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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75)화 (7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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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후사 말입니다, 후사.

익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군사들에게 무심한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병사들이 차츰 입을 다물었다. 알 수 없는 위압감에 그들은 저도 모르게 늘어졌던 몸을 바로 세웠다.

공터에 온전한 침묵이 찾아왔을 때, 비로소 익제의 입술이 열렸다.

“이곳은 군대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뱃속에서부터 울리는 목소리는 어렵지 않게 먼 곳까지 퍼져 나갔다. 

익제에게는 군림하는 자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그는 자신감과 위압감을 갑옷처럼 두르고서 병사들을 내려다보았다.

“군대의 목적이 무엇인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탓이다. 

그들은 인애대군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병졸이었을 뿐이다.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췄으며, 싸우라면 싸웠다.

무심한 눈동자가 천천히 좌우를 훑었다.

“군대는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그 첫 번째 목적이다. 그런데.”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익제가 서슬 퍼런 목소리로 덧붙였다. 잘 벼린 칼날처럼 예리하고 서늘한 안광이 병사들의 면면에 꽂혔다.

“나는 내 군사가 백성을 희롱하고 다니는 짓은 용납할 수가 없다.”

내 군사.

그 말에 병사들이 어리둥절한 눈을 했다. 그들은 인애대군의 사병이었고, 굳이 말하자면 이곳으로 파견을 나온 것뿐이었다. 

근무지는 바뀌었을지언정 소속이 바뀌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가 내 군사라고 하였다.

주군이 바뀌는 것인가?

군사들이 다 같은 생각을 하며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 순간, 옆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아니, 호위무사들에게 두 명의 병사가 질질 끌려 나왔다는 편이 좀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적요한 침묵 위로 애매한 의문이 스치고 지나가는 찰나, 익제의 냉랭한 목소리가 불안한 침묵을 깨뜨렸다.

“그런데 이 자들은 마을로 내려가 난동을 일삼고, 부녀자를 희롱하였다. 보호해야 마땅한 백성들을 겁박하고 탈취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무전취식은 물론이고, 아무 죄 없는 백성들을 폭행해 사경을 헤매도록 만들었다. 나는 군율을 어긴 이들을 군법에 따라 단호하게 처형함으로써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을 것이다.”

손과 발이 묶이고 재갈이 채워진 두 명의 병사가 깜짝 놀란 눈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제야 수많은 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맨 앞줄에 서 있던 사내가 걸어 나왔다. 나이는 서른 후반 즈음으로 수십의 병사 중 우두머리 격인 사내였다. 그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이 군율을 어긴 것은 벌을 받아야 마땅하나, 목을 치는 것은 과한 듯싶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인애대군의 군사입니다. 우리를 단죄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주군이신 인애대군뿐입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기세가 더해졌다. 사내는 좀 더 당당한 표정으로 익제를 마주 보았다. 

익제가 비죽, 한쪽 입꼬리를 당겼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그의 미소에 사내가 움찔, 등을 굳혔다.

“나는 인애대군께 군사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았다. 자네들을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온전히 나의 결정이란 뜻이다. 그러니 나를 따르지 않을 자는 지금 즉시 돌아가도 좋다.”

좌중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축객령에 사내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돌아가는 것은 인애대군의 명을 거역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여기 남으려면 은원군의 말에 복종해야 했다.

그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였다. 그 옆에 서 있던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방금 전의 사내보다는 젊었으나, 그 역시 수십의 무리를 이끄는 조장이었다.

“부용창에서 온 김의, 은원군을 따르겠습니다!”

“우아아아!”

그의 뒤에 도열한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부용창의 김의, 그대의 의기를 높이 산다.”

익제가 그렇게 말하며 나른한 눈으로 남은 이들을 둘러보았다.

처음의 사내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다 같은 인애대군의 군사였지만 각기 다른 지역에서 온 만큼 물밑에서는 보이지 않는 경쟁이 펼쳐졌다. 

이제까지 누구의 우세도 점칠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그 균형을 유지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균형이 깨어졌다. 처음의 사내는 익제에게 반기를 들었고, 김의는 익제에게 줄을 댔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그 결과가 어떠할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수많은 집단 중 누군가는 출세를 할 것이고, 누군가는 도태될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이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행여 뒤처질세라 황급히 입을 열었다.

“해양에서 온 금계섭, 은원군을 따르겠습니다!”

“입암에서 온 오석, 은원군을 따르겠습니다!”

“해동창에서 온 백태호, 은원군을 따르겠습니다!”

조장들의 선언이 봇물 터지듯 이어졌고, 그때마다 병사들의 함성이 하늘을 뒤흔들었다. 처음의 사내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는 은원군을 전장도 구르지 않은 애송이라 무시하였으나, 익제는 이미 그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공주에서 온 나의찬, 은원군을 따르겠습니다.”

“흠.”

