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개의 별이 뜨는 밤 (85)화 (85/131)
  • 16643788761962.jpg

    85

    도라지 정과?

    “주군, 접니다.”

    문밖에서 한 가령이 목소리를 높였다. 익제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들라는 그의 명에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카랑카랑한 인상의 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 가령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인가.”

    익제가 들고 있던 서신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한 가령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한숨 같은 말을 토해냈다.

    “효성대군께서 돌아가셨다는 전갈이 방금 당도하였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익제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한 가령을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한 가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 급체로 인해 의원이 손쓸 새도 없이 세상을 뜨셨답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허공을 노려보던 익제가 입술을 달싹였다. 낮고 침착한 목소리가 방안을 가로질렀다.

    “독살인가?”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익제의 물음에 한 가령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축 처진 눈꺼풀 아래에 숨겨진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배후는?”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재명궁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합니다. 거기까지 신경 쓸 사람이 없을 겁니다. 문효대군께서 세상을 뜨신 지도 얼마 되지 않았잖습니까.”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군.”

    익제가 서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손가락으로 서탁을 톡톡 두드리던 그가 무심한 눈으로 한 가령을 응시했다.

    “광무대군인가, 아니면 인애대군?”

    “그 두 분 중 한 분일 겁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굳이 효성대군을 독살할 연유가 없으시고, 일곱째 황자이신 한위대군께서는 성격이 유약하지 않습니까? 짐작컨대, 그분은 황자의 난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하실 겁니다. 그럼 남은 것은 인애대군과 광무대군밖에 없습니다.”

    “그렇겠지.”

    그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그 뒤에 숨겨진 진실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다.

    효성대군의 사망은 익제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물밑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빠르고 급하게.

    “들리는 얘기로는 어제 광무대군이 효성대군을 찾아가 담소를 나누었다더군요.”

    “그 작자가?”

    익제가 어딘가 석연치 않은 얼굴로 되물었다. 두 눈을 가늘게 뜬 그가 반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를 만난 이튿날, 효성대군이 사망한다면 의심의 눈초리가 자신을 향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광무대군이 그리 녹록할 리는 없을 텐데.” 

    “주군.”

    한 가령이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익제가 스윽, 하고 눈동자만 들어 그를 보았다.

    “원진을 불러들이시지요.”

    “원진을?”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주군이라고 하여 안전할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실력 있는 세 명의 호위 중 효명은 주군을 배신하였고, 도영은 부인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원진을 불러들이시는 게 옳은 줄로 압니다.”

    “자네는 혹 내가 어떻게 될까 걱정인가?”

    한 가령은 물가에 내놓은 어린 손자를 보듯 익제를 응시했다. 그의 쭈글쭈글한 눈매가 수심에 젖었다. 

    그 모습에 익제가 피식하는 웃음을 흘렸다.

    “내가 그리 어수룩하게 보이나?”

    “유비무환이라고 하였습니다.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는 늦습니다.”

    “되었다.”

    더 이상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는 듯 익제가 성가신 표정으로 한 손을 휙휙 내저었다. 그의 잇새로 따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다고 풍주를 비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곳에 원진이 없다면, 각지에서 모인 인애대군의 군사들이 와해 될 것은 자명한 일이야. 언젠가는 나를 위해 움직여야 할 이들이다. 이 시점에서 원진을 불러들일 수는 없어.”

    “허나, 그보다.”

    한 가령이 무어라 반박하려 했지만 익제는 들을 마음이 쥐똥만큼도 없었다. 그가 한 가령의 뒷말을 싹둑 잘랐다.

    “되었다. 그보다 광무대군의 동정을 살피라고 전해. 효성대군 독살의 배경에 그가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예.”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인 한 가령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건 그렇고, 그 고승은 어찌 되었나?”

    “열흘 후면 도성에 당도할 것입니다.”

    “쯧.”

    익제가 낮게 혀를 찼다. 빠르게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더 서두르지 않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부인은?” 하고 물었다. 

    “도라지 정과를 만들고 계십니다.”

    “도라지 정과?”

    가던 걸음을 멈춘 익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한 가령을 돌아보았다. 한 가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후원에 심었던 도라지를 수확해 정과를 만들고 계십니다. 주군께 드린다고 열심입니다만, 도라지가 제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습니다.”

    마지막 말은 괜한 심술이었다. 하지만 익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가 입이 귀에 걸린 채로 걸음을 재촉했다.

    “나를 위해 도라지 정과를 만들고 있단 말이지? 어디, 부인의 음식 솜씨를 좀 볼까?”

    익제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리 좋으실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불퉁하게 바라보던 한 가령의 입매에 결국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가 창문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텅 빈 방 안에 그의 근심 섞인 목소리가 떨어졌다.

    “폭풍이 이곳까지 휩쓸지는 않아야 할 터인데.”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

    “이런 일을 굳이 군대부인의 손으로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하녀들이 있는 것을요.”

    “이건 내 손으로 해 드리고 싶어서 그러네. 사연이 많은 도라지거든.”

    화영의 퉁명스러운 핀잔에 채선이 조용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조청에 졸인 도라지를 식히고 말려 콩고물을 입힌 그녀가 드디어 “끝났네.” 하며 허리를 폈다. 

