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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82)화 (8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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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여섯 번째 부인이라.

그 순간, 방 안에는 날카로운 침묵이 흘렀다. 보연이 대번에 두 눈을 사납게 치떴고, 채선은 긴장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채선을 일별한 보연이 선우를 바라보며 신랄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제야 선우가 채선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채선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선우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그러고 보니, 은원군께서도 인애대군께서 주최한 사냥제에 참석하셨다가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돌아오셨지.”

“……예.”

채선이 고개를 숙였다. 살을 짓이겨 놓은 것 같던 흉한 상처가 눈앞에 생생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두 사람의 피부가 맞닿던 밤, 무심결에 그의 등을 끌어안던 채선은 손끝에 흉터가 걸릴 때마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날의 상처가 떠올랐던 탓이다. 벌건 속살을 드러내며 곪아가던 그 끔찍한 상처가. 행여 그를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닐까, 손가락이 절로 뻣뻣하게 굳었다. 

그럼 익제는 그녀의 속내를 짐작한 얼굴로 “괜찮소. 지금은 하나도 아프지 않소.”라고 말하며 그녀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곤 했다.

보연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황자의 난이 시작되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덟째 안명대군이야 워낙 어릴 적부터 병약하였으니 차치하고라도, 넷째 조이대군께서 낙마로 명을 달리하신 사건은 미심쩍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런데 유야무야 넘어가고 말았지요.”

“하긴. 그렇긴 하지.”

선우가 그녀의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바로 며칠 전까지 두 사람은 적이었는지도 몰랐다. 군웅할거의 시대, 어느 황자가 황권을 움켜쥘지 알 수 없는 혼란한 시기였다.

그런데 지금, 보연은 남편을 잃었다. 황자가 없는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일 말이 없었다. 하지만.

“광무대군만큼은.”

보연이 싸늘하게 뇌까리며 주먹을 틀어쥐었다. 문효대군을 잃은 그녀는 인애대군의 힘을 빌려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꿰뚫어 본 채선은 살며시 시선을 떨어뜨려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보연은 그녀의 편이나 다름없었다. 채선 역시 광무대군을 쓰러뜨려야만 했으니 두 사람의 목적이 일치했다. 

그녀를 믿어도 될까?

“증거가…… 있습니까?”

채선이 숙였던 고개를 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연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이미 내 손으로 그자를 진창으로 끌어내렸을 걸세.”

“예.”

채선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광무대군은 생각보다 치밀하고 조심성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쉽사리 흔적을 남길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찌해야 하나.

채선의 생각이 깊어지려는 찰나, 문밖의 하녀가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손님?”

올 사람이 없는데, 라고 중얼거리던 보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누구시냐?” 하고 물었다.

“내 이분들과 긴한 얘기를 나누는 중이니, 중한 분이 아니라면 다른 날 오시라고 말씀을 드려라.”

“저…… 그것이…….”

그녀의 명에 방 안으로 들어온 하녀가 난처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보연이 그녀를 닦달하려는 순간.

“형수님.”

하녀의 등 뒤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누구의 제지도 없이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마치 황제처럼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그를 알아본 보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광무대군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그녀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을 향해 불편한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광무대군은 민망해하는 기색도 없이 방 한가운데에 멈춰 서며 태연한 인사를 건넸다.

“형수님의 수심이 깊으실 것 같아 위로차 들렀습니다. 그런데 먼저 오신 분들이 계셨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날 올 걸 그랬습니다.”

선우에게 살짝 눈인사를 건넨 광무대군이 채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짧은 순간, 그가 멈칫했다. 

그는 채선을 알아본 게 분명했다. 그의 눈동자에 꺼리는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

채선은 조용히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그녀에게는 익숙한 시선이었다. 

오히려 향덕원 사람들이 그녀를 애지중지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그녀를 진심으로 아껴 주었다.

그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녀가 정말로 군대부인인 양 온 마음으로 섬기는 이들과 난생처음 저를 귀하게 대해준 사내. 

그러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뒤이어 한 여인이 걸어 들어왔다. 그와 동행한 여인이니 광무대군의 정실부인일 성싶었다. 보연을 위로하러 온 선우처럼, 광무대군 부인 역시 그녀를 다독이러 왔을 것이다.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며 걸음을 옮긴 그녀는 광무대군의 옆에 도착해서야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국대부인께 인사 올립니다.”

“!”

그와 동시에 채선은 날카로운 숨을 삼켰다. 그녀는 하얗게 굳은 얼굴로 두 눈을 부릅떴다. 한계까지 벌어진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여인의 얼굴에 못 박혔다. 

채선의 입술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소리 없는 부름이 터져 나왔다.

언니…….

그녀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혹은 고요한 부름을 들은 것인지, 보연을 바라보고 있던 이선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 역시 채선을 알아보고는 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

일순, 시간이 멈춘 듯싶었다. 모든 사람이 사라지고, 채선의 눈에는 오직 이선만이 보였다. 꽉 다문 채선의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눈동자가 글썽이며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녀는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리며 이선의 품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채선의 팔다리가 움칫했다. 그 순간.

