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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72)화 (7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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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그따위 운명, 개나 주라지.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광무대군을 바라보았다. 지그시 응시하는 이선의 눈매에 광무대군의 얼굴 위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정염으로 달아올랐다. 

“그리고.”

심관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선은 저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았다. 광무대군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말하라.”

“문효대군의 병세가 위중하답니다. 오늘 밤이 고비가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하하.”

광무대군이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이선과 심관이 동시에 그를 응시했다. 광무대군이 안광을 번득이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잘되었군. 참으로 잘되었어.”

그러다 그가 심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내지 못했느냐?”

“예.”

“그래. 누구 짓이면 어떤가. 덕분에 나는 손 안 대고 코 푼 격인데.”

문득, 달지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귀인의 별은 잠들어 있는 용을 깨우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홍복을 가져다주지요. 귀인을 손에 쥔 용은 만사가 형통합니다. 흡사 우연인 듯 아닌 듯,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풀리니 말입니다.’

“그래, 그렇군. 모든 일이 내 뜻대로 풀리고 있어.”

반쯤 혼잣말을 중얼거린 광무대군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짙은 소유욕으로 물들었다. 

광무대군이 심관을 향해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만 물러가라.”고 명했다. 심관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방에서 물러났다. 

광무대군이 두 팔을 뻗어 이선을 끌어안았다. 그는 성마르게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며 침상으로 향했다.

“너무 성급하십니다.”

“그대가 나를 성급하게 만들지 않았소?”

광무대군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이선은 입꼬리를 조금 더 당겼다. 

어쩌면 저 역시 그에게는 심이선이 아니라, 혹은 여섯 번째 부인이 아니라, 단지 ‘귀인의 별’일 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침상에 등이 닿은 이선이 일부러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 모습이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여인처럼 보여 광무대군의 음심을 달구었다.

고개를 뒤로 꺾던 이선의 시선이 머리 위에 있는 창에 머물렀다. 구름에 가린 달이 거꾸로 보였다. 그 탓에 자그마한 손톱달이 초승달인지 그믐달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렴 어떠랴.

이선은 자신이 심이선이든, 귀인의 별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광무대군의 마음을 붙들고 있기만 하면 되었다. 머리 위로 손톱달이 조금씩 이울었다.

***

익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풍경이 시야를 파고들었다. 

해가 일찍 뜨는 계절임에도 창밖이 푸른빛인 걸 보니, 눈을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각인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어두웠던 건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익제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제 옆에 가지런하게 누워 있는 채선의 얼굴이 보였다. 

분명 잠들기 전에는 품 안에 있었는데, 언제 저리로 굴러가 산송장처럼 얌전히 자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게 귀엽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해 익제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

그러던 그의 눈동자가 조금씩 누그러졌다. 푸른 새벽빛이 내린 채선의 얼굴은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숱 많은 속눈썹은 그녀의 눈 밑에 작은 그늘을 만들었다. 그 안에 숨어 있는 갈색 눈동자는 그의 것과 달리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했다.

콧대는 낮지 않았다. 그러나 코끝이 동그래 일견 어린아이처럼 앙증맞은 구석이 있었다. 

걸핏하면 발갛게 물드는 두 뺨은, 처음엔 홀쭉하더니 요즘엔 꽤 살이 차올라 보기에 딱 좋았다. 삼시 세끼에 간식까지, 빠뜨리지 않고 먹인 보람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살짝 벌어진 입술은 촉촉했다. 

“뜨겁고, 부드러웠지.”

익제는 얼마 전 머금었던 그 입술의 감촉을 되새기며 나직이 속삭였다. 왼쪽 가슴에 뜨끈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한 번 떠올린 감각은 집채만 한 파도가 되어 거세게 그를 집어삼켰다. 

“어떻게 한다.”

익제가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색색, 고른 숨을 내쉬는 채선을 응시했다. 그의 눈매가 조금 더 사납게 흔들렸다.

거친 탐욕과 욕망.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단잠에 빠진 그녀를 깨우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건 사납게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삐죽, 고개를 내민 작은 잎처럼 연하고 부드러운 감정이었다. 

그래서 익제는 내심 당혹스러웠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그녀의 얼굴 위로 희부연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는 해가 뜨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채선의 이목구비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익제는 그녀의 얼굴 위에서 푸른 새벽이 저물고, 황금빛 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음…….”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반쯤 신음 같고, 반쯤 투정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래지 않아,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움찔거리던 눈꺼풀이 서서히 들리고, 숨어 있던 갈색 눈동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익제는 또다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가슴에 느린 파문이 일었다. 그것은 동그랗게 큰 원을 그리며 조금씩 퍼져 나가더니 이윽고 그의 몸 전체를 물들였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아니면 반대로 따스한 것 같기도 했다. 추운 겨울날, 꽁꽁 언 몸을 따뜻한 물에 푹 담갔을 때처럼 말초가 저리저리했다.

그때.

채선이 두 눈을 떴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익제를 보고는 눈매를 허물어뜨렸다. 입꼬리를 당긴 그녀가 마치 어미젖을 찾는 어린 짐승처럼 그의 품속을 꼬물꼬물 파고들었다.

