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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84)화 (8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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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고래가 나오는
태몽이라도 꿔 봅시다.

“그것이 아침에 마구간에 들렀더니, 이 지랄…… 아니, 풍오가 간밤에 우리를 부수고 나와서는 암말들을…… 죄다…….”

하인은 끝내 뒷말을 잇지 못했다. 민망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리던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조심스레 덧붙였다.

“정신을 놓고 그 짓을 하고 있길래 억지로 떼어내 이곳으로 끌고 온 참입니다. 아마 밤새도록 암말과 놀아난 모양입니다. 오자마자 기력이 쇠한 듯 저렇게 쓰러져 숨만 쉬고 있는 걸 보면 말입죠. 말의 교미는 암컷과 수컷의 체격과 성격을 따져서 신중하게 진행해야 하는 법인데…… 풍오 때문에 올해 말 농사는 모조리 엉망이 되었습니다.” 

하인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풍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덩치 큰 흑마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그의 하소연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러다 몇 달 뒤면 암말들이 동시에 임신을 하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탈 수 있는 말이 적어지는데……. 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으니 쫓겨나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아.”

채선이 알 수 없는 탄식을 터뜨리며 풍오에게 시선을 주었다. 

풍오는 기진맥진한 얼굴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들었는지 쌕쌕, 내쉬는 숨과 오르내리는 가슴의 움직임이 규칙적이었다. 

까만 얼굴은 제법 피로해 보였다. 기분 탓인지, 늘 반드르르하게 윤기가 흐르던 털도 푸석한 것처럼 느껴졌다.

“암말들을…….”

“주인이나 말이나 똑같네요.”

송하가 도영이 아니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구시렁거렸다. 도영이 그녀를 향해 나무라는 시선을 던졌지만, 송하는 제가 틀린 말을 했느냐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채선이 하인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던졌다.

“자네가 쫓겨날 일은 없을 것이네. 걱정 말고 하던 일을 하게.”

“예, 군대부인. 감사합니다.”

하인이 한시름 덜었다는 얼굴로 머리를 조아렸다. 채선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돌렸다. 그 사이에도 풍오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문득,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가 뒤따라오는 송하에게 눈길을 주었다.

“화영은?”

“좀 전에 저자 구경을 한다며 집을 나섰습니다.”

대답은 송하가 아니라 도영에게서 돌아왔다. 채선의 눈동자가 옆에 있는 도영에게로 이동했다. 햇빛을 머금은 갈색 눈동자가 걱정으로 물들었다.

“혼자 갔는가?”

“제가 호위 두 명을 딸려 보냈습니다.”

“잘했네.”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도영에게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러나 입가에 머문 웃음은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리 다른 곳에 정신을 팔려고 해도, 어지러운 머릿속이 도무지 정리되지 않았던 탓이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처소로 걸음을 돌렸다. 두 사람을 물리고서야 채선은 오롯이 혼자가 되었다. 우두커니 앉은 그녀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묻어 두었던 기억이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며칠 전 보았던 이선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있는 듯 선명하게 그려졌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비싼 옷을 두르고 하얗게 분을 칠한 이선은 그녀가 알던 모습과는 달랐지만, 채선은 그녀가 어릴 적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 자신을 스쳐 가던 눈동자는 분명 반가움과 그리움을 품고 있었다.

“운명도 고약하지.”

채선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선은 그녀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또 한 명의 심채선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한 번 구르기 시작한 운명의 수레바퀴는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천둥벌거숭이 같던 두 처자는 더없이 고귀한 여인이 되어 마주쳤다. 아름다운 비단옷을 걸치고 화려한 머리꽂이를 하고서.

채선이 무심코 가슴을 더듬었다. 딱딱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은으로 만든 노리개다.

엄마의 유품.

그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게 맞을까, 채선의 생각이 깊어지는 순간.

“무슨 생각을 그리하길래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시오?”

“!”

불쑥, 익제의 얼굴이 눈앞에 들이 밀어졌다. 그녀의 등 뒤에 선 익제가 허리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던 것이다. 

채선이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녀오셨습니까?”

“내 생각을 하고 있었소?”

익제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짓궂은 물음을 던졌다.

“……예.”

“…….”

채선이 수줍게 시선을 떨구었다. 

그와 동시에 익제는 표정이 사라진 눈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응시했다. 

뻔뻔한 물음에 돌아온 순순한 긍정이 의심스러웠다. 그 말은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익제의 머릿속으로 방금 전, 한 가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효 스님을 찾았습니다.”

시원하게 걸음을 내딛던 그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익제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한 가령이 고개를 조아리며 낮고 빠르게 덧붙였다.

“산중에서 도를 닦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우리 측 사람들이 면벽을 끝내고 나오신 정효 스님을 찾았습니다. 사정을 말씀드리고 이곳으로 모셔오는 중입니다. 정효 스님께서 순순히 따라나서실까 걱정하였으나, 오랜만에 도성 구경이나 하자며 흔쾌히 짐을 꾸리셨답니다. 보름, 아마 보름 후면 도성에 당도하실 수 있을 겁니다.”

“보름이라, 알았다.”

익제는 그제야 멈췄던 걸음을 다시 내디뎠다. 십수 년 전에 오얏나무의 쓰임새를 알아봤던, 법력 높은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 빌어먹을 족쇄와도 같은 운명, 그것에 대한 자신의 의혹을 확신으로 바꿀 답이 필요했다.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다니, 오랜만에 같이 오수라도 즐기는 게 어떻소?”

