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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79)화 (7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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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누가 왔다고?

익제가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아 왔다. 차갑게 식었던 손끝에 서서히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채선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속삭였다.

“금방 끝날 것이오. 조금만 참으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이상했다. 

그 한마디에 정말로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까맣게 변하던 시야가 선명함을 되찾았고, 아득해지던 발밑도 단단해졌다. 

채선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익제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황자도 아닌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러니 부인에게 관심을 가질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오. 마음 편히 먹으시오.”

“하지만.”

불쑥, 입을 연 채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익제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음?”

“아니, 저는 이 많은 사람 중 오직 익제님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아무도 익제님에게 관심이 없는 게 아니에요.”

“하하, 그렇군.”

익제의 눈매가 누그러졌다. 문효대군이 죽든 말든,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아니, 제 손을 더럽히기 전에 나가떨어졌으니 춤을 추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의 장례 또한 익제에겐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그저 황족이라는 족쇄 탓에 얼굴을 내밀어야만 하는 성가신 자리일 뿐이었다.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다음 황위를 이을 태자, 혹은 태자의 자리를 위협할 황자.

그중 익제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한미한 황족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할 정신 나간 자는 없었다. 

그런데.

“그렇군. 부인이 있었군.”

익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상여를 지켜보았다.

누구도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오직 한 사람만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면 되었다.

그 한 사람이면, 세상을 가진 듯 충분했다.

그때였다.

댕그랑. 댕그랑.

구슬픈 요령 소리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로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 난 곳으로 이동했다. 

상복을 입은 사내가 종을 흔들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잇새로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아이고, 어쩔거나. 어쩔거나. 날 버리고 어데를 가오. 나하고 같이 가세.”

상여꾼의 탁한 목소리는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 엄숙한 분위기 속으로 혼백을 담은 가마와 시신이 담긴 상여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상여는 문효대군의 위세를 보여주듯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금과 비단으로 치장한 상여가 채선의 앞을 느릿하게 지나가던 찰나.

“태자 전하!”

어디선가 하늘을 찢을 듯한 비명이 울렸다.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젊은 사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한 여인이 보였다. 

채선의 시선이 의아한 빛을 띠었다. 

“문효대군의 부인이오.”

“아, 저분이……. 국대부인이시군요.”

황제의 부인은 황후였고, 태자의 부인은 태자비인 것과 같이 황자의 정실부인은 국대부인이라고 불렀다. 그보다 높은 이가 국태부인이었고, 그보다 낮은 이가 군대부인이었다.

한 가령에게 꾸지람을 들어가며 외운 부인들의 위계가 채선의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맴돌았다.

그러다 다음 순간, 채선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우아하고 아름다웠을 여인은 며칠 새 수척해져 있었다. 

파리한 안색조차 그녀의 미모를 모두 가리진 못했지만, 국대부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휘청했다.

채선의 시선이 이번에는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젊은 남자에게로 향했다.

수수한 흰색 비단옷으로도 숨겨지지 않는 고귀함이 그를 뒤덮고 있었다. 황금빛 실로 수놓은 흉배가 흰색 비단 위에서 유독 눈부시게 빛났다.

“태자 전하요.”

“예.”

그렇지 않을까 했다.

태자는 은은한 눈으로 국대부인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그녀를 만류하러 뛰쳐나왔지만, 태자가 한 손을 들어 그를 물렸다. 

여인의 서럽고 비통한 목소리가 그곳을 가득 채웠다.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 주십시오!”

사방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적요했다. 누구도 숨을 크게 쉬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이들의 시선은 온통 두 사람에게 꽂혀 있었다.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 달라?”

태자가 나직한 음성으로 그녀의 말을 되뇌었다. 국대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푸른 하늘을 뒤흔들었다.

“문효대군께서는 광무대군이 주최한 사냥제에서 정체불명의 화살을 맞으시고, 몇 날 며칠 사경을 헤매다, 고통 속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의원이 말하길, 화살촉에 맹독이 발라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읍소했다.

“누가 사냥감을 잡기 위해 독화살을 사용합니까? 저는 이제까지 그런 말을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부디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 이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이대로면, 문효대군께서도 저승의 문턱을 넘지 못하실 겁니다!”

갑자기 등장한 자신의 이름에 광무대군이 불편한 얼굴을 했다. 여기서 가만히 있었다가는 어떤 뒷말이 나돌지 몰랐다.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했다.

“형수님.”

광무대군이 굳은 표정을 풀고,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착잡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주최한 사냥대회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점에 대해서는 저 역시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도 형님을 그 지경으로 만든 범인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녀가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눈초리가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오! 이것이 광무대군의 소행인 걸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형수님의 마음이 어지러운 것은 아나, 방금 하신 말씀은 도무지 간과할 수 없는 발언이로군요.”

