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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81)화 (8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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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

    빌어먹을, 그놈의 하지만.

    익제의 손등을 쓰다듬던 채선의 손길이 멎었다. 품 안의 몸이 나무막대기처럼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그가 뚱한 시선으로 그녀의 손을 쳐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고된 여행길, 부인을 무리하게 만들 수는 없어 첫날밤 이후로 손만 잡고 잤으니, 이제는 운우지락을 나눌 때가 되지 않았소?”

    “하, 하지만…….”

    빌어먹을, 그놈의 하지만.

    자신의 ‘그런데’에 채선이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르는 익제가 그녀의 ‘하지만’에 부러 퉁명스러운 티를 냈다.

    “부인께서는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하지 않았소? 벌써 그 맹세를 잊은 것이오? 아니면, 그새 나에 대한 연모의 마음이 식었소? 혼인한 지 오래된 부부들은 서로에 대한 애정이 바랜다더니, 부인도 그런 모양이오.”

    “아닙니다! 마음이 식지도, 애정이 바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반드시 익제님을 행복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광무대군과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채선의 눈동자가 깊은 결의로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그럼 최선을 다해 주기 바라오.”

    “예?”

    “설마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겠지? 오늘 밤을 기대하고 있겠소.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지 두고 볼 것이오.”

    “……예.”

    채선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그의 말을 떠올리며 난감한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귓가에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훠이, 훠이.” 

    이게 무슨 소리지?

    제법 먼 곳에서 울리는 듯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채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익제를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글쎄.”

    익제가 채선의 허벅지를 지분거리며 시침을 뗐다. 아마도 하인들이 향덕원에 있는 새들을 쫓아내는 중일 테다. 새들에게는 인정머리 없는 고약한 집으로 소문이 나겠지만 상관없었다.

    채선도 하인들의 목소리보다 익제의 손길에 온통 신경이 쏠렸다.

    “오늘은 새똥을 맞지 않았소?”

    “음…….”

    떼어내면 낼수록 더욱 진득하게 달라붙는 익제의 손길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채선이 “응?”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그란 입술 사이로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향덕원으로 돌아온 후 한 번도 새똥을 맞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소?”

    “예.”

    채선이 참으로 이상하다, 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익제가 그런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에 채선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부인의 운이 바뀌는 모양이오.”

    “그럴까요?”

    평생 불운하게 살아온 채선은 그 말을 선뜻 믿는 기색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는 듯. 

    그녀가 앞두고 있는 싸움은 평생의 운을 끌어다 써야 할 만큼 힘든 싸움일 터였다. 

    사뭇 비장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금세 목덜미를 타고 내려오는 익제의 입술에 “으으.”하며 앓는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

    “제발요. 제 평생의 소원입니다. 예?”

    화영이 채선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채선은 난감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고, 송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로 입술을 실룩거렸다. 

    “하아.”

    채선의 잇새에서 기어코 한숨이 흘러나왔다. 화영은 조금만 더 하면 그녀가 넘어오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화영의 목소리가 좀 더 애절한 빛을 띠었다.

    “군대부인. 제발 한 번만요. 다시는 이런 부탁 안 드릴게요.”

    거짓부렁입니다!

    송하가 뾰족한 눈으로 화영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채선의 옷매무새를 정돈하던 연산댁이 송하에게 엄한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무례를 나무라듯이.

    그러나 송하의 기세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연산댁이 몰라서 저러는 것이다. 화영은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 같았다.

    속아 넘어가지 마셔요, 군대부인. 며칠 전, 저자에 데려다 달라고 하면서도 평생의 소원이라며 다시는 이런 부탁 안 한다고 했던 거, 벌써 잊으셨어요? 내일이 되면 또 평생의 소원을 끌어다 쓸 거라구요.

    짧은 한숨을 내쉰 연산댁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녀는 채선의 팔에 청남색 얇은 포를 꿰어주며 염려를 덧붙였다. 마치 어린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와 같은 다정한 염려였다.

    “아직 낮 동안에는 날씨가 더우나, 높은 분들을 뵙는 자리니 포를 입으셔야겠습니다.”

    “괜찮네. 그리 불편하지 않아.”

    “군대부이이인.”

    화영이 울상을 지으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녀의 고집에 채선이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난감한 미소를 흘렸다. 그녀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세. 국대부인께는 내가 잘 말씀드리지. 사려 깊으신 분이라 싫다고는 하지 않으실 걸세.”

    “예! 그럼 얼른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문효대군의 부인께서는 상을 치르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으니, 가급적이면 수수한 차림을 하게.”

    “예!”

    화영이 건성으로 대답하며 방을 뛰쳐나갔다. 입을 삐죽거리던 송하가 채선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송하의 속내를 눈치챈 채선이 한층 더 곤란한 미소를 흘렸다.

    ***

    화영은 생각보다 얌전했다. 다소곳하게 내리깐 눈꺼풀 아래의 눈동자가 설렘과 기대로 반짝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능숙하게 감출 줄 알았다.

    오호, 그러니까 여기가 문효대군이 살던 월성궁이란 말이지? 황자의 저택이라 큰 기대를 하였건만, 우리 집과 다를 것도 없잖아? 

