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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70)화 (7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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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석회가루로군.

눈치 빠른 송하와 도영은 그 호된 꾸지람이 화영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오직 채선만이 아무것도 모른 채 깜짝 놀란 얼굴로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안달복달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번거로우니 그만두라고, 제가 말렸습니다. 산책을 오래 할 생각도 아니었습니다.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허나, 어떤 상황에서든 주인의 안위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하인들의 의무가 아니오.”

“송구합니다. 저희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음부터 주의하겠습니다.”

송하가 사죄의 말을 하며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다. 채선이 미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꾸지람을 듣는 게 모두 제 탓인 것만 같았다.

화영은 채선을 싸고도는 익제를 보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다시 채선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갈하고 단아한 외모이기는 하지만 입이 떡 벌어질 만큼의 절세가인은 아니었다. 아마 길가는 이를 잡고 물으면 열에 여덟은 제가 더 아름답다고 대답할 것이다. 

자태나 맵시도 제가 더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은원군은 그녀의 무엇에 홀딱 빠진 것일까. 그것만 알면 도성으로의 진출도 허황된 꿈이 아닐 터인데.

“자, 날이 더우니 그만 들어갑시다. 손님도 일이 있으실 터인데 언제까지 잡아둘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소.”

“예.”

그 말은 실상 축객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은원군의 표정이 더없이 온화하여 화영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익제가 손님을 배웅하라는 듯 하인에게 눈짓을 했고, 뒤늦게 제 생각이 옳았음을 깨달은 화영이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자, 갑시다.”

익제가 채선을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어디를 갈 때마다 세 살배기 아이마냥 손을 잡고 다녀서 하인들 보기가 부끄럽다던 채선의 푸념이 떠올랐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화영의 미간이 한층 더 좁아졌다.

채선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익제의 손을 잡았다. 익제의 시선이 채선의 검지에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쯧, 그가 속으로 낮게 혀를 찰 때였다.

“앗!”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쓰러지는 그녀의 몸을 익숙하게 받아든 익제가 “괜찮소?” 하고 물었다. 

채선이 낑낑거리며 발을 빼려고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오른쪽 발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엉킨 풀에 발이 낀 모양입니다.”

그녀가 겸연쩍게 대꾸하며 송하를 향해 애면글면한 시선을 던졌다. 송하가 그녀의 발을 구출하기 위해 용감하게 출발했다. 하지만 그보다 익제가 한 발 더 빨랐다.

“!”

채선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부릅떴다. 익제가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던 것이다.

화영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치마를 조금 걷겠소.”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포 자락을 쥐던 익제가 잠시 멈칫했다.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옅은 하늘빛 포 밑단에 머물렀다. 무릎, 혹은 정강이 어림. 

그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흰색 가루가 묻어 있었다. 여름용 얇은 비단의 색이 연하고 하늘하늘하여 얼핏 보아서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익제는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돌리며 엉킨 풀 사이에 낀 그녀의 신발을 천천히 빼내었다.

“되었소?”

“……예.”

채선이 쑥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떨구었다. 익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의 손을 잡고 걸었다. 

그가 도영을 돌아보며 “하인들을 시켜 후원을 풀들을 정리하게 하라.”고 명했다. 두 번 다시 그녀가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예.”

도영이 알겠다는 듯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십시오. 은원군께서 함부로 무릎을 꿇으시다니요?”

채선이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그를 나무랐다. 익제가 그녀를 돌아보며, 머리 위에서 부서지는 뙤약볕처럼 더운 미소를 머금었다. 

“함부로, 가 아니오. 이 세상에 내가 무릎을 꿇을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오직 한 사람, 부인뿐이오.”

“읏…….”

그의 다정한 말에 채선이 저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익제가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화영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짙은 패배감이 그녀의 발밑을 휘감았다.

***

“부인께서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너라.”

처소에 당도한 익제가 하녀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그들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빠르게 움직였다. 

채선이 난감한 표정으로 “굳이 옷까지 갈아입을 필요는…….”이라고 했지만, 익제는 온화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풀을 밟으며 포 자락도 밟았는지 아래가 엉망이었소. 곧 침상에 누울 것인데 새로 갈아입는 편이 낫지 않겠소.”

“……예.”

채선은 제 기준에선 아직도 깨끗한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들곤 했다. 방 하나를 가득 채운 자신의 옷을 볼 때도 마음이 썩 편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군대부인의 삶이라면 그녀가 익숙해져야만 했다. 검소하나 남루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게.

익제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 채선을 향해 “이리 오시오.” 하며 두 팔을 뻗었다. 도영은 채선의 옷을 들고 나가는 하녀를 쫓아갔다.

“자, 오수나 듭시다.”

“예.”

낮잠을 자자는 그의 말에 늘 마지못해 따라나서던 채선이 어쩐 일인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익제가 의외라는 듯 두 눈을 살짝 크게 뜨다가 이내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제 오수를 즐기지 못해 부인께서도 내심 아쉬웠던 모양이오?”

“그, 그게 아니라……!”

채선이 퍼뜩 고개를 저었지만, 귀까지 빨개진 얼굴로는 설득력이 없었다. 속내를 들키고 만 그녀가 어깨를 떨군 채 터벅터벅, 침상으로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익제의 눈매가 더없이 부드럽게 허물어졌다.

“내 품이 그리웠소?”

