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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87)화 (8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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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이 땡중이 보자 보자 하니까.

“예. 그리 말했답니다.”

한 가령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익제가 대뜸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제 발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도성 구경을 하려고 온 것이지 주군을 만나러 온 건 아니라고…….”

“그 빌어먹을 땡중. 터진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군.”

못마땅한 얼굴로 나직이 정효 스님의 험담을 지껄이던 익제가 “그래서?” 하고 한 가령을 쳐다보았다.

“그 땡중이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다고?”

한 가령은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정효 스님의 말이 옳았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게 되어 있었다.

짐짓 태연함을 가장한 한 가령의 잇새에서 절 이름 하나가 흘러나왔다. 익제는 마치 뇌리에 각인이라도 시키듯 그의 말을 나직이 되뇌었다.

그러다 마침 생각났다는 듯 또다시 한 가령에게 시선을 주었다.

“원진은?”

“이틀 뒤에 풍주를 출발하겠답니다.”

“이백중이 도착했다던가?”

익제의 무심한 물음에 한 가령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지고, 표정 또한 진중한 빛을 띠었다.

“예. 이백중 어른께서 풍주에 도착하셨답니다. 오늘부터는 이백중 어른께서 직접 군사를 지휘할 것입니다. 원진은 이틀 동안 그곳의 일을 인수인계한 후 출발할 예정입니다.”

“그래.”

한 가령은 힐끔, 눈동자만 들어 익제의 표정을 살폈다.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고집불통 같은 어른이 움직였나, 사뭇 궁금한 얼굴로. 

그러나 익제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한 가령이 조용히 숨을 내쉬는데 익제의 무심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마치 순풍에 돛을 단 듯,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는군. 이상하리만치 말이다. ……부인은 지금 어디 있나?”

“국대부인께서 부르셔서 영락궁에 가셨습니다.”

“그래, 그랬지.”

익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애대군의 부인은 채선의 무엇에 꽂힌 것인지 요즘 들어 부쩍 그녀를 집으로 초대하곤 했다.

티를 내지는 않으나 울적해 보이는 그녀의 기분이 전환될까 싶어 마지못해 허락해 주었는데, 괜한 짓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눈 닿는 곳에 없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기갈 같은 조바심이 일었다.

이러니 한 가령이 부인을 앞세우는 것이지, 쯧.

익제는 최근 미인계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는 중이었다. 채선은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의 경국지색은 아니었지만, 그의 혼을 빼놓기에는 충분했다. 

익제는 아침마다 품에서 그녀를 떼어놓는 것이 그야말로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해가 벌써 중천에 떴는데요.”

채선이 난감하게 중얼거리며 바르작거리면 익제는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곤 했다.

“중천은 무슨. 아직 멀었소.”

“하인들이 문밖에서 서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요. 이만 일어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그들의 일이오. 할 일 없이 서성거리는 것.”

그러면 채선은 체념한 얼굴로 나직한 한숨을 흘렸다. 익제는 그녀가 조금 더 영악하고 요사스러웠다면, 나라는 아니더라도 향덕원 하나쯤은 망하게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그녀와 침상 위에서 뒹굴고 싶었다. 역사에 수치로 남은 암군이 이렇게 만들어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익제님이 게으름을 부리시면 제가 뒷말을 듣게 될 텐데요.”

“……알았소. 지금 일어나고 있지 않소.”

그 말에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영악하지는 않으나, 본의 아니게 저를 쥐락펴락하는 여인이었다.

뚱한 그의 대답에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던 채선이 수줍게 입을 뗐다.

“대신 제가 의관을 입혀 드려도 괜찮을까요?”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말이오?”

“읏.”

익제는 붉게 달아오른 채선의 뺨에 입을 맞추고서야 침상 아래로 내려섰다. 기다렸다는 듯 하인들이 방으로 들어와 그의 준비를 돕기 시작했다.

“저리 욕심이 없어서야.”

익제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머물러 있는 걸 한 가령은 놓치지 않았다. 

뭐, 욕심이 사나운 것보다 없는 게 낫긴 하지.

한 가령은 괜히 심술궂게 퉁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익제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서는 그의 눈에 어딘가로 분주하게 걸음을 옮기는 연산댁이 눈에 띄었다.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시나?”

“부인께서 곧 당도하신다 하여 마중을 나가는 중입니다.”

“에잉, 집 안에서 길을 잃으실 것도 아닌데 마중은 무슨.”

한 가령은 투덜거리면서도 연산댁을 따라나섰다. 그녀가 살집 두둑한 눈매를 접으며 둥글게 웃었다.

“그러는 가령 어른께서는 어디를 가십니까?”

“나야 자네와 이야기나 나눌까 하여 가는 것이지, 마중을 가는 것은 아니네.”

“예, 예.”

고집스러운 그의 태도에 연산댁이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말없이 걷던 그녀가 불쑥, 입을 열었다. 푸근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요즘 주인님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이시지요?”

“뭐, 그건 그렇네만.”

“우리가 아무리 애정을 드려도 채우지 못하는 외로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메꿔줄 짝을 만났으니 다행한 일이 아닙니까. 평생 그 짝을 만나지 못하고 스러져 가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자네, 지금 환관이었던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호호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한 가령의 불퉁한 기색에 연산댁이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무심코 걸음을 멈춘 한 가령이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새파란 하늘 위로 하얀 뭉게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눈이 시릴 만큼 선명한 대비가 시선을 잡아챘다.

“이 평온이 오래 갔으면 싶네만.”

