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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73)화 (7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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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기다려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너무 작은 소리라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부루퉁한 기색은 선명하게 익제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익제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뭐라고 하였소?”라고 물었다. 채선이 다시 한번 입술을 삐죽이며 슬그머니 원망을 쏟아냈다.

“기다려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하하하.”

별안간 익제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마다 그녀의 몸이 덩달아 들썩거렸다.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어쩌면 꽤 좋은 것 같기도 했다. 

채선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우렁우렁 울리는 그의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얕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녀는 그의 숨소리에 자신의 호흡을 맞추었다. 흡사 두 개의 몸이 하나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지 않소.”

“하지만…….”

무슨 말인가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채선이 그대로 눈을 감았다. 무지막지한 졸음이 쏟아졌다. 침상 아래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몸이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건 기다리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라는 푸념은 그녀의 입안에서만 뱅글뱅글 맴돌다 사라졌다.

“한숨 더 주무시겠소?”

그 사실을 눈치챈 익제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채선은 대답 대신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일어나야 했다. 문밖에는 수발들 준비를 하는 하인들의 기척이 들렸다. 방 안이 환한 것을 보니, 이미 평소보다 기침 시간이 늦은 듯했다. 

“……조금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선은 졸음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것만으로도 익제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가 채선의 등을 도닥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낮고 그윽하게 울렸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으십니다.”

예.

그 말을 끝으로 채선은 무의식의 세계로 넘어갔다. 그녀의 대답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지만, 익제라면 알아들었을 터였다. 

“하, 세상에 믿을 게 없어서 사내의 기다리겠다는 말을 믿는 것인가. 이 순진해 빠진 작자야.”

까무룩 잠든 채선을 내려다보던 익제의 잇새로 참았던 핀잔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의 눈매는 그 어느 때보다 온화했다. 

***

히잉.

“제발, 제발 좀 진정해라.”

하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풍오는 뒷발로 나무를 걷어찼다. 나무가 흔들리며, 하인의 머리 위로 이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으아악!”

풍오가 난리를 칠 때마다 고삐를 쥔 하인이 종잇장처럼 휘날렸다. 

“아이고, 마구간에 있는 암말들을 죄다 덮쳐서 후원으로 데려왔더니, 이제는 나를 패대기칠 셈이냐? 도대체 뭣 때문에 심보가 꼬인 것이냐. 말을 해야 알지!”

히이잉.

하인의 우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겅중겅중 뛰던 풍오가 후원으로 들어서는 채선을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으아악! 잠깐, 잠깐 기다려라!”

고삐를 잡은 하인이 풍오의 힘을 못 이겨 질질 끌려왔다. 하인의 잇새로 연신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보던 채선이 난감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앞에서 걸음을 멈춘 풍오가 흥, 하고 거센 콧김을 내뿜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몸을 낮추었다. 

얼른 타라는 뜻이었다. 풍오는 달리고 싶어 좀이 쑤시는 듯한 얼굴이었다. 근육이 꿈틀거리는 흑마는 채선을 태우고 세상 끝까지라도 달릴 기세였다.

그녀가 곤란한 얼굴로 웃으며 풍오를 쓰다듬었다.

“익제님이 혼자서는 말을 타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셨어. 다른 이와 함께 타는 것도 금지라고 하셨단다. 그러니 나중에 익제님이 오시거든 그때 같이 탈게.”

흥.

풍오가 또다시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도 사나운 심사가 가라앉지 않는지 푸르르, 고개를 흔들었다. 풍오의 잇새에서 굵은 침방울이 튀었다. 

“꺄악!” 

가만히 있다가 침 벼락을 맞은 송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멀찌감치 도망갔다.

풍오는 채선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땅에 코를 박았다. 똑똑, 커다란 이빨로 뜯은 풀을 퉷 하고 뱉었다.

채선이 그런 풍오의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풍오는 그녀에게서 도망가지도 않았고, 그녀를 쫓아내지도 않았다. 심통 난 표정으로 풀을 뜯으면서도 얌전히 채선의 손에 등을 맡겼다. 그건 조금 더 저를 달래달란 뜻이었다.

“어리광을 너무 받아주지 말라 하셨는데.”

조용한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녀는 난감한 듯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풍오의 등을 쓰다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좋은 말이군요.”

갑작스레 날아든 목소리에 채선이 깜짝 놀란 얼굴로 몸을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옅은 미소를 머금은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내였다. 

채선의 시선에 언뜻 경계가 어렸다.

“은원군이 아끼시는 말인 듯합니다.”

사내가 풍오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저를 비켜 간 시선에 그제야 그녀가 덩달아 눈길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풀을 뜯던 풍오가 하던 일을 멈추고 부루퉁한 기색으로 불청객을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화가 나 죽겠는데 저건 또 뭐야, 저걸 들이받아 말아? 고민하는 듯한 눈으로.

“예.”

채선이 그런 풍오를 달래려는 듯 콧잔등을 어루만졌다. 풍오의 눈매가 기분 좋게 가늘어졌다. 그러다 이내 조금 전의 심통이 떠올랐는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도영은 사내에게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사내는 채선과 대여섯 걸음의 거리를 두고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도영이 그를 막아서기 일보 직전이었다. 도영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명민한 말이나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주인 외에는 따르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군요.”