그는 침상에 몸을 누이며 채선을 끌어안았다. 죽부인을 끌어안아도 시원찮을 날씨에 홧홧한 열기를 내뿜는 사람을 안고 있으려니 맞닿은 살갗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지도 몰랐다.

“오늘은 무얼 하였소?”

익제의 나른한 물음에 채선이 눈을 감으며 대꾸했다. 머뭇거리던 그녀가 익제의 옷깃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익제의 눈매가 또다시 누그러졌다. 채선의 뒤통수에 닿아 있던 그의 손이 느릿하게 목덜미를 따라 흘러내렸다.

“국태부인과 화영…… 아, 그녀는 잘 돌아갔을까요? 그러고 보니, 조심해서 가라는 인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채선이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난감하게 속삭였다. 익제가 손끝으로 그녀의 척추를 세며 나직하게 대꾸했다.

“걱정 마시오. 하인을 시켜 대문 밖까지 배웅하라 일러두었으니 별일 없을 것이오.”

“그렇습니까?”

채선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는 화영이 돌아가든 말든 안중에도 없었고, 하인들에게 그런 지시를 내린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깟 거짓말쯤 입술에 침을 바르지 않고도 할 수 있었다. 

“읏.”

어느새 등허리까지 내려온 익제의 손가락이 뼈가 오목하게 팬 곳을 지분거렸다. 그 손이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갈까, 다시 위로 올라갈까, 그것도 아니면 앞으로 건너갈까, 고민이라도 하듯 뱅글뱅글 제자리에서 맴을 돌았다.

그때마다 채선의 몸이 흠칫, 떨렸다. 

“점심을 잘못 먹었나. 소화가 잘 안 되는 것 같소.”

익제의 한 마디에 채선이 벼락을 맞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께로 이끌었다.

“그러니 부인이 쓰다듬어 주시오.”

“예.”

채선이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인 후, 그의 가슴과 명치께를 살며시 쓸어내렸다. 그녀의 얼굴에 언뜻 근심이 어렸다. 

익제는 보기와 달리 의외로 연약했다. 툭 하면 머리가 아프다, 배가 아프다, 앓는 소리를 했으니 말이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하루 종일 먹고 노는 게 일인 그녀와 다르게 그는 과중한 업무에 파묻혀 살았다. 대놓고 묻진 않았지만, 수도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전갈이 당도하는 듯했다.

국태부인께 말씀드려 보약이라도 드시게 해야겠어.

채선이 야무진 다짐을 하며 두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짧은 상념 끝으로 근육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살과는 확연히 다른 감각이었다. 마치 돌덩이를 만지듯 단단하고 탄탄한 느낌.

그 생소한 감각에 채선은 붉어지려는 두 뺨을 숨기려는 듯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익제가 아프다는데 애먼 상상을 하고 만 자신을 꾸짖듯이.

“흐음.”

익제의 잇새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기분이 좋은 듯도 하고, 무언가를 인내하는 듯도 한 그 목소리에 그녀의 귓불이 조금 더 빨갛게 물들었다.

익제는 느릿하게 침을 삼켰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아랫배에서 뭉근하게 피어오른 열기가 사지로 퍼져 나가며 몸 안의 수분을 죄다 날려 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지옥 불 속에 떨어진 죄인 마냥 뜨거운 겁화에 휩싸여 몸부림쳤다.

염려가 담뿍 담긴 그녀의 손길에도 좋다고 음심이 동하는 스스로가 한심스럽기도 하고 가엽기도 하였다. 

면벽을 하는 수도승처럼 그녀의 어깨 너머를 노려보던 그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덥석, 채선의 손을 붙잡았다. 

익제가 밭은 숨을 내쉬며 입술을 달싹이던 그 순간.

“하.”

허탈한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두 눈을 감은 그녀가 어느새 곤한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도 꼬물거리는 그녀의 손가락이 익제의 가슴을 문질렀다. 

그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해 그는 “끄응.” 하는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채선의 손등에 입을 맞춘 익제가 그녀의 손을 이불 속에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잠든 그녀를 깨우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어디서 이런 다정한 낭군을 만나겠소. 그러니 있을 때 잘하시오, 잘.”

익제의 생색이 잠든 그녀의 귀밑머리에 떨어졌다. 침상 옆에 우두커니 선 채 번뇌에 쌓인 눈으로 채선을 내려다보던 그가 긴 한숨을 내쉬곤 등을 돌렸다.

익제가 옆방으로 들어가자, 원진과 도영이 소리 없이 따라왔다. 

“가져와라.”

그의 명에 도영은 조금 전까지 채선이 입고 있었던 하늘빛의 얇고 기다란 겉옷, 포를 서탁 위에 내려놓았다. 

익제가 원진을 향해 무심하게 말했다. 

“식초, 아니, 그보다 더 진한 고초를 가져와라.”

원진은 영문 모를 얼굴을 하면서도 곧장 방을 나섰다. 

오래지 않아, 그가 호리병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뚜껑을 열자 고약한 식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도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슬쩍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익제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하늘빛 포 위로 고초를 부었다. 시큼한 냄새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

짧은 시간이 지났다.

도영과 원진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영문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

흰색 가루에서 보글보글 기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피식, 익제의 잇새에서 웃음이 터졌다. 원진과 도영의 시선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석회 가루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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