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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죽여라.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던 익제가 문득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한 가령을 돌아보았다.
“영락궁에서 당도한 전갈인 듯했습니다.”
“영락궁이라?”
“인애대군께서 보내신 전갈일 리는 없고, 선우부인께서 보내신 게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익제가 삐뚜름한 눈으로 한 가령을 내려다보았다. 한 가령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다,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런데 그 얘기를 왜 지금 하나?”
“예?”
“그 중요한 이야기를 왜 지금에서야 하는가 말이다.”
노련한 한 가령은 처음으로 말이 막힌 듯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였다.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일까, 한 가령의 주름진 눈이 익제를 향했다.
“명심하게, 한 가령.”
익제의 목소리가 보다 낮고 분명해졌다.
“어떤 상황에서건 부인에 대한 일이 최우선이네. 혼동하지 말게.”
“예.”
한 가령이 고개를 조아렸다.
탐탁지 않은 기색으로 혀를 찬 익제가 걸음을 서둘렀다. 한 가령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풍주에 다녀오고 난 이후, 두 사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무어라 딱 짚어 말할 수는 없지만, 둘 사이가 가까워졌다는 게 느껴졌다.
“에잉, 빼도 박도 못하게 안주인이 되셨구먼.”
끌끌 혀를 찬 한 가령이 뒤늦게 걸음을 재촉했다. 뭐, 주인께서 영악하시니 부인은 좀 착해 빠져도 괜찮겠지.
***
“점심은 맛있게 드셨소?”
팔랑팔랑 날아든 다정한 목소리에 멍하니 탁자를 내려다보고 있던 채선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수심 가득하던 그녀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예, 익제님도 식사를 하셨습니까?”
“나는 아기 새처럼 오물거리는 부인이 없어서인지, 흰 쌀밥이 모래알처럼 거칠었소.”
“아기 새…….”
채선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눈 둘 곳을 찾아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송하가 또 시작이라는 듯 한숨 섞인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푸른 하늘 위로 티끌 하나 없이 새하얀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었소?”
“영락궁의 국대부인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서신을?”
익제는 처음 듣는 말인 양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 가령에게 이미 보고를 받았음에도 능청을 떠는 모습이 꽤 의뭉스러웠다.
채선이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며칠 전 상을 당하신 월성궁의 국대부인을 찾아가려 하는데, 혹시 같이 가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익제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생각하는 기색이던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따로 영락궁에 연통을 넣어 두겠소. 고된 여정으로 몸이 좋지 않아 이번에는 함께 할 수 없다고 말이오.”
“다녀오고 싶습니다.”
채선이 그녀답지 않게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익제의 미간에 생긴 골이 조금 더 깊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그녀가 한 풀 숙어든 기세로 덧붙였다.
“다녀오고 싶습니다. 그날, 비통하게 울부짖던 국대부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제가 간다고 위로가 될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힘이 될 수 있다면 다녀오고 싶습니다.”
“부인.”
“허락해 주세요.”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온전한 진실도 아니었다. 그래서 채선은 행여 제 속내를 들킬까,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표정만 보고도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익제이니, 제 심중의 계획을 알아챌지도 몰랐다.
채선은 샛노란 치맛자락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태자의 발아래 엎드려 광무대군을 고발하던 국대부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말은 그녀가 저의 아군이라는 뜻이었다.
아비는 그녀에게 착하게 살라고 했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마음이 편하면 그것으로 족한 게 인생이라고 하였다. 그와 동시에.
“그런데 이선아, 채선아.”
“예. 아부지.”
“만약 적이 생기면 말이다.”
“적이요?”
채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선이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으며 잘난 체를 했다.
“나쁜 놈 말이야. 너는 그것도 몰라?”
“나, 나도 알아! 적은 나쁜 놈이잖아!”
어린 채선이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꿱 소리를 질렀다.
아비의 무릎을 하나씩 차지하고 앉은 이선이 웃음을 터뜨렸고, 아비가 두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채선이 질세라 아비의 목을 끌어안았다.
느릿하게 고개를 든 아비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너희를 위협할 만한 나쁜 놈이 나타나면 말이다. 그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죽여라.”
“주, 죽이라구요?”
채선이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비가 그녀의 동그란 뒤통수를 매만졌다.
“인정은 후환을 남길 뿐이라는 걸 잊지 말거라.”
“인정? 후환?”
채선이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에는 이선도 그 뜻을 알지 못하는지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총명한 눈동자가 자존심이 상한 듯 일그러졌다.
“이런. 너희들한테는 좀 이른 얘기려나?”
아버지의 멋쩍은 웃음소리를 떠올리던 채선은 살며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후환을 남겨 두어서는 안 됐다.
“부인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그녀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한 익제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대신 나도 같이 가겠소.”
그 말에 채선이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다 짧은 한숨과 함께 난감한 목소리를 뱉었다.
“부인들 뵙기가 민망합니다.”
“민망하다? 내가 부끄럽소?”