익제가 고심하는 듯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것이 마치 그를 돌려보낼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보여 나의찬은 저도 모르게 바짝 기합이 들어간 얼굴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등 뒤의 병사들도 이미 은원군의 눈 밖에 난 게 아닐까, 전전긍긍하긴 마찬가지였다. 개중에 몇몇은 나의찬에게 원망 어린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익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내 군사들이 흉악한 역적을 토벌하고 나라를 수호하기를 바란다. 공을 세우면 마땅히 큰 상을 내릴 것이요, 죄를 지으면 마땅히 엄벌을 내릴 것이다. 갸륵한 충성심을 보여준 김의와 그의 군사들에게 은전 백 냥을 내리겠다.”

“우와아아!”

“군율을 어긴 이 둘의 목을 쳐 다른 자들의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 매사에 신중하고 행실을 단속하길 바란다. 명심하라, 백성이 없으면 군대도 없다.”

“예!”

익제가 원진에게 시선을 던졌다. 원진이 검을 빼 들고 두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으윽!” 

재갈이 물린 사내들이 비명을 질렀으나,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서걱.

원진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의 검이 두 사내의 목을 베었다. 수많은 이들이 모인 공터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했다.

목을 벤다는 말은 그저 그런 위협이 아니었다. 어제까지 웃고 떠들던 동료가 한순간에 움직이지 않는 시체가 되었다. 섬뜩했다. 병사들의 머릿속이 온갖 생각들로 복잡해졌다.

은원군이 만만치 않은 이라는 것과 군율을 어기면 목이 달아난다는 것, 함부로 은원군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다른 부대보다 먼저 공을 세워 은원군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

“이들의 사체는 잘 수습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라.”

“예.”

그 말을 끝으로 익제가 여유롭게 돌아섰다. 

애초에 그가 원하던 목표는 모두 이루었다. 두 명을 본보기 삼아 처형함으로써 그의 무서움을 알리고, 그들의 주군이 자신임을 각인시켰다.

더불어 해이해진 군의 기강을 단속하고, 군사들 간의 경쟁을 부추겼다. 그들은 이제 익제의 눈에 들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공을 세우려 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충성심으로 이어질 터였다.

“잘하셨습니다.”

물러나는 익제의 곁으로 보현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익제는 이 같은 계책을 생각해낸 보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곤 빙긋, 입꼬리를 당겼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재가 그의 곁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것도 마치 때를 기다린 것처럼 시의적절한 순간에.

책사와 군사가 갖추어졌다. 다음번엔 무엇일까?

익제가 원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부인은 무얼 하고 있지?”

“주대엽의 여식이 들어 같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합니다.”

그가 대뜸 눈살을 찌푸렸다.

어리석은 너구리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문득, 걸음을 멈춘 익제가 원진을 돌아보았다. 

“피 냄새가 나느냐?”

“예?”

원진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익제가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내게서 피 냄새가 나느냔 말이다. 피가 튀지는 않았는데…… 아니다, 되었다. 혹시 모르니 목욕을 하는 편이 낫겠군.”

반쯤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가 다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뒤늦게 그 말의 진의를 깨달은 원진이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 보현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웃음을 건넸다.

우리 주군이 원래는 저런 분이 아니라는 듯.

***

“그런데 군대부인께서는 아직 소식이 없으십니까?”

화영의 물음에 찻잔을 내려놓던 채선이 묻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빙긋, 입꼬리를 당긴 화영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후사 말입니다, 후사.”

“후사라니?”

채선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살그머니 달아오른 뺨이 쑥스러운 빛을 띠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화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은원군쯤 되시면 후사가 급하실 거 아닙니까? 국태부인께서도 성품이 워낙 인자하시어 별말씀 안 하시는 것뿐이지 속으로는 손주를 바라고 계실 겁니다.”

“…….”

채선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사실을 지적받은 사람처럼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후사라니,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딸 것이 아닌가? 물론, 하늘을 보지 못하는 원인은 전적으로 그녀에게 있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하늘 한 번 본 적이 없었다.

송하가 쓸데없는 말을 지껄인 화영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맞은편 벽에 서 있던 화영의 하녀가 그런 그녀에게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도영은 “큼.”하고 헛기침을 하며 멋쩍게 고개를 돌렸다.

한참 만에야 채선이 시무룩한 눈을 들었다. 

“그러실까?”

소심한 그녀의 물음에 화영이 씩, 입꼬리를 당겼다. 그녀가 짐짓 어깨를 펴며 “그야 당연하지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채선의 약점을 잡았다는 듯, 그녀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임신을 하지 못하여 소박을 맞은 여인네들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하셨습니까?”

“하지만…….”

익제는 다르다는 말을 하려던 채선은 훅 치고 들어오는 화영의 목소리에 다시금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는 다르다는 사내들의 달콤한 말을 믿지 마십시오. 핑계만 있으면 밖으로 나도는 것이 사내입니다. 혹시 압니까, 은원군께서도 후사를 핑계로 다른 여인을 들이실지?”

“저……!”

송하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두 눈에 쌍심지를 켜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도영이 그런 그녀의 팔을 붙잡았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송하가 분통이 터지는 얼굴로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인 채선을 가리켰다. 

저것 보셔요, 부인께서 당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도영은 단호했다. 이건 그들이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를 이기지 못한 송하가 풀썩, 어깨를 떨구었다.

“은원군께서, 다른 여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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