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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88)화 (8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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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천을귀인.

주름진 얼굴은 묘하게 맑아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세상 이치에 통달한 노인인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이제 막 속세에 한발을 내디딘 청년인 것 같기도 했다. 

익제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십수 년 전에 향덕원을 지나며 조언을 했다면, 그리 젊은 나이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청아한 느낌이 있었다. 

신선이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흉인의 별에 대해 알고 있나?”

익제의 물음은 성급했고 참을성이 없었다. 더욱이 텃밭 앞에 서서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한 가령이 그런 그를 만류하려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의 표정이 더없이 절박하고 간절해 보였던 탓이다.

그걸 정효 스님이라고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리고 익제 본인도.

그가 낮게 혀를 찼다. 자신의 약점을 까발리고 말았다는 듯 곤혹스럽게. 

정효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의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 평연하게 걸음을 옮겼을 따름이다. 

익제가 덩달아 걸음을 내디뎠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란히 걷기만 했다. 그렇게 스무 보쯤 걸었을까. 

더 이상 참지 못한 익제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불현듯, 정효 스님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익제가 뒤늦게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

그곳에 채선이 있었다.

그녀는 석탑을 따라 돌며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더없이 평온했고 경건했다. 마치 엄숙한 의식을 진행하는 듯한 채선의 모습에 익제는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무슨 소원을 비는 것일까.

바라건대, 그 속에 자신의 자리가 하나쯤은 있기를.

그가 조용히 주먹을 움켜쥘 때였다.

“천을귀인.”

불쑥, 튀어나온 정효 스님의 목소리에 익제의 시선이 천천히 그를 향했다. 정효 스님이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북두칠성의 신령한 빛을 띠고 태어난, 귀인 중 가장 으뜸가는 귀인입니다.”

익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정효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을 뿐이다. 그가 하는 말을 모조리 외우기라도 할 것처럼 신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천을귀인은 단순히 복을 불러오는 것뿐 아니라, 흉한 일도 길하게 바꾸어줍니다. 곁에 있는 이들을 이롭게 만들지요. 다만.”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정효 스님이 익제를 보았다. 그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신의 몸으로 흉한 기운을 받아 그것을 길한 기운으로 정화를 시키니, 본인의 삶은 꽤 고단하였을 겁니다.”

“내 부인이.”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익제가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 채선의 모습이 걸렸다. 옅은 분홍빛 치마가 석탑 뒤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천을귀인이란 말인가?”

“예. 제 눈에는 누구보다 고귀한 분으로 보입니다. 저분을 둘러싼 오색의 빛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저 빛이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정효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강렬한 햇살에 눈을 뜨지 못하는 사람처럼.

익제가 삐딱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정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었다.

한 가령은 두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채선을 응시했다. 끔뻑끔뻑, 주름진 눈을 몇 번이고 감았다 떴으나 그의 눈에 신비로운 색채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손등으로 눈두덩을 비벼 보았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정효가 익제에게 시선을 던졌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정효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이 만나신 데는 연유가 있겠지요. 사필귀정,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가는 법이니.”

그가 알쏭달쏭한 말을 뱉으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반대로 익제의 미간은 점점 더 구겨졌다. 

“그게 무슨 뜻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알 수 없었던지 익제가 그를 다그쳤다. 하지만 정효 스님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익제가 처음 한 얘기로 돌아갔다.

“빛과 어둠.”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익제는 수수께끼를 눈앞에 둔 사람처럼 또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삶과 죽음, 음과 양, 나와 남. 세상 만물에는 늘 양면성이 존재합니다. 그러니 귀인의 별이 있다면 흉인의 별 또한 존재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지요. 다만, 귀인 중에 으뜸인 천을귀인이 옆에 있으니 흉인의 불운을 모조리 길운으로 바꾸어 놓았을 겁니다.”

“그렇다는 말은?”

정효 스님은 이번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쯧, 낮게 혀를 찬 익제가 조바심을 냈다.

“내 부인에게 자매가 있네. 그녀가 흉인의 별이라는 뜻인가?”

“날 때부터 하나였던 별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깊숙이 관여하고 있지요. 양과 음이 하나로 섞이면 무가 되듯이 귀인과 흉인이 한 몸이라 크게 길한 일도, 크게 흉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듣기로, 남들이 부인을 흉인이라 불렀다 하였네.”

정효 스님이 지그시 입꼬리를 당기며 염화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부인께서는 그분의 액막이였을 겁니다. 허나, 액막이였던 귀인과 따로 떨어지게 된다면 흉인은.”

“흉인은?”

정효 스님은 꿀이라도 먹은 것처럼 그 이상 입을 떼지 않았다.

빌어먹을 작자. 제가 말하고 싶을 때는 수다쟁이처럼 떠들어대더니, 말하고 싶지 않을 때는 천기누설이라도 되는 양 입을 다무는군.

익제가 속으로 그의 흉을 지껄였다. 그러나 그의 의식은 금세 흉인의 별로 날아갔다. 