짧은 상념을 끝낸 익제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느물거리며 말했다. 잠시 눈동자를 굴리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찰나의 시간, 익제의 눈빛이 다시 이채를 띠었지만, 그는 능숙하게 그것을 갈무리했다. 익제가 채선을 침상으로 이끌었다.

“음?”

다음 순간, 침상 앞에 선 그가 이불을 내려다보며 예상치 못한 침음을 흘렸다. 

못 보던 이불이 깔려 있었던 탓이다. 평소 이불 따위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어찌 그리 자신하느냐고 묻는다면.

“이것이 무엇이오?”

익제의 물음에 채선이 짐짓 으스대는 투로 대답했다.

“고래입니다.”

“고래?”

“같이 고래를 보러 가자는 약조를 생각하며 한 땀 한 땀 장인의 정신으로 수를 놓았습니다.”

“……솜씨가 훌륭하오.”

“부끄럽습니다.”

솜씨는 훌륭했다. 솜씨는 훌륭했는데.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고래를 수놓는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했다간 소심한 채선이 두 번 다시 바늘을 잡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익제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자, 그럼 고래가 나오는 태몽이라도 꿔 봅시다.”

“……예.”

“그 전에 아이부터 만들어야 하겠군.”

익제가 뻔뻔한 얼굴로 슬금슬금 손을 뻗었다. 채선이 “그, 해가! 밖에 송하가!”하며 입을 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녀는 익제의 고집을 이기지 못했다.

***

화영은 잔뜩 부아가 났다. 국대부인들에게 받은 면박도 자존심이 상했고, 착한 척하는 채선도 꼴 보기 싫었다. 

무엇보다 세상이 온통 채선을 중심으로만 돌아가는 것 같아 화가 났다. 하다못해 성깔 더러운 말까지 사람을 차별했다.

“고향으로 돌아갈까?”

적어도 고향에서는 화영, 그녀가 세상의 중심이었다. 딸 사랑이라면 끔찍한 부친과 공손한 하인들, 그리고 제게 목을 매는 사내.

도성에 도착하기만 하면 그녀의 삶이 완전히 뒤바뀔 거라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재색을 칭송하고, 저와 혼인하고 싶은 사내들이 대문 앞에 줄지어 늘어설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보다 잘난 구석도 하나 없는데, 당최 어디가 좋은 거지?”

화영이 두 눈을 뾰족하게 뜨고 채선의 험담을 내뱉었다. 잠깐 사이에도 감정이 널을 뛰었다. 의기소침했다가 슬퍼지고, 착잡했다가 화가 났다.

그런 그녀의 불편한 심기와 달리 도성의 저자는 활기가 넘쳤다. 물건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뒤엉켜 왁자한 소음을 만들었다.

“윽.”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화영은 뾰족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쳤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두 손 가득 짐을 들고 분주하게 걸음을 옮길 따름이었다.

하긴 그랬다.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녀의 우울한 기분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저자는 여전히 생명력이 넘쳤다.

화영은 그것이 못마땅해 눈에 띄는 아무 가게에나 들어갔다. 저 속에 서 있으면 자신의 신세가 더 처량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그러고 나서야 그곳이 책방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필이면 들어와도 책방이람, 유행하는 장신구나 구경하려고 하였는데, 라며 입술을 삐죽인 화영이 난감한 눈으로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저자 뒷골목에 위치한 책방은 좁고 어두웠다. 눈이 닿는 곳마다 책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고, 햇살이 닿는 곳에는 먼지가 둥둥 떠다녔다. 

맥이라곤 없는 젊은 서생 하나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불퉁한 얼굴로 책방을 나서려던 화영은 이내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잠깐 지나갑시다!”

“이 물건 좀 보슈, 사라고 안 할 테니 한 번 보기나 하슈.”

거리를 메운 사람들이 왁자한 소음을 뱉어냈다. 지금은 도저히 저 거센 인파에 파묻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지 않아도 괜찮으니 편히 둘러보고 가시오.”

그때, 젊은 서생이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처럼 맑고 청아한 목소리였다. 

화영이 등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서생은 자신이 할 말을 끝내곤 손에 든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곳은 바깥의 시끌벅적함과는 다른 세상인 양 고요하고 적막했다. 들리는 것이라곤 간간이 사내가 넘기는 책장 소리가 전부였다. 

게다가 서생은 장사할 마음이 없는지 손님에겐 관심도 주지 않았다.

하다 하다 이젠 책방 장사치까지 나를 무시한단 말이지?

대번에 눈이 뾰족해진 화영이 무어라 쏘아붙이려는 찰나.

“쉬고 싶은 만큼 쉬어가도 좋소. 원한다면 차도 내어드리리다.”

“윽.”

화영이 뾰족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차라니, 감히 책방 주인 주제에 누구한테 수작을 거는 것인가. 내가 누구인 줄 알고!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맥빠진 표정으로 어깨를 떨구고 말았다.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서생은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던 탓이다.

칫. 도대체 무슨 책을 저리 재밌게 읽는 거지?

눈을 흘긴 화영이 그제야 바닥에 쌓인 책들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틱틱거리며 책장을 들쑤실 때마다 먼지가 부옇게 일었다. 

화영은 콜록콜록, 밭은기침을 터뜨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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