덩달아 그 자리에 멈춰 선 연산댁이 한 가령의 수심에 젖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을 뿐이다.

짧은 한숨을 내쉰 그녀가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한 가령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도착한 것과 동시에 대문 너머에서 화려한 가마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

“절이요?”

채선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익제가 숟가락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채선이 흰 쌀밥 위에 고기반찬을 올려주었다.

“그곳에 법력이 높은 스님이 머물고 있다더군. 말씀이나 구할까, 들르려고 하는데 부인도 함께 가시겠소?”

“좋아요.”

채선이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익제가 그녀를 놀리려는 듯 “산세가 험해 가는 길이 쉽지 않을 터인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괜찮습니다. 산이라면 누구보다 잘 타는걸요.”

채선이 씩씩하게 대답했고,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누그러진 눈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채선이 수줍은 양 시선을 떨구었다.

“아니, 도대체 왜 저까지…….”

화영이 불평을 터뜨리다가 익제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워낙 좁고 가파른 길이라 가마가 올라갈 수 없었다. 화영은 네발로 기다시피 산을 오르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의 이마가 땀으로 번들거렸다. 치맛자락은 흙투성이가 된 지 오래였다.

앞서가던 익제가 용케 그녀의 혼잣말을 알아듣곤 잔소리를 했다.

“정기가 맑은 곳이라 높은 부인들도 공양을 드리러 오는 곳이다. 이 길을 지나 절에 도착하면 세속의 지위는 잊고 절로 겸손한 마음이 든다더군.”

“공양은 무슨……. 내세에 잘 사는 것보다 현세에 잘 사는 것이 중요하지.”

화영이 이번에는 익제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더 작은 소리로 구시렁거렸다.

익제의 시선이 잠시 그녀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가 픽,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방금 전의 말은 핑계였다. 

오늘의 산행은 채선을 처음 만난 날 그녀가 저지른 무례에 대한 보복이었을 뿐이다. 언젠가는 한 번 갚아주리라, 벼르고 있던 마음의 빚.

“자, 부인. 내 손을 잡으시오.”

익제가 채선을 향해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채선은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쓰러지기 직전인 화영이나 송하는 물론이고, 웬만한 남자 하인들보다도 산을 잘 탔다. 오죽하면 한 가령이 “날다람쥐 같은 분이군.”이라며 혀를 찼겠는가.

그러니 굳이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줄 필요는 없었다. 채선이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익제는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결국 그녀가 머뭇머뭇, 팔을 뻗어 익제의 손을 잡았다. 그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마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가을 햇살처럼.

그게 좋았다.

채선은 멍하니 익제의 얼굴을 보며 두 눈을 휘었다. 잠깐의 부끄러움을 참으면 보상처럼 돌아오는 그의 미소가 더할 나위 없이 기꺼웠다.

“거의 다 왔소. 조금만 더 힘을 내시오.”

“예.”

채선은 익제의 손을 단단히 잡고 경사진 길을 올랐다. 숨이 거칠어질 만큼 가파른 길이었지만, 그녀는 이 길이 언제까지고 이어지길 바랐다. 

물론, 그 말을 했다가는 화영과 송하가 대번에 눈을 흘길 거라 꾹 눌러 참았지만.

“허억, 허억.”

거의 기진할 듯 비척거리며 산을 오르던 화영이 마침내 나타난 절을 보고 후들후들, 다리를 떨었다. 

그녀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일주문 앞에 주저앉았다. 화영의 어깨가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괜찮은가?”

채선이 그런 그녀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았다. 화영은 대답할 기력도 없어 보였다. 그녀의 낯빛이 새하얬다.

채선이 하인에게 물을 떠오라 말하고는 익제를 돌아보았다.

“저희는 천천히 둘러볼 것이니 만나기로 한 분을 뵙고 오세요.”

“알겠소. 내 그럼 잠시 스님과 인사를 나누고 오리다.”

한 가령은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것 같은 모습으로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암, 향덕원의 안주인이 되려면 저 정도 체력은 있어야지. 

그러다 방금 제가 한 생각을 떠올리곤 “에잉.”하며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끌끌 혀를 차던 한 가령이 멀어지는 익제의 뒷모습을 보고는 헐레벌떡, 걸음을 서둘렀다.

“정효 스님은 예불을 드리는 중이십니다.”

“정효 스님이요? 좀 전에 마당을 쓸고 계시는 걸 보았습니다. 제가 하겠다고 말씀드려도 누가 한들 무슨 상관이냐 하시며…….”

“정효 스님께서 방에 드시는 걸 보았습니다.”

“방금 전에 해우소로 들어가셨습니다.”

번번이 허탕을 친 익제가 약이 바짝 오른 얼굴로 혀를 찼다. 한 가령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연신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 이 땡중이 보자 보자 하니까.”

그들이 정효 스님을 발견한 곳은 절 뒤편에 위치한 텃밭에서였다. 그 뒤로도 두어 번 더 허탕을 친 후였다.

성큼성큼, 탐탁지 않은 기세로 다가오는 익제의 기척에 정효 스님이 흙투성이가 된 손을 털고 일어섰다.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기다렸다?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오늘쯤 오시지 않을까, 했습니다.”

“이왕 기다릴 거 방 안에서 얌전히 기다렸으면 더 좋았을 것 같지 않소? 그럼 우리의 첫 만남이 좀 더 화기애애했을 터인데.”

“하하하.”

소리 내어 웃은 정효 스님이 “나이 든 손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하고 대꾸했다. 

익제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치 눈앞의 사내를 믿어도 될까, 가늠이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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