광무대군, 그자가 흉인을 택한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하던 익제가 비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 순간, 석탑을 돌던 채선이 별안간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와 익제의 시선이 마주쳤다.

“!”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접으며 해사한 미소를 건넸다. 덩달아 그의 눈매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방금까지 맺혀 있던 조소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의 얼굴에는 더없이 다정한 미소가 어렸다.

채선은 뒤늦게 그의 옆에 있는 스님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던 그녀가 옆에 서 있는 한 가령을 보고는 쭈뼛쭈뼛, 눈동자를 들었다. 

인사를 해도 되는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행여 한 가령에게 잔소리를 들을까, 그녀의 눈동자가 자신감 없이 흔들렸다.

“듣고 싶은 말은 모두 들었소.”

익제가 시선은 채선에게 둔 채 나직하게 말했다. 그는 어서 빨리 채선의 곁으로 가고 싶은 듯 조바심을 냈다. 

정효 스님이 짓궂은 눈으로 익제를 보았다.

“만약 저분이 흉인의 별이었으면 어찌하실 생각이셨습니까?”

“흉인의 별.”

익제는 입술도 달싹이지 않고 그 단어를 내뱉었다. 그가 피식, 서늘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안광이 예리하게 번들거렸다.

“그렇다면 그 개 같은 운명을 내 손으로 바꾸어야지.”

하인들을 시켜 향덕원에 얼씬거리는 새를 모조리 쫓아내고, 길게 자란 풀을 죄다 베어낸 것처럼.

“하하하.”

정효 스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은원군께서는 운명에 끌려다니실 분은 아니십니다. 가지고 싶은 것 있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끝내 쟁취하실 분이지요.”

“난 한 사람이면 족해. 그 사람을 가지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생각이지. 그런데 지금은.”

익제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흉인의 별은 누구도 탐내지 않는 하찮고 남루한 이다. 

아니, 오히려 멀리서 흉인의 그림자라도 보이면 다른 길로 돌아갈 만큼 사람들이 저어하는 이였다.

그런 그녀가 실은 귀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났단다. 

누구보다 고귀한 운명.

그녀가 하찮은 돌멩이가 아니라 빛나는 보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익제가 싸늘한 눈으로 정효 스님을 노려보았다.

“입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지금 당장 부처님을 뵙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건 온건한 협박이었다. 아무리 속세를 떠나 있었다 한들, 정효 스님이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게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정효 스님은 익제의 서늘한 시선을 무심하게 받아넘겼다. 익제는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을 벨 수 있는 사람이었다. 

동시에, 지금 당장은 자신의 목을 베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채선이 보는 앞에서는.

“하하하.”

정효 스님이 다시 한번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뒷짐을 지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사흘 후면 묵언 수행에 들어갈 예정이라 말입니다. 다음번에 뵙는 것은 세상이 바뀐 후가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바뀐 후?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익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아무렴 어떻냐는 듯 점잖은 표정으로 “오늘 이야기는 고마웠소.”라고 말하며 걸음을 뗐다.

그는 등 뒤에 정효 스님을 남겨두고 곧장 채선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익제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늘 그렇듯 수줍고, 설레는 얼굴로.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등 뒤에서 날아온 목소리에 익제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느릿하게 등을 돌렸다.정효 스님은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맑게 웃고 있었다.

“귀인을 손에 넣고자 하는 이가 은원군뿐만은 아닐 테니까요.”

“…….”

익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누구보다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손안에 쥔 것이 하찮은 돌멩이가 아니라 가공하지 않은 원석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정효가 경고하지 않아도 그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누군가 그녀를 탐낸다면 주저 없이 그자의 목을 딸 것이다.

그가 섬뜩한 속내를 감춘 채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선이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익제는 어지럽게 휘몰아치는 상념을 숨기려 짐짓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그녀가 안심한 듯 입꼬리를 당겼다. 

그 순간, 익제는 결심했다.

오늘 들은 이야기는 함구하기로.

그녀의 원죄와도 같은 마음의 짐을 덜고 주고 싶었다. 흉인의 별이라는 족쇄에 묶여 살아온 그녀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자신의 손으로 그 빌어먹을 운명의 사슬을 끊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다른 이가 그녀를 탐낸다면, 혹은 그녀가 홀가분하게 제 곁에서 날아가 버린다면.

“…….”

익제는 누구보다 탐욕스러운 이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일말의 가능성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는 땅을 치며 후회해도 늦었다. 그러기 전에.

“아, 그리고.”

정효 스님이 다시 그의 걸음을 잡아챘다. 또 무언가, 익제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정효 스님이 대수롭지 않은 듯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축하드립니다.”

익제가 미심쩍은 눈빛을 던졌다. 이번에는 또 무슨 꿍꿍이인가, 그의 머릿속을 파헤칠 기세로.

“귀인을 둘러싼 오색 빛 너머로 푸른 기운이 넘실거리는군요.”

정효 스님은 거기까지 말한 뒤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 이상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듯이. 

저벅저벅, 그가 시야에서 멀어졌다.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채선이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익제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색의 찬란한 빛도, 넘실거리는 푸른 기운도.

하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바보천치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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