옅은 미소를 머금은 이선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다시 보연에게 시선을 준 그녀가 “상심이 크실 줄 압니다.”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 후로 이선은 채선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채선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치 누군가 그녀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친 것 같았다. 

어찌나 입술을 세게 깨물었는지 침을 삼킬 때마다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채선은 억지로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녀와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곁에는 광무대군이 있었고, 제 곁에는 익제가 있었다. 그리고 채선은 이제 막 광무대군과의 싸움을 결심한 참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이선 역시 그녀의 적이 된다는 뜻이었다. 막연한 상상에 지나지 않던 일이 선명한 형체를 갖추고 눈앞에 들이 밀어졌다.

“…….”

채선은 한층 더 세게 어금니를 다물었다. 잔뜩 힘을 준 탓인지 턱이 바르르 떨렸다. 

광무대군은 의식적으로 채선을 못 본 척했다. 그녀를 쳐다보기만 해도 불운이 옮을 것처럼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여유로운 미소를 흘린 그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날이 아닌 듯하니, 다른 날 다시 들르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보연이 강경하게 말했으나 광무대군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보연에게 가벼운 예를 표했다.

“그럼 그때까지 강녕하십시오. 가지.”

광무대군이 먼저 등을 돌렸고, 이선이 선우와 보연, 그리고 채선을 향해 고개를 숙인 뒤 그의 뒤를 따랐다. 

마지막 순간까지 채선과 이선은 고집스러우리만치 서로를 마주 보지 않았다. 탁,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채선의 어깨가 털썩하고 떨어졌다.

“저 여인이 광무대군의 여섯 번째 부인인가 보군.”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야 선우가 입술을 달싹였다. 기진맥진한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은 보연이 “여섯 번째 부인이요?” 하고 되물었다. 

선우가 닫힌 방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광무대군이 푹 빠진 여인이라고 하더군. 얼마 전부터는 어디를 가든, 저 여인을 데리고 다닌다고 하네.”

“그렇습니까?”

채선은 광무대군의 속내가 훤하게 보였다. 그는 황제가 되기 위해 이선을 아니, 귀인의 별을 곁에 두는 것이다. 

팔불출로 보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그는 절실했고, 또한 황제의 자리에 진심이었다.

“여섯 번째 부인이라.”

보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곳에 두 사람이 서 있기라도 한 양 그녀의 안광이 서늘하게 빛났다.

채선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뜨거운 숨을 삼켰다. 속이 울렁거렸다. 손끝이 차게 식었다. 자신의 손을 넉넉하게 감싸던 익제의 크고 따스한 손이 몹시 그리웠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귓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후로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

“무슨 일이 있었소?”

익제가 채선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다정하게 물었다. 채선이 옅은 미소를 흘리며 “아무 일도 없습니다.”라고 대꾸했다. 

익제는 칼날처럼 예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채선의 표정을 느릿하게 훑어내리는 눈매가 마치 뱀처럼 집요하고 끈적했다.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이 이채로 번들거렸다.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표정을 썩 잘 숨기는 편이 아니었고, 그는 표정을 퍽 잘 읽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내게 숨기는 것이 있다.

하.

그 말을 읊조리는 익제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서늘한 빛을 띠었다. 냉소를 품은 시선이 스윽, 하고 가늘어졌다. 

그는 채선에 대해 속속들이 알기를 원했다. 찰나의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하잘것없는 생각까지도 모조리.

금세 다정한 표정을 가장한 그가 곰살맞게 속살거렸다.

“국대부인이 부인의 여린 마음을 상하게 하였소?”

“아닙니다! 마음을 상하게 하다니요? 어찌나 살뜰하게 챙겨 주시는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화영이 부인을 언짢게 하였군.”

“아닙니다! 화영은 나무랄 데 없이 잘 처신하였습니다. 정말로 아무 일이 아닙니다.”

익제는 딱지가 앉은 채선의 입술을 응시했다. 제가 모르는 곳에서 난 상처. 마치 입술을 짓씹은 듯이.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감쌌다. 섬세한 엄지손가락이 느릿느릿, 그녀의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그런데도 아무 일이 없었다?

그는 도영에게서 받은 보고를 떠올렸다. 국대부인과 문제가 없었다면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광무대군.

그자가 그곳에 들렀다고 하였지?

그 빌어먹을 작자가 무슨 말로 그녀의 심기를 상하게 하였나, 물어보려던 익제는 달싹이던 입술을 그대로 다물고 말았다.

아무리 달콤한 말로 채근한다 한들, 그녀가 순순히 그것을 말해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근심을 더해 주고 싶지 않을 테고, 그러기 위해서라면 누구보다 입이 무거워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래서 도영을 그림자처럼 붙여 두었던 것인데.

익제가 내심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방 안에 들지 못했다는 그의 말에 송하를 불러오라 일렀지만, 그녀도 쫓겨나기는 매한가지였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날, 그 방 안에서 있었던 일은 그들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만약 그가 아니라면.

‘혼자는 아니었습니다. 광무대군이 그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인과 함께 방으로 들었습니다.’

‘부인이라?’

‘예.’

혹, 그 부인이라는 여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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