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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78)화 (7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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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

    제 발로 가겠습니다.

    “문효대군께서 오늘 새벽에…….”

    그는 미처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방 안에 있는 이들 중 그 뒷말을 짐작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광무대군이 힐긋, 눈동자를 들어 심관을 쳐다보았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심관이 그의 시선을 느낀 듯 무표정한 얼굴을 들었다. 눈이 마주친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드디어…….”

    이제 남은 것은 네 사람. 태자와 인애대군, 효성대군, 한위대군만 제거하면 황제의 자리는 그의 것이었다. 

    나직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광무대군은 하인의 의아한 시선을 눈치채곤 금세 수심에 젖은 표정을 꾸며냈다. 그리고 충격을 받은 듯 두 눈을 홉떴다.

    “형님께서!”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경황이 없는 양 그 자리에서 우왕좌왕하던 광무대군이 이내 방을 뛰쳐나갔다.

    “내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서, 어서 형님께! 여봐라, 말을 준비하라!”

    “예.”

    심관이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홀로 남은 달지가 별 하나 뜨지 않은 대낮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빙긋, 입꼬리를 당겼다.

    ***

    “해가 저물었군.”

    국태부인의 말에 채선이 창밖을 힐끔거리며 “예.”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긴 계절이다. 그 계절에 어둠이 내렸다. 아마도 제법 늦은 시각이리라. 채선은 그 사실을 모른 척 들고 있는 바늘을 재게 움직였다.

    “아직 자수를 완성하려면 한참이나 남았습니다.”

    국태부인은 채선이 놓고 있는 수를 바라보았다. 자수는 시, 서, 화와 마찬가지로 귀한 여인들의 기본 소양 중 하나였다. 

    대개는 모란과 작약 같은 화려한 꽃, 혹은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그것도 아니면 용맹한 범 같은 것들이 주제가 되곤 했다.

    “?”

    국태부인의 눈동자가 점점 더 의아한 빛을 띠었다. 형체를 갖추어 가는 그것은 그녀가 알고 있는 어떤 모양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동그랗고 커다란 본새는 언뜻 바위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투박한 배 같기도 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채선이 짐짓 으스대듯 말했다.

    “그래도 악기나 춤보다는 실력이 낫지요?”

    “그렇긴 하네만.”

    국태부인이 채선에게 무슨 수를 놓고 있느냐고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익제가 인기척을 내며 방으로 들어왔다. 흠칫, 놀란 채선이 바늘로 제 손가락을 찔렀다.

    “아얏!”

    “쯧.”

    낮게 혀를 찬 익제가 얼른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뒤를 이어 송하가 “괜찮으셔요, 부인?”하고 물으며 달려왔다. 그녀가 소매에서 깨끗한 천을 꺼내 채선의 손가락을 꾹 눌렀다. 전광석화와 같은 동작이었다.

    딱 한 방울, 그녀의 손가락 끝에 붉은 피가 맺혔다. 그것만으로도 송하는 하늘이 무너진 듯 걱정을 했고, 익제는 아끼는 보석에 흠집이 난 양 안달복달했다.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피를 닦은 후, 채선의 손가락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던 송하가 뒤로 물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제의 염려 섞인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별것 아닙니다.”

    채선이 슬그머니 등 뒤로 손을 감추며 말했다. 그제야 익제가 찌푸려진 눈매를 풀었다. 

    “해가 진 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곳에 있소?”

    움찔, 채선의 어깨가 떨렸다. 그녀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개미가 기어가는 것보다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국태부인과 고부의 정을…….”

    “부인.”

    “……예.”

    익제가 더없이 달콤한 목소리로 채선을 불렀다. 그런데 어쩐지 서늘한 기척이 느껴졌다. 채선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제 발로 걸어서 돌아가시겠소, 아니면 내가 들쳐 업고 가는 편이 낫겠소?”

    채선이 도움을 청하는 눈으로 국태부인을 쳐다보았다. 운우지정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더 부끄러운 일이었다. 

    뜨거운 열락과 난생처음 맛보는 쾌감에 몸부림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알 수 없는 눈으로 저를 빤히 쳐다보는 익제와 마주쳤다.

    그는 평소의 다정하고 온화한 익제가 아니었다. 산골에서 만난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본연에 가까운 모습.

    평생에 한 번도 쥐구멍을 찾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데 이런 일을 매일같이 해야 한다니.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제 발로 가겠습니다.”

    하지만 익제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들쳐 업고서라도 갈 기세였다. 채선이 울상을 지으며 미적미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안히 주무십시오.”

    그녀가 국태부인을 향해 공손한 인사를 건넸다. 국태부인은 익제에게 질질 끌려가는 채선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네.”

    그녀의 혼잣말이 방안을 떠돌다 사라졌다. 그러나 안타까운 목소리와 달리 국태부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

    “또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채선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국태부인 역시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씁쓸한 미소로 그녀를 배웅했다.

    “조심해서 가시게.”

    “조금 더 머물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문효대군께서 명을 달리하셨다는데, 여기서 미적거릴 수야 있나. 그나저나 상중에 도성까지 도착하려면 고된 여정이 될 터인데.”

