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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76)화 (76/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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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

    그 부부의 정을……
    안아 주…….

    채선은 방금 전에 화영이 던진 말을 느리게 곱씹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예 가능성이 없는 말도 아니었다. 

    신분이 높을수록 뒤를 이을 후사에 관심이 많은 건 당연했고, 국태부인 역시 말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은근히 손주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혼인한 지 수개월이 지났는데 태기가 없다는 건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는 기다려 준다는 익제의 약조에 안주하여 군대부인으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그녀는 자신의 불운이 두려웠다. 흉인의 별은 그녀뿐 아니라 그녀의 주위에 있는 이들까지 불운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익제와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가 자신의 운명에 너무 깊숙이 엮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그까지 불행해지고 마는 건 아닐까, 채선은 그것이 못내 불안하였다. 

    그 두려움이 마지막 한 발을 내딛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도 익제와 국태부인은 한마디 재촉 없이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조급한 마음을 티 내지 않고 묵묵히 그녀를 지켜봐 주었다.

    이제야 깨달은 그 마음이 고맙고 미안하여 마치 납덩이를 맨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싫어.”

    채선은 입술을 꾹 다물며, 아주 작은 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익제가 다른 여인을 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삐죽 새어 나올 만큼 싫었다.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기도 하며, 혹은 서글픈 것 같기도 했다.

    제 안에 언제 그런 격한 감정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뜨겁고 억센 소용돌이가 마구 휘몰아쳤다. 

    “싫어.”

    채선이 다시 한번 그 말을 되뇌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크고 명확한 목소리로.

    “예?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화영이 의아한 듯 눈썹을 밀어 올렸다. 

    하지만 채선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흡사 철천지원수라도 거기 있는 양 탁자 위를 노려보던 그녀가 별안간 주먹을 움켜쥐었다.

    채선이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좌우명이 떠올랐다. 

    “매사에 채선을 다하자.”

    “예?”

    화영이 여전히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으나, 그녀는 말없이 허공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래, 이제라도 최선을 다해야 했다.

    ***

    “부인께서는 무얼 하시느냐?”

    덜 마른 익제의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문밖에 서 있는 하인을 닦달했다.

    “처소에 들어 계십니다.”

    익제는 대답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킁킁, 소매를 들어 피 냄새가 나지 않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다 안달복달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겸연쩍은 듯 나지막하게 혀를 찼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부인이군. 

    그는 뒤따라온 하인이 방문을 여는 잠깐의 틈도 기다리지 못하고 제 손으로 문을 밀었다. 그리고 따라올 것 없다는 듯 휘적휘적, 손을 내젓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조용히 문이 닫혔다.

    “부인.”

    언제 그녀의 험담을 지껄였냐는 듯, 그의 잇새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지금쯤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달려 나와야 할 채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슬쩍 눈살을 찌푸린 그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천개가 내려진 침상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부인?”

    익제가 침상으로 걸어가며 다시 한번 채선을 불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눈썹이 한층 더 삐뚜름해졌다.

    내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대관절 어디에 정신을 빼놓고 있는가. 누가 보면 부인은 심드렁한데, 나만 목을 매고 있는 줄 알겠군.

    익제가 헝클어진 심사를 감추며 하늘하늘 늘어진 천개를 걷었다. 

    “무엇을 하느라 불러도 대답이…….”

    그러나 퉁명스러운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 버렸다.

    침상 위에 앉아 있던 채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무엇에 숨이 멎었던 것일까. 

    발긋하게 달아오른 뺨 때문인가, 불그스름하게 물든 눈매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글썽이는 눈동자 때문인가.

    “무슨.”

    입술을 달싹이던 익제가 그답지 않게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멈추었다. 쇳소리처럼 높고 탁한 목소리가 튀어 나왔던 탓이다. 

    쯧, 낮게 혀를 찬 그는 목을 가다듬은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오?”

    채선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익제는 또다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꾸만 목이 말랐다. 화마가 들끓는 듯, 뜨거운 열기가 아랫배에 똬리를 틀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구렁이 같았다. 느릿하고 묵직하게 움직이는 열기가 유영을 시작했다.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채선을 응시했다. 뱃속의 구렁이가 아가리를 벌렸다.

    지금? 지금이면 괜찮을까?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며 짐짓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빌어먹을, 소리가 되지 못한 험한 욕설이 잇새에서 스러졌다.

    “부인?”

    익제는 천천히 침상에 걸터앉으며 채선을 바라보았다. 그가 한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눈물을 닦기라도 하듯.

    채선이 가만가만, 그의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흠.” 

    나직한 침음을 흘린 익제가 황급히 머릿속을 뒤졌다. 시시각각 도착한 그녀에 대한 보고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훑었지만, 딱히 짚이는 구석은 없었다.

    그 너구리 같은 계집이 또 무슨 말을 한 것인가.

    익제가 화영을 떠올리며 두 눈을 가늘게 뜰 때였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채선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싫, 습니다.”

    “…….”

    일순, 저도 모르게 익제의 시선이 서늘해졌다. 그러다 흠칫 놀란 그녀의 눈동자에 얼른 다정한 웃음을 베어 물었다.

