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개의 별이 뜨는 밤 (71)화 (71/131)
  • 16643788173976.jpg

    71

    이번에도 부인이란 말이지.

    “석회 가루라 하시면……?”

    원진이 미심쩍은 투로 물었다. 익제가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백묵을 만드는 돌가루지.”

    백묵.

    원진이 입을 다물었다. 불현듯, 검은 천에 적혀 있던 흰색 글씨가 떠올랐다. 그것은 분명 백묵으로 쓰인 글씨였다. 

    그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익제가 도영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오늘 부인의 다리에 석회 가루가 묻을 만한 일이 있었던가? 누가 부인의 다리에 닿았나?”

    그의 물음에 도영은 희미하게 미간을 좁힌 채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을 떠올린 것인지 느릿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럴 만한 일이라곤 단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

    채선은 다급하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반쯤 뛰다시피 걸어가는 그녀의 뒤를 난감한 표정의 송하가 뒤따랐다.

    “부인, 가지 마셔요. 가지 않는 게 좋아요.”

    하지만 채선은 그녀의 만류를 못 들은 척 걸음을 서둘렀다. 하인들의 처소로 통하는 문턱을 넘자, 팽팽하게 긴장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잠시 그 자리에서 멈칫한 그녀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묻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하인들이 빼곡하게 모여 있었던 탓이다. 

    채선이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그녀를 알아본 하인들이 썰물처럼 빠지며 길을 터 주었다.

    “은원…….”

    방으로 들어서며 익제를 부르던 채선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국태부인의 하녀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바닥에 철퍼덕 엎어져 있었고, 익제는 더없이 냉랭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던 익제가 채선을 발견하고는 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익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방금 전에 본 차가운 표정은 그녀의 착각이었던 것처럼.

    “부인께서 예까진 웬일이시오?”

    그 말에 채선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녀의 얼굴이 짙은 흙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채선의 다리를 절박하게 붙들며 눈물로 호소했던 그녀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혹은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아아.”

    고개를 끄덕인 익제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을 이었다.

    “이 자가 부인의 몸에서 피를 보게 했다는 얘기를 들었소. 그 말을 듣고 내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소?”

    “하지만……!”

    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향해 한발 다가서던 채선은 도로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익제가 그녀의 말을 싹둑 잘라 버렸기 때문이다.

    “목을 비틀까, 사지를 자를까 하다가 온정을 베풀어 쫓아내는 것뿐이니 그리 놀랄 것 없소. 이 자 역시 부인의 몸에서 피를 보게 해놓고 이곳에 붙어 있을 정도로 철면피는 아닐 것이오. 어머니께서도 뜻대로 하라 하셨으니, 부인도 나를 말리지 마시오.”

    채선은 서늘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상했다. 

    무엇이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그래. 

    채선은 마침내 그 연유를 깨달은 듯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화가 난 듯 보였지만, 그것은 진심이 아닌 것 같았다. 다시 말해, 그는 화가 난 척을 하고 있었다.

    왜?

    “……예.”

    채선은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렇게 행동할 때는 제가 모르는 큰 뜻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익제는 생각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고, 늘 몇 수 앞을 내다봤다.

    애초에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국태부인의 하녀가 저 때문에 쫓겨난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그것은 하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저 재수 없게 자신의 불운에 휩쓸리고 만 것뿐이었다. 그 때문에 하녀가 쫓겨나게 된다면 모두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연유가 아니라면 굳이 그녀가 익제를 말릴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기심으로 그가 하는 일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채선이 순순히 물러선 것이 의외라는 듯, 익제가 한쪽 눈썹을 스윽 하고 밀어 올렸다. 그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어제 낮의 대화를 반추했다.

    “그것이 무엇이냐.”

    익제의 물음에 도영이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찻잔의 이가 깨져 부인의 손에서 피가 나게 만든 하녀.”

    잠시 틈을 둔 도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뒷말을 이었다. 

    “국태부인의 손에 쫓겨날 위기에 처한 그녀가 부인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습니다. 그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부인의 다리에 닿지 않았습니다.”

    “하녀라?”

    익제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원진에게 시선을 던졌다. 원진이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조건에 부합하는 하인들은 대다수 사내였습니다. 여자 하인 중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자는 딱 두 명이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황궁에서부터 국태부인을 모신 궁녀 출신의 나이 든 하녀들이었습니다. 차를 나를 만큼 젊은 하녀는 조사 대상에 없었습니다. 아마 그녀가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만으로도 품삯이 달라지는데, 굳이 그 사실을 숨겼다. 그래, 그렇군. 그렇다는 말은.”

    잠깐 말을 멈춘 익제가 입꼬리를 빙긋 당겼다.

    “어디선가 그보다 더 큰 돈이 들어온다는 뜻이겠지.”

    익제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서탁을 토옥, 톡, 두드렸다. 기다란 손가락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그의 눈매가 허공의 한 점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부인이란 말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그의 혼잣말에 원진과 도영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그 의미를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흉인의 별. 