“…….”

일순, 익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눈을 뜨자마자 저를 보고 환하게 웃던 그녀의 모습이 망막에 깊게 새겨졌다. 

그 순간.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운명에 안배된 자신의 사람.

흉인의 별.

불현듯, 그 말이 떠올랐다. 같이 있으면 주변 사람들을 불행에 빠뜨린다는 그녀의 빌어먹을 운명.

“그따위 운명, 개나 주라지.”

아니, 어쩌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그녀는 지금까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누구와 엮이지도 않고 고독하게 살아왔다.

그녀를 알아본 사람은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가슴이 빠듯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충만감과도 닮았고, 포만감과도 닮았으며, 한편으로는 사나운 욕심과도 닮았다.

그래, 그녀가 그 빌어먹을 운명을 타고난 것도 어쩌면 저를 만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의 운명까지 애틋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

품 안의 몸이 파드득 떨었다. 익제는 순식간에 엉덩이를 밀며 제품을 빠져나가는 채선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완전히 잠에서 깬 듯,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 저, 그게…….”

채선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더듬거렸다. 그러다 이내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곤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꿈인 줄 알고…….”

무엇이 죄송하다는 것일까. 고작 제품을 파고든 것이? 그녀는 두 사람이 부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나 한 것일까? 

익제가 두 눈을 가볍게 접으며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가 다가간 만큼 채선이 물러났다. 

그 행동이 익제의 삐뚜름한 심기를 건드렸다. 그는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그녀를 막다른 곳까지 몰고 나서야 은근하게 속삭였다. 

“꿈인 줄 알았다?”

“……예.”

침상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채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익제의 목소리가 한결 더 다정한 빛을 띠었다.

“꿈에서는 내 품에 풍덩풍덩 뛰어드는 모양이오?”

“아……!”

무슨 말인가 할 것 같던 채선의 눈매가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그의 말을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

익제의 입에서 실소가 비어져 나왔다.

이 순진한 작자야. 그렇게 속이 빤히 비쳐서야, 원. 이 험한 세상에서 용케 코를 베이지 않고 살아남았구나.

“자, 이리 오시오.”

익제가 대견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두 팔을 뻗었다. 

채선이 머뭇머뭇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눈동자를 굴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밀었다. 채선이 그를 향해 다가가는 그 순간.

쑥.

익제가 단번에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읍!”

눈 깜짝할 새 그의 몸 위에 엎드린 채선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르작거렸다. 

그러나 단단한 두 팔에 갇힌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덫에 걸린 어린 짐승처럼 부질없는 몸부림을 쳤다.

천 너머로 맞닿은 익제의 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녀의 체중 탓에 두 사람의 몸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맞물렸다. 

살갗의 감촉이 생생했다. 마치 맨살을 맞대고 있는 양 몸의 곡선과 온기까지 느껴졌다. 채선이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익제가 그런 그녀를 향해 다감한 미소를 건넸다.

“잘 잤소?”

“……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방금까지 당혹해하던 채선이 그 한 마디에 얼굴을 붉히며 수줍은 인사를 되돌렸다. 

익제의 입꼬리가 좀 더 느슨해졌다. 그는 잠든 그녀를 깨울까, 꾹꾹 눌러 참았던 욕심을 채우기로 했다. 그가 채선의 뒤통수를 잡고 지그시 아래로 눌렀다.

“!”

맙소사.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익제가 그대로 채선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역시나 부드럽고 뜨거웠다. 사나운 탐욕은 사그라드는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더 거세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를 볼 때면 늘 그랬다.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도록 고이 지켜주고 싶기도 했고, 엉엉 울며 사정하게 만들고 싶기도 했다. 

제가 없어도 오롯이 혼자 설 수 있기를 바랐고, 동시에 저 없이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기를 바랐다.

대척점에 선 그 감정들은 항상 팽팽한 균형을 유지했다. 그러나 솔직한 속내를 까발리자면, 우세한 건 언제나 후자였다.

그는 때론 조급하게, 또 때론 여유롭게 채선의 입술을 맛보았다. 그의 잇새로 만족스러운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손오공이 훔쳐 먹었다는 반도원의 복숭아가 이리 달콤할까. 그는 행여 도둑이라도 맞을까,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채선은 마치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듯한 간극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점점 가빠오는 숨을 언제 내쉬어야 할지 몰라 그녀의 어깨가 거칠게 들썩였다.

익제는 물러서는가 하면 다시 한번 짓쳐들어왔고, 그녀를 집어삼킨다 싶으면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덜컹거리며 떨어진 심장은 춘풍에 흔들리는 강아지풀처럼 살랑거렸고, 노곤하게 풀어진 심장은 금세 저릿해졌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슬며시 떨어져 나갔다. 

“하아아.”

채선은 그제야 비로소 참았던 숨을 터뜨릴 수 있었다. 

풀썩, 그녀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혼이 빠진 채로 익제의 가슴 위에 축 늘어졌다. 고된 일을 끝낸 것 같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녀의 잇새로 꾹꾹 눌러두었던 원망이 새어 나왔다.

“……하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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