    화영을 힐긋거린 채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이번에는 슬쩍 눈동자만 들어 국대부인을 바라보았다. 

    남편을 잃은 보연은 상중에 보았던 때보다 한층 더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앙상한 목덜미가 안쓰러웠다. 채선은 그녀의 슬픔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만약 저라면.

    만약 세상을 떠난 것이 익제였다면.

    “…….”

    만에 하나의 가정을 떠올린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미처 막을 새도 없이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채선은 주책없이 비죽 솟아나는 눈물을 삼키려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옆에 앉은 화영이 저를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차마 고개를 들어 그녀를 향해 웃어 줄 수 없었다. 

    “얼굴이 말이 아니오.”

    평소 호탕한 성격의 선우부인이 그녀답지 않게 안쓰러운 얼굴로 혀를 찼다. 그 모습에 보연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음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두 사람은 둘 다 황자의 정실부인이었고, 국대부인의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위계가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인애대군이 문효대군의 형이라 선우 역시 보연보다 서열이 높았다.

    세 명의 부인 중 가장 서열이 낮은 채선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침묵만 꼴깍꼴깍, 삼켰다. 

    그때, 보연이 채선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장례에 참여하느라 풍주에서 급하게 올라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녹록지 않은 일정이었을 터인데, 문효대군께서 가시는 길에 함께해 주어서 고맙네. 큰 힘이 되었어.”

    “아닙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을요.”

    “허나, 몸이 고되었을 걸세.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달려왔을 것이 아닌가.”

    “몸이 고된 것이야 며칠 쉬면 낫지만, 마음이 고된 것은…….”

    채선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보연이 저리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데, 자신이 울음을 터뜨릴 수는 없었다.

    물끄러미 채선을 바라보던 그녀가 별안간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보연은 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안간힘을 써서 지은 미소인 듯, 그것은 금세라도 사라질 것처럼 아스라했다.

    “흡.”

    결국 채선이 그녀를 마주 보지 못하고 먼저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터질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부군을 잃으신 슬픔이 얼마나 크고 깊으시겠습니까? 부인께서 흘리신 눈물은 하해가 되어 바다를 이루었을 겁니다. 감히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하겠지요. 그러나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법. 문효대군의 덕은 후세에 이어질 것이니, 국대부인께서도 큰 슬픔에서 헤어 나오시길 바랍니다.”

    화영이 착잡한 표정으로 인사말을 건넸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던 말이다. 그녀는 애통한 한숨을 흘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채선보다는 매끄럽게 대응했다고 자부했다.

    “국태부인의 조카라고 하였나?”

    “예. 주화영입니다.”

    화영은 입꼬리가 비죽 솟으려는 것을 참으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국대부인의 눈에 들어서 나쁠 건 없었다. 도성에서는 여인들도 사내들처럼 권력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린다고 하였다.

    이제 시작이었다. 곧 도성에서 그녀의 이름은 유명세를 떨치게 될 것이다. 화영은 사뭇 기세등등했다.

    “그래. 고맙네. 아 참, 우리 저택은 후원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네. 가서 구경하고 오는 것은 어떤가?”

    “예?” 

    생각지도 못한 말에 화영이 얼빠진 얼굴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이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

    보연이 그런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제야 화영은 그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 그것은 무언의 축객령이었다.

    당황한 채선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럼 저와 화영은 함께 후원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두 분은 말씀 나누십시오.”라고 말했다.

    “월성궁의 후원이 아무리 아름답기로서니 도성에서 손꼽히는 향덕원의 후원보다 아름답겠는가. 자네는 굳이 구경하러 갈 것 없네.”

    “아…….”

    채선이 난감한 눈으로 화영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축객령은 오직 화영을 향한 것이었다. 화영이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변방 출신이라 나를 무시한다 이거지? 두고 보라지, 도성에서 가장 귀하고 높은 여인이 되고 말 테니까. 그때 가서 후회해도 소용없다고!

    화영은 국태부인부터 은원군, 그리고 이들까지, 어째서 하나같이 저보다 채선을 어여삐 여기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비록 변방 출신이었으나, 한때 황후의 자리까지 올랐던 국태부인의 조카였다. 어디 그뿐이던가. 어렸을 적부터 모두가 그녀의 재색을 칭송했다. 

    그녀의 아비는 화영을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꺼질세라, 애지중지했고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화영으로서는 난생처음 받아보는 냉대였다.

    도성 부인들의 시샘은 보통이 아니군.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조용히 숨을 삼킨 화영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옅은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방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에서는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소매 밑으로 고소한 웃음을 터뜨리던 송하는 이내 하녀들의 축객령까지 떨어지는 바람에 시무룩한 얼굴로 방을 나서야만 했다. 

    애초에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밖을 지키던 도영이 그녀의 삐죽거리는 표정에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그런데.”

    방 안에는 선우와 보연, 채선만이 남았다. 두 사람을 차례로 돌아보던 선우가 이윽고 보연을 향해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졌다.

    “그날, 태자 전하께 드렸던 말은 무엇인가? 이번 일에 광무대군께서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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