    “싫다니, 무엇이 말이오? 설마하니 나는 아닐 테고.”

    희미하게 웃음기 묻은 목소리가 어쩐지 시퍼런 날이 선 것처럼 서늘했다. ‘그’라고 대답했다가는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날 것 같았다. 

    채선이 긴가민가한 눈으로 그를 보자, 익제가 어찌 그리 보느냐는 듯 가볍게 눈썹을 들썩였다.

    내가 잘못 보았구나.

    내심 고개를 끄덕인 채선이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소박맞기도 싫고, 다른 여인을 들이시는 것도 싫습니다.”

    “음?”

    익제가 영문 모를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채선은 이미 그가 저를 내쫓기라도 한 듯, 울먹이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

    꿀꺽, 마른침을 삼킨 그녀가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익제를 마주 보았다. 그는 여전히 생각에 잠긴 눈으로 채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니, 그 부부의 정을…… 안아 주…….”

    채선이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 달아오른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녀의 목덜미가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개졌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삼킨 뒷말이 무엇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

    그제야 어찌 된 영문인지 알겠다는 듯 익제의 눈매가 슥 하고 가늘어졌다. 

    그 너구리 같은 계집이 후사 이야기를 하고 갔다더니, 그래서 그런 것이로군.

    “무어라 하였소? 잘 들리지 않는군.”

    익제가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닦달했다. 농을 지껄일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쓰러뜨리고 싶었다. 입술을 묻고 살점을 베어 물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입에서 그 말을 듣고 싶었다. 보다 더 선명하고 명확한 목소리로.

    내가 기다린 시간이 얼마인데 그조차 하지 못하겠는가.

    “부인? 응? 방금 무어라 하였소?”

    그의 목소리가 마치 어린양을 꾀는 늑대처럼 달콤했다. 

    채선의 얼굴이 점점 더 울상을 띠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제 마음을 읽어주는 익제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며 체념의 한숨을 삼키고 말았다.

    “그…….”

    “그?”

    한참을 주저하던 채선이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그렁그렁했다. 금세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운우지정을…… 저를, 안아주세……!”

    하지만 채선의 말은 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방금까지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익제가 사나운 그르렁거림을 내뱉으며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킨 탓이었다. 

    그녀가 하려던 말은 익제의 목구멍 속으로 넘어갔다.

    소박이라고. 하, 웃기는군. 누구 좋으라고.

    파르르 떨리는 채선의 속눈썹을 보며, 익제가 싸늘한 냉소를 흘렸다. 그는 채선을 놓아 줄 생각이 없었다. 그것이 그와 그녀의 차이였다.

    그는 채선이 자신의 곁에 있으면 위험해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특히, 황자들의 싸움에 뛰어든 지금은 더더욱. 

    그러나 그는 그녀의 안녕과 평온을 빌며 고이 보내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놓아주긴커녕 어떻게 하면 그녀를 더욱 단단히 옭아맬까,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내가 같잖은 연기를 하며 가증을 떠는 이유가 무엇인데.

    “자, 잠깐만…….”

    숨이 달린 채선이 익제의 가슴을 밀었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한층 더 사납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한 번 무너진 둑은 자제를 알지 못했다.

    “익제……!”

    채선은 그와 입을 맞출 때마다 거대한 바다가 떠올랐다. 호수처럼 잔잔한 아침의 바다와 거센 폭풍우가 치는 한밤중의 바다. 

    그 둘은 마치 다른 세상인 양 상반되었지만, 둘 다 똑같은 바다였다.

    그러니 달콤하게 밀려 들어오는 것도 익제였고, 사납게 휘몰아치는 것도 익제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리저리 휩쓸리는 하찮은 모래알이었다.

    보잘것없는 모래알이라도 좋았다. 그의 사정에 따라 마구잡이로 쓸려 다녀도 좋았다.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며 밀려오는 파도에 살짝살짝 닿기만 하여도 좋았다. 밀려가는 파도에 속절없이 떠내려가기만 하여도 좋았다.

    채선이 떨리는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모래알이 바다를 품는다.

    쏴아아, 어디선가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야, 그녀는 어느샌가 무작스러운 비가 쏟아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처마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입술을 뗀 익제가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 말 후회하지 않겠소? 나는 사양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데.”

    그는 행여 그녀의 입에서 후회라는 단어가 나온다면 몹시 화가 날 것 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 와 그녀가 말을 번복한다고 해서 말 잘 듣는 개처럼 다시 얌전히 기다릴 수도 없었다.

    익제는 그녀의 표정을 낱낱이 지켜보았다. 부끄러움과 설렘,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 그 어디에도 후회나 저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익제가 선연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그의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희열이 휘몰아쳤다. 열사의 땅에서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이 그의 사지로 뻗어 나갔다.

    그동안 자신의 머리통을 찍어 버리고 싶었던 순간들이 몇 번이던가. 

    겁 많고 소심한 그녀가 또 한 번 달아날까, 제 발로 걸어 들어오길 기다리겠다고 다짐한 자신의 머리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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