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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86)화 (86/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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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그런 뜻이 아닌데요!

“그나저나 며칠 전의 자수도 그렇고, 오늘 이 도라지 정과도 그렇고. 부인은 도대체 못 하는 게 무엇이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애썼을 생각을 하니 내 마음이 안쓰럽소.”

“읏.”

채선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삼켰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채선은 붉게 물든 얼굴로 나머지 세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화영과 송하, 그리고 도영까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풀 죽은 듯 축 늘어졌다. 일부러 이러시나, 라는 원망스러운 마음이 삐죽 고개를 드는 순간, 익제와 또다시 눈이 마주쳤다.

“…….”

그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결국 채선의 원망은 채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스르륵 녹아 버렸다.

그녀의 마음을 손바닥 보듯 읽고 있는 익제의 미소가 조금 더 짙은 빛을 띠었다.

그가 채선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낮게 속삭였다. 기분 탓인지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불을 핥고 지나간 것 같았다.

“부인의 뜻은 잘 헤아렸소. 정력에 좋은 도라지를 먹고 오늘 밤도 힘을 써 보라는 의미가 아니오?”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닌데요!”

“하하하.”

기겁을 하며 펄쩍 뛰는 채선의 모습에 기어코 익제가 박장대소를 했다. 다음 순간, 그녀의 두 뺨을 손으로 감싸 쥔 익제가 대뜸 고개를 숙였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도저히 그러지 않고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뜨악한 표정의 세 사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을 나갔다. 곁눈질로 그들을 지켜보던 채선의 잇새로 체념 어린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도 잠시, 채선은 천천히 두 눈을 감으며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

“정효 스님께서 이틀 후면 도착하실 것 같습니다.”

익제는 한 가령의 주름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매가 삐뚜름했다. 

한참이 지나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슬쩍 고개를 들던 한 가령이 그의 표정을 보고는 난감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로 부인을 꾀었나?”

“꾀다니요.”

한 가령이 슬쩍 발뺌을 했다. 하, 냉소를 흘린 익제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그의 머릿속으로 어젯밤, 채선이 했던 베갯머리송사가 떠올랐다.

“원진을 불러올리시는 게 어떠세요?”

배부른 포만감과 나른한 여운에 취해 있던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행간에 숨은 의미를 눈치챘다.

“한 가령이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슬그머니 눈을 피하는 채선의 모습에 익제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땀으로 젖은 채선의 귀밑머리를 넘기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신경 쓸 것 없소.”

“하지만 몇 달 사이, 문효대군과 효성대군이 차례로 돌아가셨잖아요. 광무대군이 익제님에게 무슨 수작을 부릴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만에 하나, 익제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모두 제 탓일 겁니다.”

흉인의 별.

그녀는 아직도 그 개 같은 운명의 족쇄에 발이 묶여 있었다.

“약삭빠르기는.”

익제는 눈앞에 있는 한 가령을 노려보며 혀를 찼다. 그가 채선을 이용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원진을 불러들이라.”

“예.”

그 꿍꿍이를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는 자신이다. 그는 그녀의 얼굴이 근심으로 젖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죄책감으로 물드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았다.

애써 흡족한 기색을 감추고 물러나는 한 가령을 익제가 불러세웠다.

“아니, 그 전에.”

거기서 잠시 말을 끊은 그가 생각에 잠긴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한 가령은 그의 뒷말을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침묵했다.

마침내 생각을 끝낸 익제가 노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이백중에게 서신을 띄워야겠다.”

“이백중 어른에게요?”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한 가령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러다 일그러지는 익제의 표정을 보고서야 “예, 알겠습니다.”하고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탓이었다.

“한 번 더 자네 속셈에 내 부인을 이용해 봐.”

“…….”

“뒷방 늙은이로 만들어 줄 테니까.”

서슬 퍼런 그의 협박에도 한 가령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뒷방 늙은이가 되는 건 두렵지 않았다. 그가 두려운 건 익제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이다.

“예.”

한 가령이 공손한 인사를 올리곤 물러섰다. 닫히는 문 너머로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

광무대군은 평소의 침착함을 잃어버리고 초조한 표정으로 다리를 떨고 있었다. 찌푸린 눈매 속에 일그러진 눈동자가 파묻혔다.

그는 몹시 화가 나고, 불쾌해 보였다. 동시에 불안하고 조급한 듯 보이기도 했다.

“젠장!”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친 광무대군이 욕설을 내뱉었다. 탁자 위에 있던 찻잔이 달그락거리며 요란스레 흔들렸다. 

그가 맞은편에 있는 달지를 향해 못마땅한 시선을 던졌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효성대군의 죽음에 내가 개입되어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지 않으냔 말이다!”

달지라고 그 연유를 알 리 없었다. 만사가 형통할 때는 모든 게 자신의 덕분인 듯 살갑게 굴던 광무대군은 일이 어긋나기 시작하자 그 역시 모든 게 자신의 탓인 듯 역정을 냈다.

권력자의 변덕이야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지만, 그 모습이 꽤 괘씸했다. 그러나 광무대군은 아직 그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달지가 못마땅한 속내를 감춘 채 짐짓 웃는 얼굴을 꾸며냈다.

