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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83)화 (8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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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

    나를 연모해주시오.

    익제는 언젠가 한 번 스치듯이 보았던 이선의 얼굴을 떠올렸다. 채선과 닮은 구석보다는 다른 구석이 더 많던 그녀를.

    그래. 그리된 것이로군. 최근 광무대군이 어디를 가든 그 여인을 끼고 다닌다더니, 그곳에서 그녀와 마주친 것이었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조급증이 일었다. 익제는 저도 모르게 불쑥, 손을 뻗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그가 말없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천천히 움직이던 시선이 그의 손등에 꽂혔다. 그제야 자신이 채선의 손목을 움켜쥐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아.

    별안간 섬광 같은 깨달음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초조했다. 혹은, 애가 탔다. 이선을 마주친 그녀가 행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까 봐, 그리하여 자신의 곁을 떠난다고 말할까 봐, 심장이 선득하게 식었다.

    전혀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한 번 도망친 그녀가 두 번이라고 달아나지 말란 법이 있나.

    “익제님?”

    채선이 의아한 얼굴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익제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동그란 갈색 눈동자에 오롯이 그가 담겨 있었다. 

    다른 무엇도 없이, 다른 누구도 없이 온전히 그 한 사람만이 그녀의 눈동자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걸 잃고 싶지 않았다. 한 번 맛본 달콤함은 놓치기 싫을 정도로 눅진하게 그의 혀를 마비시켰다. 팔자에도 없는 다정한 남편 노릇도 귀찮지 않을 만큼.

    “나는 부인이 없으면 안 되오.”

    익제가 연약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뺨을 비볐다. 포악한 짐승이 아니라 그들의 사냥감인 양 더없이 가엽고 여리게.

    움칫, 놀라던 채선이 이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나는 부인이 없으면 안 되오.”

    같은 말만 반복하는 익제의 행동에 채선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다가 이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보드라운 손끝이 그의 속눈썹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작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여기 있을 겁니다. 익제님의 곁에요.”

    “나를 연모해주시오.”

    뜬금없는 그의 말에 채선이 난감한 듯 시선을 피했다. 익제는 끈질긴 눈으로 그녀를 쫓았다. 마치 주인의 애정을 갈구하는 개처럼 그는 맹목적이었고 저돌적이었다.

    길어지는 침묵을 견디지 못한 채선이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두 뺨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예.”

    “지금보다 더.”

    “예.”

    “내가 없으면 살 수 없을 만큼.”

    “……예.”

    채선의 대답에도 익제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그녀의 손을 꽉 붙들었다. 한 번 일기 시작한 불안은 사라지는 법 없이 그의 심장 아래로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것은 흡사 수면 아래에 가라앉은 침전물과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다가도 가벼운 손짓 한 번에 금세 뿌옇게 되살아나는 침전물.

    “부인.”

    그는 불길한 예감을 떨치려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낮고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눈동자는 그 속에 똬리를 튼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부인.”

    “……예.”

    채선이라고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의 뜨거운 시선은 이미 그녀의 옷을 한 겹씩 벗겼고, 채선은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창밖을 힐끔거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부인.”

    익제는 다정한 미소로 그녀의 난감함을 모른 척했다. 그가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끝이 채선의 입술을 문질렀다. 제가 없는 사이 달고 온 상처가 못마땅한 듯, 하염없이 느리게.

    채선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른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길은 흡사 그와의 입맞춤을 연상시켰다. 

    익제는 그녀의 입술에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았고, 마침내 그의 손가락이 채선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갔다.

    “읏!”

    찌르르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채선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힘이 빠진 상체가 털썩, 무너졌다.

    “저런.”

    익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흘리며 두 손으로 그녀를 안았다. 그의 손이 이번에는 채선의 목덜미를 훑어 내렸다. 동시에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불을 지분거렸다. 

    “익제님…….”

    채선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 순간, 익제의 몸이 달아올랐다. 아마도 그건 그녀가 원한 결과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

    그는 이제까지의 자제력은 개나 줘 버리고, 걸신들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

    채선이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듯했지만, 그 말은 익제의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켜졌다. 

    그가 채선의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두 사람 사이에 한 치의 빈틈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억세게.

    “윽.”

    짓눌린 갈비뼈에 그녀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손에서 힘을 빼는 순간, 그녀가 어디론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그는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익제가 그녀를 안아 들고 침상으로 걸어갔다. 이불에 파묻힌 뒤에야 채선이 나직하게 소리를 질렀다.

    “자, 잠깐만……!”

    “설마 기다리라고 하지는 않겠지?”

    “예? 어, 저…….”

    익제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당겼다. 그의 잇새로 뭔가를 억누르는 듯한 그르렁거림이 흘러나왔다.

    “부인 눈에는 내가 지금, 기다릴 수 있는 상태로 보이시오?”

    “…….”

    채선의 눈동자가 천천히 이동했다. 그의 얼굴과 목, 어깨, 가슴, 그리고 배.

    여유로운 표정과 달리 그의 근육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아슬아슬했다. 잔뜩 당겨진 활은 금방이라도 튕겨 나갈 것 같았다.

    “……아니요.”

    “그러니 아량 넓은 부인께서 나를 가엾이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오.”

    “은혜라니요……!”

    채선이 툭 하고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던 손을 뻗어 익제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서툰 손놀림으로 그의 옷자락을 풀어헤쳤다.

    “하하.”

