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은원군께서
큰 역사를 하신다지?
그녀가 살던 곳에도 경치 좋은 곳이 많았다. 수백 년 된 배롱나무가 자라는 숲이라든가, 폭포가 기세 좋게 떨어지는 계곡이라든가, 야생화가 흐드러진 들판이라든가.
하지만 그 어떤 곳에도 식당이 들어서진 않았다. 돈을 내고 그 풍광을 감상한다는 생각 같은 건 누구도 하지 않았다.
엉덩이를 땅바닥에 붙이고 앉아 보자기에 싸 온 주먹밥을 꺼내면 그곳이 바로 식당이었고, 무릉도원이었다.
높은 분들은 돈 쓸 곳이 없나 보구나. 그들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듯 나직한 한숨을 흘린 채선이 슬쩍 눈동자를 굴렸다. 익제의 뒤에 앉아 있는 호위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등 뒤에도 서너 명의 호위가 식탁 하나를 차지하고 있을 터였다.
이목을 끌고 싶지 않다는 채선의 말에 하인들은 두고, 호위 몇 명과 송하만 데리고 나들이를 나온 참이었다.
그들보다 먼저 식당을 차지한 손님들은 다들 차림새가 좋았다. 하긴, 남들 다 일할 시간에 경치 좋은 곳에 앉아 술을 마시는 이들이니 적어도 평민은 아닐 터였다. 돈이 썩어 남아도는 이들일 게 분명했다.
“즐거웠소?”
익제의 나긋한 물음에 떡을 콕 찍어 입으로 가져가던 채선이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그럼요. 몹시 즐거웠습니다. ……소똥을 밟은 것만 빼면요.”
갑자기 시무룩해진 그녀의 얼굴에 익제가 슬쩍 입꼬리를 당겼다. 반나절 나들이를 가는데 하녀가 짐을 한 보따리 챙긴다 했더니 그 속에 신발이 들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부인, 걱정 마셔요! 그럴 줄 알고 제가 새 신을 챙겨 왔습니다. 자, 얼른 갈아 신으셔요!’
‘그럴 줄 알고…….’
기다렸다는 듯 짠하고 등장한 송하의 모습에 채선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이내 웃기로 결정하였는지 “고맙고 미안하구나, 송하야.”하며 어린 하녀에게 객쩍은 미소를 건넸다.
익제는 쉴 새 없이 떡을 집어 먹는 송하에게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생각보다 채선을 잘 보필하는 모양이었다.
잊지 말고 상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그때, 얼큰하게 취한 사내들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익제의 눈동자가 슬쩍, 그들을 향했다.
식탁 위에는 술병 두어 개가 올라와 있었고,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들의 얼굴도 불콰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내들의 언성이 점점 커졌다.
“요즘 저자에 활기가 넘친다지?”
“그런가? 처음 듣는 얘길세.”
“쯧쯧. 두문불출하지 말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좀 듣지 그러나? 요즘 저자에 젊은 사내들이 돌아다닌다네.”
“젊은 사내들?”
“그래.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구먼.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아는 곳에 새로운 사내들이 어슬렁거리니 눈에 띌 수밖에 없지 않겠나? 덕분에 저자의 장사치들은 입이 귀에 걸렸다네.”
“어디서 온 자들인가?”
“은원군께서 큰 역사를 하신다지? 그 공사에 동원된 사내들이라더구먼.”
불쑥, 튀어나온 익제의 이름에 떡을 입으로 가져가던 채선이 또다시 움찔했다.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익제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듯 채선에게 다정한 시선을 던지며 “천천히 드시오. 떡이 꽤 야무오.”라고 말했다.
“……예.”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힐끔, 눈동자를 돌려 사내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누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지도 모르고 수다에 열을 올렸다.
“잠시 다녀가시는 은원군께서 무슨 공사를 하신단 말인가?”
“듣기로, 군대부인께서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더군. 그래서 경치 좋은 곳에 저택을 짓는 모양이야.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이라네. 그 공사에 동원된 사내들이 쉬는 날마다 마을에 내려와 돈을 쓰고 가지.”
“그렇군. 군대부인께서…….”
맙소사.
처음 듣는 이야기에 채선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가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그러나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쉿.” 하고 속삭이는 익제의 행동에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그녀는 이곳이 좋긴 하였지만, 저택을 새로 지을 만큼은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 저택이라니. 비단도 아니고, 장신구도 아니고, 저택이라니.
심장이 벌렁벌렁, 제멋대로 날뛰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저로 인해 익제가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까 겁이 났다. 여자에 눈이 멀어 우매한 짓을 저지르는 사내라 손가락질 당할까 두려웠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익제는 느긋했다. 그는 사내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 정도로 큰 공사는 수백 명의 인부를 필요로 한다. 제대로 소문이 나도는 것을 보니, 군사들을 일꾼으로 위장한 사실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중을 기했다. 그 산은 익제 가문의 소유였고, 약초꾼도 사냥꾼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성역이었다. 은밀히 일을 진행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는 말이다.
선산을 관리하는 외숙의 허락을 얻어야 했지만,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때 황후의 오라비였던 그는 늘 익제의 편이었고, 아직도 황제의 자리는 익제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그가 익제에게 반기를 들 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제라도 움직이기 시작하는 익제를 기꺼워했다.
‘그럼요. 당연히 그리하셔야지요. 아무리 병약하셨다 한들, 선황제께서 그리 갑자기 세상을 등지신 건 이해가 안 됩니다. 필시 현 황제의 농간일 것입니다. 그러니 은원군의 자리를 되찾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것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몸을 낮추고 계십시오. 그리고 선산을 제게 내어주십시오.’