광무대군의 목소리가 서늘한 빛을 띤 순간, 태자가 허리를 굽혀 국대부인을 일으켜 세웠다.

“철저히 조사하라 이르겠으니, 이만 들어가시오. 부인을 모셔라.”

뒷말은 하인을 향한 것이었다. 그제야 그녀의 하녀가 슬금슬금 걸어 나와 국대부인을 부축했다.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태자가 광무대군에게로 인자한 시선을 돌렸다.

“네가 이해하여라.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마음이 어떻겠느냐.”

“……예, 태자 전하.”

광무대군이 마지못한 듯 자리로 돌아왔다. 태자가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멈췄던 장례가 다시 시작되었다.

채선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녀와 손을 잡고 있던 익제의 시선이 힐긋, 채선을 향했다.

그녀는 황자들의 면면을 훑었다. 느리게 움직이던 눈동자는 광무대군의 얼굴 위에서 흠칫, 멈추었다. 

“…….”

그가 익제를 해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익제는 자신이 지킬 것이다. 그녀의 눈동자가 결연한 빛을 품었다.

***

“누가 왔다고?”

채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송하를 바라보았다. 송하가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을 미루는데, 대뜸 방문이 열렸다. 

추레한 차림의 여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군대부인.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난데없는 인물의 등장에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여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화영…….”

채선은 화사하게 웃고 있는 화영을 보며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보따리를 품에 안은 그녀의 행색이 몹시 남루했던 탓이다.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얼굴에도 먼지와 검댕이 묻어 있었다.

“아니, 여긴 어떻게…….”

“군대부인께서 언제든 놀러 오라고 하셨잖아요?”

당황한 채선의 표정을 보며 화영이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눈은 덤이었다.

“설마, 진심이 아니셨습니까?”

“진심이 맞긴 한데, 어찌 기별도 없이…….”

“군대부인이 보고 싶어서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송하가 두 눈을 뾰족하게 뜨며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이 술술.”이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도 천지 분간을 할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어 화영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화영의 뒤를 힐긋거리던 채선이 두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하인들은 어찌하고?”

“혼자 왔습니다.”

“혼자?”

채선의 표정이 점점 더 당혹스러운 빛을 띠었다. 화영이 새초롬하게 눈을 흘겼다.

“혼인도 하지 않은 여인이 어찌 그 먼 길을 가느냐며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와 오라버니까지 나서서 반대하시기에 몰래 나왔습니다.”

“아니, 그건 야반도주…….”

“폐가 안 되면 목욕을 좀 해도 괜찮을까요? 몇 날 며칠 씻지를 못했더니 까마귀가 친구를 하자고 달려들 것 같습니다.”

“그러게. 송하야, 준비를 좀 해주렴.”

“예.”

마뜩잖은 얼굴로 대답한 송하가 “따라오십시오.”라며 방을 나섰다. 화영이 반짝이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드디어 도성에 왔어.”

환희에 찬 그녀의 목소리가 채선의 발치에 떨어졌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채선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화영이 사라진 방문만 망연하게 쳐다보았다.

***

“고승은 찾았나?”

익제의 물음에 한 가령이 면목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과 눈썹, 수염까지 서리가 내린 듯 하얗게 센 그는 아직도 아픈 곳 하나 없이 정정했다.

그의 잇새로 노쇠하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워낙 이곳저곳 정처 없이 떠도는 승려라……. 소문을 듣고 찾아가면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난 뒤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행적이 뚝 끊겼습니다.”

“그래서 매번 허탕을 쳤다, 이거로군.”

익제의 입가에 냉소가 걸렸다. 한 가령이 차마 그를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구었다. 꽤나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외숙은 뭐라 시나?”

눈 깜짝할 새에 화제가 바뀌었지만 한 가령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능숙하게 대처했다. 기다렸다는 듯, 매끄러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조만간 사람을 보내겠다고 합니다. 원진의 서신에 의하면, 철부지 여식 때문에 주대엽 어른이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다고 하니, 곧 사람이 도착하지 않겠습니까.”

“그 너구리 같은 계집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뒤끝이 긴 익제가 낮게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채선에게 범한 화영의 무례를 잊어줄 마음이 없었다. 눈살을 찌푸리던 그가 툭, 하고 물음을 던졌다.

“부인은?”

익제는 한 가령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방을 가로질렀다. 한 가령이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동작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방에 계십니다. 제가 이곳으로 올 때, 부인 앞으로 전갈이 당도한 듯싶었습니다.”

“전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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