“분명 인애대군의 소행일 것입니다.”

“형님이……?”

그가 인애대군의 이름을 꺼내자, 분노의 화살이 방향을 틀었다. 달지는 생쥐 같은 눈으로 광무대군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효성대군에게 손을 쓴 것도, 배후가 광무대군이라고 소문을 낸 것도 그분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그렇지. 한위대군이야 세력이 없으니 있으나 마나 한 존재고. 그래, 이 모든 게 형님의 간계란 말이지?”

그때, 문밖의 하인이 이선의 방문을 알렸다. 광무대군이 누그러진 기색으로 자리에 앉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들라 하라.”

달지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요즘 들어 광무대군은 마음이 불안할 때마다 이선 아니, 귀인의 별을 찾았다. 마치 그녀가 자신의 불행을 모조리 가져가 주기라도 할 것처럼 맹목적으로.

그 횟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외출을 할 때도 그녀와 동행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저토록 귀인의 별을 가까이하는데 어째서 일이 이리 꼬이는 것일까.

“흠.”

달지의 잇새로 찜찜한 침음이 흘러나왔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방으로 들어온 이선은 엷은 미소를 띤 채 광무대군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가 어서 곁으로 오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달지는 광무대군의 옆에 앉는 이선을 보며 슬며시 눈썹을 찌푸렸다. 석연찮은 기분이 자꾸만 그의 신경을 갉작거렸다.

언제부터였더라, 기억을 더듬던 달지가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문효대군이 죽은 뒤부터 일이 조금씩 꼬이기 시작하였지. 귀인의 별이 약해진 건가?

“아니야.”

달지가 자문자답을 하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에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귀인의 별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달지의 의문이 깊어가던 바로 그 순간. 

“?”

문밖에서 허둥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시선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하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문을 넘어왔다.

“주, 주, 주인님! 소, 소, 손님께서……!”

광무대군이 낯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허둥지둥거리는 하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가 낮게 혀를 찼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왔다.

“아니!”

다음 순간, 손님의 정체를 확인한 광무대군이 두 눈을 부릅떴다. 

“…….”

이선은 화사한 옥안의 사내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와 광무대군을 번갈아 보던 그녀가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선이 그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한 번도 본 적은 없는 인물이었지만, 그가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아니나 다를까, 입을 쩍 벌린 광무대군이 뒤늦게 “태자 전하께서 여긴 어떻게……?” 하며 망연한 물음을 던졌다.

일순, 그의 얼굴에 미심쩍은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불현듯, 태자의 발아래에 엎드려 곡하던 국대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문효대군을 죽인 자의 정체를 밝혀 달라며, 만인이 보는 앞에서 저를 고변했다.

혹, 나를 떠보기 위해 오셨나?

광무대군의 날카로운 경계심 속에서 태자는 평온하게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호위무사 두 명이 그의 뒤를 따랐다.

칼을 찬 무사를 방 안까지 대동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지만, 태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힐긋, 태자의 호위무사를 곁눈질한 광무대군이 긴장한 기색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자리에서 비켜서자, 태자가 상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 놀랄 것 없다. 오랜만에 미복 잠행을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마침 근처를 지나게 되어 들른 것뿐이다. 황제가 되면 이제 저자 구경도 못 하지 싶어서 말이다. 너무 철이 없는 행동인가?”

황제.

그 말에 광무대군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그러나 그는 노련하게 표정을 숨기고 “아닙니다. 참으로 잘 오셨습니다, 태자 전하.”하고 웃음을 머금었다.

태자의 시선이 살짝 방향을 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선에게 머물렀다.

그 의미를 깨달은 광무대군이 그녀를 소개했다.

“제 부인입니다.”

“그런가?”

“태자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선이 공손하게 예를 갖추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선이 의아한 표정으로 살며시 눈을 들었다. 

그 순간, 태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선은 일순,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의 안광에 매료되었다. 사내다운 강인한 얼굴과 눈빛, 그리고 자신감으로 가득한 태도까지.

그는 마치 군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과연 광무대군이 저 사람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두 사람은 물러가 있게.”

태자와 이선을 번갈아 보던 광무대군이 탐탁지 않은 기색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예.”

이선과 달지가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인 후 차례로 방을 나섰다. 

광무대군은 이선의 뒷모습에 따라붙는 태자의 시선을 느끼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가 탐탁지 않은 기색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귀인의 별을 형님께 넘겨줄 순 없지.

***

“뭐?”

익제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한 가령을 쳐다보았다. 한 가령이 민망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다시 한번 말해 보게. 그 땡중이 뭐라 했다고?”

한순간에 정효 스님이 고승에서 땡중으로 전락했다. 한 가령은 그를 향해 마음속으로 사죄의 말을 중얼거리며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라…….”

“하.”

익제가 실소를 흘렸다. 그는 마치 그곳에 정효 스님이 있는 양 서슬 퍼런 눈으로 허공을 쏘아보았다. 어금니를 꽉 깨문 그가 입술만 달싹였다. 

그 사이로 선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나보고 직접 오라 이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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