‘내어드리다 말다요.’
군사들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산 한가운데 진을 쳤다. 그리고 조를 나누어 공사와 훈련, 그리고 비번을 교대로 반복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의 눈에 띈 인부들은 실제 군사의 반의반도 되지 않았다.
익제가 꿍꿍이 가득한 미소를 찻잔으로 가리는 찰나.
“?”
문득, 창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식당 여점원을 희롱하고 있는 두 사내가 보였다.
쯧쯧, 등 뒤에서 혀 차는 소리가 날아왔다.
“또 저놈들이구먼. 어딜 가든 저런 자들이 있기 마련이지.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 같은 놈들 말일세. 그중에서도 특히 저 두 놈은 벌써부터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네.”
“유명세?”
“젊은 여자들을 희롱한 게 한두 번이 아니거든. 내가 본 것만 해도 오늘이 벌써 세 번째라네.”
목소리를 낮춘 사내가 탐탁잖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저 둘이 뭉쳐 다니면서 온갖 패악질을 다 저지르고 다니지. 그런데 웬걸. 기골이 저리 장대하니 감히 누가 나서서 말리겠는가. 일전에 젊은 청년 하나가 희롱당하는 누이를 구하려고 나섰다가 흠씬 두들겨 맞고 아직도 사경을 헤맨다지.”
“저런, 썩을 놈들.”
사내들의 수다에 채선의 눈매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저택을 지을 일도 없었고, 저 사내들이 마을에 올 일도 없었으며, 부녀자들이 희롱을 당할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미간을 찌푸린 익제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사이, 여점원은 간신히 두 사람의 수작을 뿌리치고 가게 안으로 도망쳤다. 낮게 혀를 찬 두 사내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등 뒤에 앉은 원진을 향해 무슨 말인가, 낮고 빠르게 속삭였다. 원진이 호위들을 데리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채선은 그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익제님, 저는 저택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도성으로 돌아가면 향덕원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겁니다.”
마치 겁을 먹은 듯한 그녀의 모습에 익제가 내심 혀를 찼다. 그러다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들이 잘못 알고 있소.”
“무엇을요?”
“부인을 위해서가 아니오.”
채선은 그의 말을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축 처진 눈꼬리가 도무지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익제가 한층 더 다정다감하게 속살거렸다.
“집이 어디 하루 이틀 안에 뚝딱 지어지는 것인 줄 아시오? 적게는 수년, 많게는 수십 년이 걸리는 공사요. 터를 닦아야 하고, 길도 내야 하고, 건물도 올려야 하지.”
“예.”
채선이 그럴 만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살던 집은 아비가 지었는데, 그 손바닥만 한 집도 몇 달이 걸렸다고 했다. 그조차 천장이나 기둥의 마감은 제대로 하지 않아 군색하고 투박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익제가 느릿하게 시선을 떨구며 동정을 자아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도성에 있으면 얼마나 있겠소? 힘을 잃은 황족인데 말이요. 내가 도성에 머무는 것을 누가 탐탁하게 생각하겠냐는 말이오.”
“……익제님.”
채선의 눈망울이 금세 그렁그렁해졌다. 그녀는 눈앞의 사내가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지켜보던 익제가 아련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낙향할 생각이라오. 광무대군에게도 이미 내 의중을 전해 두었소.”
광무대군.
그제야 채선이 날카로운 숨을 삼켰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주먹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사내.
그래, 어쩌면 폭풍의 눈 같은 도성보다 한적한 이곳에서 평생을 죽은 듯이 사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더없이 가여운 눈으로 익제를 바라보았다.
익제가 가만히 입꼬리를 당겼다. 그의 입매에 처연한 미소가 걸렸다.
“아니면, 부인께서는 내가 도성에 사는 편이 좋으시오?”
채선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삼키려는 듯 목울대를 울린 그녀가 결의에 찬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아닙니다. 저는 익제님이 어디를 가시든 따를 것입니다.”
“고맙소.”
익제가 다정한 미소를 건넸다.
채선의 반드르르한 눈동자가 하염없이 그를 품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했다. 누구도 그를 해하지 못하도록 지켜야 했다.
그것이 그녀가 남은 생을 바쳐 이뤄야 할 단 하나의 목표였다.
그에게 그리 약조하지 않았던가.
채선이 익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 원진이 두 사내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
산중에 위치한 커다란 공터에 군사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도열했다. 아무리 큰 공터라고는 하나 그 많은 사내가 들어차니 바늘 들어갈 틈도 없이 빽빽했다. 어깨가 맞닿은 이들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인애대군이 보낸 군사는 그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차출되었다. 하지만 그가 다스리는 지역이 어디 한둘이던가.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수십 곳에서 수십 명의 사병들을 나누어 보냈다.
우두머리 하나와 수십 명의 군사로 이루어진 무리가 각 지역에서 시차를 두고 속속 도착했다. 인애대군의 군사라는 건 모두 같았지만, 출신 지역이 다른 만큼 그들은 서로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다. 병사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쟁 구도가 존재했다.
“무슨 일이래?”
“난들 아나. 우리 같은 것들이야 모이라고 하면 모이는 것이지, 언제는 영문을 알고 모였던가.”
“은밀히 움직여야 한다며 한자리에 모이는 건 피하라고 하더니 정말로 무슨 일이지?”
그때, 앞쪽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뒤쪽에 있는 이들이 목을 쭉 빼며 기웃거렸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검정 비단옷으로 몸을 감싼 사내가 너른 바위 위로 올라섰다. 높은 곳에 우뚝 선 그가 병사들을 내려다보았다. 술렁거리는 분위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저분이…….”
“은원군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