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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77)화 (7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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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

    익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두 사람은 부부였고, 그가 그녀를 취한다 한들 손가락질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자신을 연모한다는 것쯤은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었다.

    저를 보는 달뜬 눈동자와 수줍은 미소, 제게 닿아오는 떨리는 손끝까지. 그녀의 마음은 이미 차고 넘쳐 밖으로 줄줄 새어 나왔다.

    그래서였다.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 것은 그 모든 것이 거두어질까, 두려워서였다.

    두렵다?

    “하.”

    익제가 실소를 흘렸다. 그의 삶은 늘 죽음과 맞닿아 있었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목 끝에 칼이 드리워지는 냉혹한 세계였다.

    그런 그가 두렵다, 라.

    고작 그녀의 호의가 거두어지는 것뿐인데. 그것이 무어라고.

    “그래, 그렇군.” 

    짐승처럼 이지를 잃고 번들거리던 그의 안광이 서서히 이성을 되찾았다. 마침내 그녀가 자신의 곁으로 걸어왔다. 스스로의 의지로 제 품에 뛰어들었다. 

    남은 것은 두 팔로 그녀를 단단히 움켜쥐는 것뿐이었다. 두 번 다시 도망가지 못하도록.

    때론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며, 때론 연약한 시늉을 하며, 또 때론 그녀의 동정심을 자극하며. 

    영악한 그에게 있어 순진하고 착해 빠진 그녀를 수중에 묶어두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익제가 가만히 그녀의 뺨을 문질렀다. 보드라웠다. 그리고 따스했다. 희미한 열기를 품은 뺨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천천히 눈동자를 들어 익제를 마주 보았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다만.”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채선이 시무룩하게 입매를 구부렸다. 익제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 개 같은 운명.

    분명 그것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늘 자신보다 타인을 걱정하는 사람이었으니 틀림없었다.

    험한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꾹 눌러 참으며 익제가 빙긋, 입꼬리를 당겼다. 

    “내가 누구라고 하였소?” 

    채선이 다시금 눈동자를 들어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동그란 갈색 눈동자가 글썽이며 그 사이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삐죽삐죽, 울음을 삼키던 붉은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대단하신 분이요.”

    “그렇소. 나는 대단한 사람이오.”

    “제가 어찌하지 못할 만큼…… 대단하신 분이요.”

    “그렇소. 나는 부인이 어찌하지 못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오.”

    “흡.”

    채선이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참았던 울음이 기어코 터지려는 모양이었다. 익제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이런.”하고 혀를 찼다.

    “첫날밤을 눈물로 시작할 것이오? 나는 부인의 눈물을 보는 취미는 없소만.”

    “아, 아닙니다.”

    채선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얼른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익제가 그녀의 둥근 코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손은 분주하게 그녀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채선이 쑥스러운 듯 가볍게 어깨를 움츠리는 사이, 그가 그녀의 허리끈을 풀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며 겉옷인 포를 벗겼다. 

    빌어먹을.

    치마와 저고리, 그 안에 입은 속치마와 속저고리. 익제는 벗겨도 벗겨도 끝없이 나오는 천 조각에 낮게 혀를 찼다. 

    그러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에 결국 실소를 흘렸다. 그녀가 도망을 가는 것도 아닌데, 조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털썩.

    기어코 채선의 몸이 무너졌다. 그녀는 더 이상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없었다. 

    익제의 입술이 그녀의 몸 곳곳을 파고들었다. 당황한 그녀가 바르작거릴 때마다 그의 입술이 조금 더 깊은 곳으로 이동했다.

    그가 선사하는 열락은 채선으로선 난생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그녀는 그와의 입맞춤보다 더 큰 쾌락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세상에 이런 자극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몰랐던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가쁜 숨을 내쉬기 바빴다. 

    온몸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것도 같았고, 몸이 흐물흐물 풀어진 것도 같았다. 끝내는 천장과 바닥이 뒤섞이며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졌다.

    문득, 알 수 없는 공포가 그녀를 덮쳤다. 더럭, 밀려드는 두려움에 저도 모르게 눈을 뜬 순간.

    “!”

    마치 다른 사람인 양 낯선 익제의 얼굴이 보였다. 시커멓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배곯은 짐승처럼 사나웠다. 머리 위에서 거친 숨소리가 흩어졌다.

    “심채선.”

    그가 잇새로 그녀의 이름을 뱉었다. 그녀를 부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처음 상에 올라온 음식을 맛보듯, 그녀의 이름을 혀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굴려 보는 것 같았다. 

    “심채선.”

    그가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반쯤 넋이 나갔던 그녀의 초점이 서서히 돌아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익제.”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달뜬 숨과 함께 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그의 이름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헐떡이는 호흡, 혹은 뜨거운 한숨이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

    익제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이름처럼 들렸다. 비로소 그가 나른한 미소를 흘렸다. 

    그는 마구잡이로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몇 번이고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때마다 채선의 몸이 튀어 올랐다.

    채선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불에 덴 듯 짙은 열상이 남았다. 

    심장은 제멋대로 날뛰다 못해 아예 멎어 버린 것 같았다.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그가 채선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심채선.”

    그 순간, 익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

    “자, 입을 벌리시오.”

    “아, 아니, 저…… 이러실 것까진…… 제가 먹겠습니다.”