    마침내 익제의 잇새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가 시선은 채선에게 둔 채 한 손을 뻗어 묶여 있는 천개의 끈을 풀었다. 하늘하늘한 천개가 풀썩, 떨어져 내리며 두 사람의 모습을 감추었다. 

    얇은 천 너머로 어른거리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뜨겁게 뒤엉켰다.

    ***

    “얼굴이 좋아 보이는군. 풍주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러웠나 보지?”

    인애대군의 농 섞인 말에 익제는 자신의 뺨을 쓸어내리며 객쩍은 미소를 흘렸다. 그가 선선한 시선을 들어 인애대군을 바라보았다.

    “그리 보이십니까? 걱정할 게 없는 삶이긴 하였습니다. 하여 이곳에서의 일이 마무리되면 모친의 곁으로 내려갈까, 생각 중입니다.”

    “그래. 자네가 저택을 짓는다는 소식은 들었네. 허나, 그것은 내 군사를 위장하기 위한 계책이 아니던가?”

    내 군사라.

    익제는 반쯤 떠보듯이 묻는 인애대군을 향해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그는 짐짓 깊은 한숨을 내쉰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제게는 도성에서의 삶이 어울리지 않는 듯싶습니다.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인애대군께서 제게 내리신 명을 수행하고 나면, 마음 편히 풍주로 내려가 부인과 한가롭게 지내고 싶습니다. 부인도 그리하길 원하고 말입니다.”

    “그런가?”

    인애대군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힐끔, 눈동자만 들었다. 

    익제는 그의 말처럼 그곳에서의 생활이 무척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쉽고 그리운 눈매가 허공을 응시했다.

    그래. 내게 위협이 될 만한 인사는 아니지.

    이 일이 끝나면 익제까지 처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인애대군이 그를 향해 가늠하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살려 둘까, 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목울대를 울렸다. 쌉싸름한 차가 식도를 타고 느릿하게 넘어갔다.

    “그건 그렇고. 그간의 일은 서신으로 보고를 받았으나 종이에 적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았을걸세.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지.”

    “예.”

    교활하고 어리석은 자 같으니라고.

    익제는 인애대군의 속내를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그러나 장기판의 말은 어수룩할수록 좋았다. 자신이 장기 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제 손으로 장기판을 주무른다고 착각하는 인애대군은 그에게 있어 더없이 완벽한 말이었다.

    익제는 옅은 미소를 띤 채 인애대군의 군사들에 대한 보고를 올렸다. 적당한 칭찬과 아부를 곁들여 그의 자만심을 어루만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여 언제든 움직일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들은 인애대군의 한마디면 이곳, 도성까지 밤낮없이 달려올 것입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익제의 말이 이어질수록 인애대군의 얼굴빛이 밝아졌다. 그는 벌써 이 땅의 황제라도 된 양 자신만만했다.

    익제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자신감 충만한 멍청이야말로 지금 그에게 꼭 필요한 장기 말이었다.

    “그건 그렇고.”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익제가 화제를 바꾸었다. 인애대군이 계속 말해 보라는 듯 호의로 가득 찬 시선을 던졌다.

    “문효대군께서는……?”

    미묘한 어조였다. 익제는 끝까지 말을 잇지 않았지만, 인애대군이 그 속뜻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불쾌한 생각이 떠오른 양 그가 대뜸 입매를 찡그렸다.

    “광무대군의 짓이겠지.”

    “그렇습니까?”

    어쩌면 인애대군의 소행이 아닐까, 추측했던 익제는 그의 표정을 보고서 의심을 완전히 거두었다. 그는 진심으로 이 상황이 달갑지 않은 듯했다.

    광무대군.

    익제는 잇속으로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번번이 발에 차이는 돌처럼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그의 이름을.

    어느 순간, 익제의 눈매가 슥 하고 가늘어졌다.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방해가 된다면 치우는 게 옳았다. 

    ***

    “아이고, 이를 어째. 이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고!”

    후원을 거닐던 채선이 하인의 울음 섞인 욕설을 듣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눈치 빠른 도영이 “알아보고 올까요?”라고 물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채선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발길을 돌렸다. 짚이는 구석이 있었던 탓이다.

    “아닐세. 내가 갈 것이네.”

    채선은 소리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송하와 도영이 그녀의 뒤를 쫓아왔다. 점점 커지는 푸념 끝에 낯익은 하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아 허탈하고 공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중이었고, 그 옆에는 지친 기색의 풍오가 누워 있었다.

    “무슨 일인가?”

    죽은 듯이 쓰러진 풍오의 모습에 채선이 깜짝 놀란 얼굴로 걸음을 서둘렀다. 평소라면 그녀의 기척에 예민하게 반응할 풍오가 누운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장이 덜컹,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채선의 다급한 시선이 하인을 향했다. 그녀를 발견한 하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뒤늦게 예를 표했다.

    “오셨습니까, 부인.”

    “풍오가 왜 이러는가?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것인가?”

    채선이 초조하게 숨을 헐떡이며 그를 다그쳤다. “그게 아니라…….”하며 뜸을 들이던 하인이 민망한 얼굴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아이참, 우리 부인 애간장이 다 닳으시겠어요. 얼른 대답하지 않고 뭘 하세요? 풍오가 왜 또 이 지랄…… 아니, 이러고 있는 거예요?”

    송하가 샐쭉하니 하인을 다그쳤다. 그제야 그가 마지못한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의 잇새로 비쩍 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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