“……예.”

사내를 한 번, 풍오를 한 번 본 채선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겉모습만 보고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호기심 어린 갈색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풍오를 처음 본 사람들이 가장 많이 범하는 우가 바로 그것이었다. 번드르르한 겉모습에 속아 함부로 손을 대다가 지랄…… 아니, 못된 성미에 들이받히는 것.

사내는 질 좋은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신분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원진이나 도영만큼 체격이 좋진 않았지만, 키가 훤칠했고 얼굴이 맑았다. 두 눈은 총기로 반짝였다.

그녀의 시선이 길어지자, 사내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군대부인. 저는 국태부인의 조카이자, 주대엽의 장자인 보현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생각에 잠긴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던 채선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렇다면 화영의…….”

“예. 제가 화영의 오라비입니다. 여동생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의 문턱을 넘는 바람에 군대부인을 성가시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좋은 말벗이 생긴 듯하여 즐겁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실은 그 아이가 헛똑똑이라서요. 오라비로서 걱정이 큽니다.”

“헛똑똑이요?”

“야심은 큰데, 영악함이 그걸 따라주지 않거든요. 우물 안의 개구리나 다름없습니다. 물론,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

보현이 입꼬리를 당기며 환하게 웃었다. 

화영에 대한 험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 말에 채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이내 안심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화영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좋은 사람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익제와 핏줄이라는 사실이 호감의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몰랐다. 

그녀가 마음을 푹 놓으며 보현을 보고 마주 웃던 그때.

“웃음이 헤프오, 부인.” 

등 뒤에서 채찍 같은 목소리가 날아왔다. 채선이 반색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다 멈칫했다. 다정하게 웃고 있는 익제의 미소가 어쩐지 서늘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

채선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그 모습에 익제의 미소가 한층 더 진해졌다. 꿀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달콤한 웃음에 그녀가 쑥스러운 듯 눈을 내리깔고 입꼬리를 당겼다.

“오셨습니까?”

수줍은 채선의 모습에 송하가 ‘속지 마셔요, 부인.’하며 애타게 중얼거렸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귓가에는 닿지 않았다. 

발긋하게 달아오른 채선의 두 뺨을 보던 익제가 그제야 눈매를 온전히 누그러뜨렸다.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른 사내에게 그리 웃어 주면 안 되오. 그럼 내가 그자의 눈깔을 뽑아 버리고 싶어지지 않겠소?”

“…….”

채선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화사하게 웃고 있는 익제를 쳐다보았다. 

“질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경우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오. 이미 혼인까지 한 여인이 외간 남자에게 웃어 주다니. 살면서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소.”

더없이 다감한 말투와 선득한 내용 사이의 간극에 잠시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채선이 “외간 남자가 아닙니다.” 하고 대꾸했다.

익제의 눈썹이 스윽, 하고 밀려 올라갔다.

“외간 남자가 아니다?”

“은원군의 외사촌이자, 화영의 오라버니입니다.”

동그랗게 뜬 눈이 그를 빤히 응시했다. 혹시 자신의 외사촌도 몰라보는 거 아닌가, 걱정스러운 듯이.

피식,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웃음을 흘린 익제가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가 멀뚱멀뚱 서 있는 보현을 보며 거드름을 피웠다.

“부인께서는 형님을 사내로 보지 않는답니다.”

“…….”

누가 뭐라고 했던가? 아니, 그보다 언제 사내로 보지 않는다는 말을 했지? 외간 사내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가만히 있다가 뺨 맞은 꼴이 된 보현이 “허.”하는 헛웃음을 흘렸다. 

좀 전까지 그를 경계하던 도영이 금세 동정 어린 시선을 던졌다. 자신의 주군이 어쩌다 저 지경이 되셨나, 그는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바쁘십니까?”

“어찌 그러시오?”

채선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익제가 흔흔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는 채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가증스러운 얼굴로 시침을 뚝 뗐다. 

잠시 머뭇거리던 채선이 풍오를 가리키며 말했다.

“풍오에게 익제님이 오시면 같이 말을 타겠다고 약조를 하였는데……. 바, 바쁘시면 다른 날도 괜찮습니다!”

무엇을 먼저 하자고 조르는 법이 없는 채선의 말에 익제가 조금 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누구의 부탁이라고 감히 거절을 하겠소? 풍오.”

그의 부름에 저만치서 풀을 뜯던 풍오가 타박타박, 곁으로 다가왔다. 채선과 익제가 풍오의 등에 올라탔고, 금세 기분이 좋아진 말은 제 마음대로 후원을 누비기 시작했다. 

푸른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지나갔다.

***

바닷바람이 훅하고 밀려들었다. 습한 공기가 뺨을 감쌌고, 짭짤한 냄새가 코끝에 남았다. 

채선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서 시선을 거두고 제 앞에 앉은 익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매가 둥글게 굽었다.

“이리 경치 좋은 곳에 식당이 있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경치 좋은 곳엔 사람이 몰리기 마련이고, 사람이 몰리는 곳엔 돈이 풀리기 마련이오. 어느 장사치가 돈이 줄줄 새는 것을 보고만 있겠소?”

“그런가요?”

채선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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