    국태부인의 걱정스러운 말에 채선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체력만큼은 정말로 자신 있습니다!”하고 큰소리를 뻥뻥 쳤다. 

    국태부인이 시선을 돌려 익제를 바라보았다. 

    채선을 두고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혹은 익제가 먼저 선발대로 출발하고 채선은 후발대로 느긋하게 출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듯이.

    그는 그녀의 뜻을 눈치챘을 텐데도 모르는 척 인자한 웃음만 흘렸다. 그 역시 도성으로 가는 여정이 혹독하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채선과 따로 떨어져서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내가 없는 곳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느니 무정한 남편이 되는 게 차라리 나았다. 국태부인이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그녀가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채선은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화영에게 시선을 주었다.

    “덕분에 즐거웠네. 머지않아 또 볼 수 있을 걸세.”

    “저도 도성에 가고 싶습니다.”

    화영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 말에 두 눈을 살짝 크게 뜬 채선이 이내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언제든 놀러 오게. 기다리고 있겠네.” 

    “정말입니까?”

    화영이 대번에 반색하며 되물었다. “물론이지.”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채선을 익제가 재촉했다. 

    “출발합시다.”

    “예.”

    갑작스러운 출발이었지만 하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각자의 봇짐을 어깨에 메고 죽 늘어서 있었다.

    “음?”

    채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익제의 그림자 같은 원진이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왜 그러시오?”

    “은원군을 호위하는…….”

    “아아, 그는 이곳에 남아 저택의 공사를 지켜볼 것이오. 믿을 수 있는 이 하나 정도는 남겨 두어야 공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겠소?”

    “아아,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아 은원군의 사려 깊은 결정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채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국태부인을 돌아보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작별 인사를 다시 한번 더 했다.

    “그럼 정말로 가 보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시게.”

    풍오가 얼른 제 등 뒤에 타라는 듯 주둥이로 채선의 어깨를 문질렀다. 행여 그녀가 다른 말에 오를까 조급한 기색이었다. 

    흥흥, 거칠게 내뿜는 콧김과 부리부리한 눈동자가 옆에 있는 말들을 경계했다. 특히, 유순한 성격의 천설을 쏘아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채선이 그런 풍오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나중에, 마을에서 벗어나면.”

    히잉.

    풍오의 불만스러운 울음을 뒤로 하고 채선은 얌전히 가마에 올랐다. 행렬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익제가 선두에서 말을 몰았고, 끝도 없이 이어진 하인들이 저마다 걸음을 재촉했다. 

    선두가 모퉁이 너머로 사라진 뒤에도 후미에 있는 하인들은 저택에서 출발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많은 인원이었다. 

    저택을 나선 가마는 곧장 마을을 가로질렀다.

    구름떼처럼 몰려든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빼고 은원군의 행차를 구경했다. 누군가는 아쉬움에 한숨을 흘렸고, 누군가는 장관에 탄성을 터뜨렸다. 

    익제는 위풍당당하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서 그들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깊은 산중에 접어들고 나서야 채선은 가마에서 홀랑 내려섰다. 그녀를 태운 풍오가 신이 난 기색으로 산을 올랐다.

    흥.

    고개를 빳빳이 쳐든 풍오가 기세등등하게 행렬을 이끌었다.

    채선은 익제의 두 팔에 갇힌 채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산 아래로 끝도 없이 넓게 펼쳐진 바다가 보였다. 호수인 양 잔잔한 바다는 햇빛을 머금고서 보석처럼 찬란하게 반짝였다.

    “어?”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러시오?”

    “저기 무지개가 떴어요. 고래가 있는 걸까요?”

    익제가 채선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말대로 희미한 무지개가 바다 한가운데에 걸려 있었다. 

    언뜻 무언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너무 멀어서 육안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글쎄.”

    익제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한숨 같은 말을 흘렸다. 채선은 너른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푸른 바다가 그보다 푸르른 나뭇잎 사이로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그녀는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

    머리 위로 우거진 무성한 잎사귀가 뙤약볕을 막아주었다. 바람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다. 바람결이 며칠 전보다 한결 선선해졌다.

    “다시 또 옵시다.”

    “예.”

    익제가 그녀의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였고, 채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등 뒤로 바다가 저물었다.

    ***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평소라면 각양각색의 비단으로 치장을 할 고귀한 이들이 수수한 백의를 입고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사방의 공기는 무겁고 적요했다.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고 경박스럽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어디선가 애통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치 간장이 끊어질 듯 서러운 울음이었다.

    그 속에서 채선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할 정도로 긴장했다. 문효대군의 장례 행렬은 황족과 고관대작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지?

    도성을 떠나 있는 동안 잊고 있었던 두려움이 그녀의 심장을 까맣게 물들였다.

    채선은 태부의 조카가 아니었고, 보잘것없는 산골 처자에 불과했다. 지금이라도 누군가 큰소리를 치며 그녀의 정체를 까발릴 것 같았다.

    그녀는 조금 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모든 사람이 저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눈앞이 핑글핑글 돌고, 발밑이 아득하게 가라앉았다. 까마득한 벼랑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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