퉁명스러운 익제의 목소리에 채선이 얼른 두 손을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 ……부인들의 모임까지 따라오셨다가는 익제님께서 비웃음을 사실 겁니다.”
“비웃음을 사면 좀 어떻소? 아픈 것도 아닌데.”
“제가 싫습니다.”
오늘따라 그녀가 몹시 단호하다며 익제가 낮게 혀를 찼다. 자신의 요구가 무척 비상식적이라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익제는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 못했다.
채선은 그의 입에서 “알겠소. 조심해서 다녀오시오.”라는 대답을 듣고서야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이리 와 보시오.”
침상에 걸터앉은 익제가 자신의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그녀가 “어디……?” 하고 물으며 뒷말을 흐렸다.
목화솜처럼 포근한 미소를 머금은 익제가 다시 한번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하루 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오늘은 부인과 시간을 보내지 못했으니 잠깐 안아봅시다.”
“예? 아직 해가 중천인데…….”
채선이 환한 창밖을 흘깃거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익제가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해가 중천이면 어떻……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오? 나는 그냥 꼭 안아보자는 것인데. 생각보다 응큼하시오.”
“그, 그게 아니라!”
채선이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억울하고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그녀가 눈물을 글썽였다.
저놈의 부끄럼 많은 성격은 대관절 고쳐지질 않는구나.
속으로 그녀의 험담을 지껄인 익제가 긴 한숨과 함께 연약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잇새로 동정을 자아내는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오랫동안 집을 비웠더니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오. 금세 또 한 가령에게 끌려가 장계에 파묻힐 터인데, 그전에 잠깐 숨 좀 돌리고 싶구려.”
익제의 앓는 소리에 채선이 무심코 한 발을 뗐다. 그녀의 눈동자가 못내 가여운 빛을 띠었다.
속지 마셔요, 부인!
차마 내색은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거리던 송하는 곁으로 다가온 채선의 허리를 잡아채는 익제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걸음을 물렸다.
그녀는 방문을 닫기 직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익제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채선을 곁눈질했다. 그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문을 닫았다.
“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채선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익제의 다정한 시선이 그녀의 목덜미에 꽂혔다.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 위로 가느다란 잔머리가 몇 가닥 흘러내렸다.
어쩔까. 지금이라도 저 목덜미에 이를…….
“내일 화영 낭자와 함께 저자에 다녀와도 될까요?”
“저자?”
애먼 상상을 하고 있던 익제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매가 대번에 삐뚜름해졌다.
“화영이 도성의 저자를 구경해 보고 싶다 하여 제가 안내를 해줄까 합니다.”
그 너구리 같은 계집이.
속으로 혀를 찬 익제가 채선의 어깨에 턱을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도영과 하인들이 그녀를 수행하겠지만 익제는 그녀를 제 눈이 닿지 않는 곳에 내보낼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여차하면 달려갈 수 있는 거리, 그 이상은 안 된다.
그가 못마땅한 속내를 숨긴 채 부드러운 목소리를 꾸며냈다.
“같이 가십시다.”
“하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지 않습니까.”
채선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익제가 달콤한 미소를 건넸다.
채선이 살그머니 시선을 떨어뜨리며 두 뺨을 붉혔다.
“아무리 바빠도 사촌 여동생이 도성 구경을 하고 싶다는데, 그 정도 시간을 못 낼까. 언제 다시 올 줄 모르는 도성이 아니오.”
두 번 다시 도성에는 발도 못 붙이게 하리라, 익제가 음험한 속내를 숨기고 그렇게 속삭였다.
채선이 자그마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가슴에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
“역시 다정다감하세요.”
“말하지 않았소? 산골에서의 행동은 내 본모습이 아니라고.”
“예. 알고 있습니다. 몸이 아파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뿐이었지요.”
채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왠지 그 말이 자신을 돌려 까는 것 같았지만, 해사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자격지심이었던 모양이다.
그 너구리 같은 계집을 하루빨리 데려가라고 외숙을 닦달해야겠군.
익제가 채선을 껴안은 손에 힘을 주며 나른한 한숨을 흘렸다. 좀 전까지 곤두서 있던 신경이 무뎌지는 게 느껴졌다.
익제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그리고 킁킁, 코를 울리며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
채선이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어깨를 움츠렸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한 척 몇 번이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기를 반복했다.
산에서 자라서 그런가?
그녀는 다른 부인들처럼 향낭을 차고 다니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에게서는 온갖 풀 냄새와 나무 냄새가 났다.
그것은 어떤 향보다 더 푸근하게 익제의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이런 그녀가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살아온 게 용했다.
혼자서 저자라니. 말도 안 되지. 어떤 놈이 채어갈 줄 알고.
머뭇머뭇, 손을 든 채선이 제 배를 감싸고 있는 익제의 손등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익제의 잇새에서 만족스러운 숨이 터졌다.
“그러고 보니, 문효대군의 장례에 다녀오느라 요 며칠 부부관계가 뜸하였소. 오늘은 일찍 돌아올 터이니 준비를 하고 계시오.”
“주, 준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