    채선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힐끔, 천개 밖을 살폈다. 익제는 그녀를 재촉하는 대신 더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제 입술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숟가락을 보며 체념 어린 한숨을 흘리고 말았다.

    “가, 감사합니다.”

    착실히 인사를 한 채선이 살짝 입을 벌렸다. 익제가 어미 새처럼 숟가락을 그녀의 입안에 넣어 주었다.

    “옳지, 잘하셨소. 꼭꼭 씹어 드시오.”

    씹을 것도 없는 타락죽이었지만 채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시킨 대로 얌전히 입을 오물거렸다.

    힐긋.

    그녀가 다시 천개 밖을 살폈다. 

    방 한구석에는 송하와 하녀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듯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닐 터였다.

    으으.

    채선의 얼굴이 빨갛다 못해 검붉게 변했다. 불에 타고 남은 재처럼 시커멓게.

    익제는 아침부터 유난히 기분이 좋았다. 그것이 무엇 때문이냐고 묻는 눈치 없는 자들은 없었다. 그래서 채선은 더욱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자, 한 입 더 먹읍시다.”

    “그…… 저도 손이 있는데요.”

    채선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힐끔, 그녀가 또다시 침상 밖에 서 있는 하녀들을 곁눈질했다.

    “알고 있소. 고사리 같은 두 손이 있지.”

    “고사리 같은…….”

    채선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애꿎은 이불만 쥐어뜯었다. 얼굴이 뜨겁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일부러 이러시나, 이제는 익제의 저의가 의심될 정도였다. 

    눈동자를 굴려 쥐구멍을 찾았지만, 어디에서도 그녀의 몸을 숨겨줄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면 부끄러워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간밤의 일만 해도 눈을 마주치지 못할 만큼 수줍은데,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민망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어젯밤, 고되었을 것이오. 생전 늦잠을 자지 않던 부인이 해가 중천에 떠서야 겨우 눈을 뜨지 않았소?”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려는 모양이었다. 

    채선은 한층 더 얼굴을 들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다 입술을 두드리는 숟가락에 할 수 없이 입을 쩍 벌렸다.

    “잘했소.”

    어린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였다.

    “부인께서 얼른 기운을 차려야 오늘 밤에도 운우지정을 나누지 않겠소?”

    “오, 오늘 밤도요?”

    그 청천벽력 같은 말에 채선이 두 눈을 부릅뜨며 하얗게 얼어붙었다. 

    익제는 그의 말처럼 대단한 사람이었다. 다른 이와 비교할 기회는 없었지만, 그녀가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분명했다.

    까무룩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새카만 눈으로 저를 응시하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턱 끝에 맺힌 땀이 툭 하고 그녀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마치 달군 인두로 지진 것처럼 그곳이 몹시 뜨겁고 아팠다.

    익제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그럼 하룻밤의 운우지락으로 덜컥, 후사가 생기길 바랐소?”

    “하, 하지만…….”

    충격에 휩싸인 채선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큰 산을 하나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끝도 없는 산맥이 눈 앞에 펼쳐진 기분이었다. 

    그걸 오늘도.

    “……맙소사.”

    망연하게 중얼거린 채선이 동그란 갈색 눈동자를 들었다. 그녀의 순진한 눈망울이 익제를 향했다.

    “그러니까 이걸, 매일 한다구요? 다른 부부들도요?”

    “당연한 것을 묻는구려. 부부간의 은밀한 사생활이라 이야기를 안 한다 뿐이지, 남들도 다 매일같이 하는 일이오. 그러니 그리 부끄러워할 것 없소.”

    “매일…….”

    “자, 한 술만 더 뜹시다.”

    익제가 타락죽이 든 숟가락으로 채선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송하는 못 볼 것을 본 양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천개 너머로도 붉게 달아오른 채선의 피부가 선명하게 보였다. 

    보나 마나 울상을 짓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정말로 울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다행이었다. 익제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았고, 그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방 안에는 때아닌 춘풍이 불었다. 

    오늘 하루는 무사히 지나가겠구나, 송하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힘내셔요, 군대부인. 

    그리고 속지 마셔요. 매일이라는 말은 씨알도 안 먹힐 거짓부렁입니다!

    ***

    “은원군이 저택을 짓고 있다?”

    광무대군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심관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그의 질문에 긍정했다. 

    “하.”

    헛웃음을 흘린 그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건너편에 앉아 있는 달지를 응시했다. 눈이 마주친 달지는 생쥐 같은 앞니를 드러내며 히쭉, 입꼬리를 당겼다.

    그제야 광무대군의 만면에도 화색이 깃들었다. 

    “정말로 낙향을 할 모양이군. 그곳에 저택을 짓는다니.”

    “이제 은원군은 염두에 두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그의 별 역시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흉인의 별을 곁에 둔 은원군은 알아서 자멸할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광무대군께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이로군. 정말로 달지, 자네 말이 모두 옳았어.”

    광무대군이 반쯤 혼잣말을 읊조리며 의미심장한 눈을 했다. 달지에 대한 그의 믿음이 한층 더 견고해지는 순간이었다.

    눈치 빠른 달지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충성스러운 표정으로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마치 달콤한 권력을 맛보듯이 느릿하게. 

    그때였다.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하인이 인기척을 냈다. 방으로 들어온 그가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무슨 일이냐.”

    광무대군이 탐탁잖은 투로 물었다. 하인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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