    사람은 간사한 동물이라 한동안 몸이 편해졌다고 고작 이 정도 일에도 허리가 아팠다.

    송하가 화영을 흘겨보며 샐쭉하니 덧붙였다. 모르면 끼어들지 말라는 듯.

    “이 도라지는 부인께서 직접 키우신 것이어요. 주인님을 위해서 말이지요. 그러니 도라지가 주인님과 부인을 이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 이 도라지가?”

    화영이 미심쩍은 눈으로 갈색빛이 도는 도라지를 쳐다보았다. 이깟 도라지가 은원군과 군대부인을 이어줬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역시 도성은 나랑 안 맞는 건가?”

    화영이 자그맣게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였다. 채선이 그녀를 돌아보며 “그런데.” 하고 입을 열었다.

    “요즘 저자에 자주 나가던데……?”

    화영이 뜨끔한 얼굴을 했다. 괜히 손바닥을 치마에 문지르며 딴청을 피우던 그녀가 뚱하게 대꾸했다.

    “책방에 갑니다.”

    “책방? 아아, 그러고 보니 어제도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돌아왔었지.”

    고개를 주억거리던 채선이 시무룩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자네는 공부를 좋아하는가 보군. 그게…… 재밌는가?”

    그녀가 풀 죽은 눈으로 화영을 쳐다보았다. 제 발 저린 도둑이 뜨끔한 얼굴로 큰소리를 쳤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저는 책도 읽지 않는 줄 아셨습니까? 정말로 그냥 책을 구경하러 가는 것뿐입니다!”

    “아닐세. 그냥 나와 달리 책 읽는 걸 좋아하는구나, 하고 감탄했을 뿐이네. 대단하다고 말이야.”

    “…….”

    채선의 당혹스러운 얼굴을 보고서야 화영은 자신이 과민하게 반응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난처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무는 순간, 등 뒤에서 웃음기를 머금은 서늘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풍주에서 보낸 하인이 사흘 내로 도착한다던데, 그 사이 길바닥에 나앉고 싶지 않으면 입조심을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외숙부의 얼굴을 봐서 참아줄 때 알아서 기어야지, 주제도 모르고 감히 누구에게 대드는 것이냐.”

    “!”

    난생처음 들은 모질고 험한 말에 화영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두 눈을 부릅떴다. 

    비죽, 눈물이 비어져 나올 것 같았다. 내가 왜 집을 뛰쳐나와서 이런 모욕을 당하고 있는 거지, 서러운 생각에 코끝이 찡했다.

    “익제님!”

    채선이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저도 모르게 그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익제가 더없이 다정하고 화사한 미소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가 내뱉은 말과 표정 사이의 간극에 채선이 주춤했다. 고개가 살짝 기울어지는 것을 보니 제가 무언갈 잘못 알았나, 의아해하는 기색이다.

    익제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농담이오. 화영과 나는 사촌 간이라 평소에도 이 정도 농은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다오.”

    “…….”

    화영은 이번에야말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사촌 간이라고는 하나,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익제는 도성에 적을 두었고, 저는 풍주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직접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것도 불과 얼마 전부터였다.

    그런데 가까운 사이라고? 농이라고?

    화영이 뜨악한 눈으로 익제를 바라보았다. 그가 마치 동의라도 구하는 듯 살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익제의 눈동자가 싸늘해지는가 싶은 찰나.

    “……예.”

    화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탓이다. 괜한 한기가 들었다. 머리털이 쭈뼛 서고, 등골이 오싹했다. 

    그제야 채선이 긴장한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녀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습니까? 제가 그것도 모르고 괜히…….”

    익제가 그런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나저나 나를 위해 도라지 정과를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데.”

    “예. 마침 완성된 참이에요. 하나 드셔 보시겠습니까?”

    채선이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한껏 기대에 찬 시선을 마주하고 어찌 싫다 할 것인가. 익제의 눈매가 다감한 빛을 띠었다.

    “좋소. 내가 도라지 정과를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았소?”

    “정말입니까? 다행입니다. 입맛에 맞으셔야 할 텐데요.”

    긴장된 표정의 채선이 도라지 정과 하나를 집어 그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그녀답지 않은 적극적인 행동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던 익제가 입을 벌렸다. 

    달콤 쌉싸름한 향을 내는 도라지가 입술을 가르며 들어왔다. 그 순간.

    “읏!”

    그가 실수인 척 채선의 손가락을 핥았다. 아니, 실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했다. 익제는 그녀의 손가락에 묻은 조청을 느릿하게 혀로 핥았다.

    화영과 송하, 그리고 도영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면전에서.

    …….“

    채선이 금세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손가락을 뺐다. 그녀가 힐끔, 눈동자만 돌려 세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딴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태 먹은 도라지 정과 중 가장 맛있군.”

    “……정말입니까?”

    쥐구멍을 찾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채선이 그 말에 슬쩍, 눈동자를 들었다. 익제는 기대와 설렘이 스치는 그녀의 갈색 눈동자를 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부인은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걸 보았소?”

    “아니요.”

    “그럼 내 말을 믿으시오.”

    “예.”

    그제야 채선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곁눈질로 그들을 힐긋거리던 송하가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 없는 한숨을 삼켰다.

    속지 마셔요, 부인! 그 말조차 거짓부렁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