    소리 없이 입 모양만으로 그 말을 중얼거린 익제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내 일전에 한 가령에게 따로 알아보라고 지시한 것이 있었다. 한 가령에게서는 아직 소식이 없는가?”

    “예. 아시다시피, 도성에서 도착한 소식이라곤 문효대군의 상처가 곪아 오늘내일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흠.”

    낮은 침음을 흘린 익제가 원진을 향해 “너는 당장 가서 그 하녀의 뒤를 캐보아라. 그녀가 정말로 첩자인지 아닌지, 명백한 증거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인 원진이 다음 순간, 은밀하게 몸을 감추었다.

    그 후, 한참 만에 돌아온 원진은 하녀의 방에서 백묵과 검은 천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끄트머리가 잘린 그 천은 익제가 들고 있던 검은 천과 정확히 일치했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였다.

    그러나 원진은 그 매가 누구를 향해 날아갔는지는 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고 했다. 상대방에게서 날아온 서신 역시 모조리 소각하였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되었다.”

    고개를 끄덕인 익제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쪽에서 패를 모두 드러내지 않겠다면, 우리도 가진 패를 모두 보여줄 필요는 없지. 하녀는 이 집에서 내쫓을 것이되, 누구도 그 영문을 모르게 하겠다.”

    “예.”

    짧은 상념에서 깨어난 익제가 입꼬리를 당기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온화한 눈으로 채선을 바라보았다. 

    “이런 일은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하오. 쉽게 용서를 했다간 하인들이 부인을 쉽게 볼 것이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그런 꼴을 볼 수 없소.”

    “예.”

    채선은 이번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익제의 눈매가 조금 더 깊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방 밖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던 하인들이 소리 없이 스스슥, 흩어졌다. 익제가 원진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가 호위들을 시켜 바닥에 쓰러진 하녀를 끌어냈다.

    그러고 나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느릿하게 몸을 돌린 익제가 채선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평소 그녀의 성정을 생각했을 때, 그건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만큼이나 얼얼한 일이었다. 

    익제가 입꼬리를 당기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채선을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가십시다.”

    채선은 그가 내민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익제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마치 그녀를 시험하는 듯한 시선으로.

    마침내 채선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익제의 손을 잡았다. 채선은 그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녀에게 익제는 옳고 그름의 대상이 아니었다.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 그것뿐이었다.

    ***

    광무대군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살며시 시선을 떨구고 있는 이선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촛불을 따라 그녀의 얼굴 위로 긴 음영이 졌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 모습이 마치 이승의 여인이 아닌 듯 신비로워 광무대군은 홀린 것처럼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듯, 살포시 눈동자를 들던 이선이 광무대군과 눈이 마주치자 수줍게 입매를 당기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문득, 광무대군의 눈매가 조급한 빛을 띠었다. 그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광무대군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주군.”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가 아쉬운 듯 낮게 혀를 차고는 들어오라고 명했다. 문이 열리며 흑색 옷을 입은 무사가 발소리도 내지 않고 곁으로 다가왔다.

    “그럼 저는…….”

    이선이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광무대군은 그런 그녀의 판단력을 총애했다. 쓸데없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 눈치 빠른 판단력.

    “괜찮소, 앉아 계시오.”

    “……예.”

    사각사각, 이선의 치마가 다시 구겨지는 소리를 들으며 광무대군은 심관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슨 일이냐?”

    심관은 대답 대신 서신 한 장을 내밀었다. 힐긋, 심관을 쳐다본 광무대군이 종이를 받아 펼쳤다. 서신을 읽던 그의 미간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이선은 그곳에 없는 사람인 양 조용히 숨을 죽이며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서신을 내려놓은 광무대군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후, 그의 잇새로 미심쩍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피를 보게 한 죄로 쫓겨났다?”

    거기서 잠깐 말을 멈춘 광무대군이 심관에게 시선을 던졌다.

    “들켰을 가능성은?”

    “서신 내용을 보아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약 정체가 발각되었다면 서신조차 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른 이가 보냈을 수도 있지 않은가?”

    “필체가 동일합니다. 다른 이가 보낸 서신은 아닙니다.”

    “흠.”

    의심 많은 광무대군이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하하, 나직하게 소리 내어 웃던 그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이선을 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녀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하인들에게 자애롭고 너그럽기로 소문난 은원군이 고작 그 정도 일로 불같이 화를 내며 하녀를 쫓아내다니. 흉인의 별에 푹 빠진 모양이군, 어리석게도.”

    “…….”

    이선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가 던진 말의 행간을 해석하려 바쁘게 움직이던 생각들이 일시에 멈추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서신의 내용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흉인의 별.

    이선은 광무대군이 한 말을 나직이 되뇌었다. 그에게 있어 채선은 ‘심채선’도 아니었고, 이선의 아우도 아니었다. 그저 흉인의 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