를 갖추었다. 배 속의 아이가 더없이 무거운 족쇄가 되리라는 사실 또한.

    그녀는 두 번 다시 제게서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빌어먹을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자신에게서.

    이기적이게도 그제야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깊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녹지 않는 찌꺼기처럼 심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불안함이 서서히 용해되기 시작했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천천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무언가, 그의 손으로 움켜쥔 것 같았다.

    드디어.

    “어…….”

    어색한 침묵 속에서 채선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막상 회임을 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실감이 나지 않았던 탓이다.

    회임.

    그게 무슨 뜻이더라.

    그녀는 멍청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그러니까 아이를 가졌다는 뜻이었지.

    아이.

    익제의 아이.

    익제와 그녀의 아이.

    “아……!”

    그 순간, 수많은 감정이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그건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쁨과 환희, 벅참과 희열, 두려움과 불안, 그 모든 것들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이 성난 기세로 밀어닥쳤다.

    “부인.”

    익제가 그녀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그가 가만히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 익제님!”

    채선이 화들짝 놀라 그의 손을 붙들었다. 어찌 제게 무릎을 꿇느냐는 듯, 그녀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울상을 지으며 안절부절못했다.

    익제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다정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제대로 웃고 있는지 묻는다면,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속으로 혀를 찬 그가 그윽한 눈동자 안에 채선을 담았다.

    “그대도…….”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목이 멘 것처럼 쉽사리 뒷말을 잇지 못했다. 채선은 어째서 익제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초조하게 마음을 졸였다. 

    그의 입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마치 무언가를 두려워하듯.

    “그대도, 기쁘시오?”

    “!”

    채선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반쯤 놀라고, 또 반쯤 원망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았다.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술을 뗐지만,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새어 나오지 못한 말 대신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익제가 조심조심 손을 뻗어 그녀의 눈매를 쓸었다. 채선은 애틋하고 가여워 어쩔 줄 모르는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그녀가 젖은 숨을 삼켰다. 채선은 목울대를 크게 한 번 울리고 나서야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기, 쁩니다. 제게 이렇게 큰 행운이 찾아온 게 실감 나지 않을 만큼, 기쁘냐고 물으시는 익제님이 원망스러울 만큼, 그렇게 한량없이 기쁩니다.”

    “고맙소.”

    “읏.”

    채선은 어째서 그가 고맙다고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건 그녀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다. 아니, 저보다는 익제가 부단히 노력했다.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녀가 머뭇머뭇, 시선을 떨어뜨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익제에게 붙잡힌 손이다. 머뭇거리던 채선이 그의 손을 가만히 마주 잡았다.

    익제의 미소가 짙어졌다. 

    “저도 고맙습니다. 익제님은 불운한 제 삶에 찾아온 유일한 길운입니다.”

    “…….”

    물끄러미 그녀를 올려다보던 익제가 채선의 손등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어린 동물처럼 더없이 연약하고 가녀리게.

    “유일한……, 그래, 나는 그대의 유일한 사람이고 싶소.”

    그가 가진 것 없는 사람같이 남루한 표정을 지었다. 비렁뱅이가 가까스로 손에 쥔 엽전 한 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는 비루하고 또한 탐욕스러웠다.

    그를 내려다보던 채선이 애써 화제를 바꾸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울음이 터질 듯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잇새로 짐짓 가벼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국태부인께도 알려 드려야겠어요.”

    “그래, 그럽시다. 내가 서신을 보내겠소.”

    “기뻐하실까요?”

    그녀의 신중한 물음에 익제가 즉답을 했다.

    “당연한 소릴. 곁에 없는 걸 아쉬워하실 것이오.”

    “그런데 어찌 제가 회임한 걸 아셨어요? 저는 물론이고, 송하나 의원도 몰랐는데요.”

    “오늘 만난 고승이 알려주었다오.”

    “정말요?”

    채선이 신기한 표정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원도 아니고 스님이? 

    그녀의 입술을 가르며 깜짝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정말 법력이 대단하신 고승인가 봐요.”

    “그래, 그런가 보오.”

    익제는 서늘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또 그가 무슨 말을 했더라. 귀인의 별을 노리는 게 나만이 아니라고 하였던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내 것을 빼앗길 줄 알고?

    익제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북두칠성의 신령한 빛을 띠고 태어난, 귀인 중 가장 으뜸가는 귀인입니다.’

    정효의 말이 귓가에서 뱅글뱅글 맴을 돌았다. 익제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채선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지만, 상념에 빠진 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

    “이제 회임까지 하였으니 더 귀한 대접을 받겠네.”

    화영이 시샘 어린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이며 털레털레 걸음을 내디뎠다.

    고향에서라면 하지 않을 투박한 행동이었지만, 이곳에서는 그녀를 나무랄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 그녀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씨근덕거리던 화영은 저만치 보이는 책방에 조금 누그러진 기색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그녀가 새침한 표정으로 가게의 발을 걷고 들어갔다.

    “응?”

    그런데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백면서생 같은 사내 대신에 나이 든 할아버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무슨 책을 찾으러 오셨습니까?”

    노인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중한 어투로 물었다.

    화영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다시 한번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손바닥만 한 가게라 사내가 몸을 숨길 만한 곳은 없었다.

    “이 가게 주인은 어디 갔소?”

    그녀의 물음에 노인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가 다 빠진 쭈글쭈글한 입술 사이로 노쇠하고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이 책방의 주인입니다만.”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던 그녀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 낯빛이 희멀건 사내는 누구요?”

    “희멀건 사내?”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화영의 말을 되뇌던 노인이 뒤늦게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머리를 주억거릴 때마다 흰 수염이 힘없이 나풀거렸다.

    “우리 가게의 단골손님입니다. 한동안 제가 건강이 좋지 않아 문을 닫아야 한다는 걸 알고 대신 가게를 맡아주었지요.”

    화영의 미간이 확연히 일그러졌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다가 억지로 입을 열었다. 부루퉁한 목소리가 그를 향했다.

    “그 사내는 어디 사는 누구요?”

    “허허허. 제가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그저 종종 책을 사러 오시는 단골손님이라는 것만 알 뿐입죠.”

    “아니, 당신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가게를 맡긴단 말이오!”

    화영이 노인에게 화를 내듯 톡 쏘아붙이고는 쌩하니 등을 돌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갑자기 호통을 들은 노인이 얼빠진 얼굴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살다 보면, 일진이 사나운 날이 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고, 뭘 해도 안 되는 그런 날 말이다. 화영에게는 오늘이 그랬다. 

    씨근덕거리며 향덕원으로 돌아온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고향에서 온 하인들이었다. 화영은 저를 데리고 가려는 하인들을 보며 채선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군대부인, 저를 보내지 마세요. 아직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외숙부께서 걱정하시는 건 생각지도 않는 것이냐. 시집을 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이 무슨 철없는 짓이냐.”

    익제의 꾸지람에 화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시집을 가려고 이곳에 온 거거든요, 라는 말은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익제가 보이는 것만큼 다정하고 인자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대부인께는 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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