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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69)화 (6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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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풍오가 참 영리한데
성격이 좀…….

익제의 미간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불쾌한 그의 안색에도 불구하고, 원진은 계속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후에야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끝내 찾을 수 없었습니다.”

흠, 침음을 흘린 익제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원진을 올려다보았다. 그 예리한 안광에 원진은 차마 그를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구었다.

익제의 목소리가 신랄한 빛을 띠었다.

“찾을 수 없었다?”

“국태부인의 하인 중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이들을 추려 모조리 뒤를 캐보았습니다. 애초에 글을 읽고 쓰는 하인들의 수가 많지 않아 조사를 하는 데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꿀꺽.

뺨을 찌르는 매서운 눈빛에 원진은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아무리 뒤를 캐 보아도 이렇다 할 만한 것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자리를 비웠을 때, 몰래 방을 뒤지기도 하였지만, 역시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였습니다.”

익제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원진을 응시했다. 원진이 허투루 조사했을 리는 없다. 그가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정말로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더 부아가 치밀었다.

“글을 읽고 쓰는 하인들 중 누구에게서도 내통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익제는 서탁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내통자를 찾지 못하면 군사들이 성으로 들어오는 시기도 늦어진다. 

아니, 그보다 어떤 정보를 넘겨주는지 알지 못하면 결정적인 순간, 뒤통수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짧은 한숨을 내쉰 익제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꼼꼼히 뒤져라. 첩자는 이 안에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자를 찾아내라.”

“예.”

그때였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채선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호위무사였다. 익제가 그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주대엽의 여식이 들었다더니, 또다시 부인을 기만하기라도 하였느냐?”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그 계집이. 

익제는 못마땅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채선은 화영의 악의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익제는 그녀의 무례를 잊을 생각이 없었다.

“아닙니다.”

반 시진 전에도 이 방을 다녀간 호위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일이냐.”

“부인께서 손가락을 다치셨습니다.”

“손가락을?”

익제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위는 괜한 불똥을 맞고 싶지 않으니 당장 은원군께 달려가라던 도영의 말을 떠올리며 서둘러 부연했다.

“하녀가 내온 찻잔의 이가 깨져 손가락 끝을 살짝 베이셨다고 합니다. 대수로운 상처는 아닙니다.”

“대수롭고, 대수롭지 않고는 누가 정하는 것이냐.”

익제의 날 선 물음에 호위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원진이 그를 애도하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필이면 주군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잘못 걸렸군.

“부인은 지금 어디 계시냐.”

서탁을 돌아 나온 익제가 방을 가로지르며 물었다. 호위가 그를 따라나서며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국태부인께서는 처소로 돌아가시고, 부인께서는 주대엽의 여식과 함께 후원을 산책하고 계십니다.”

“두 사람이?”

“예.”

“그 너구리 같은 여인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를 속셈인가.”

익제는 곧장 방문을 열고 나섰다. 

국태부인이 있을 때는 괜찮았다. 그녀의 앞에서는 화영도 조심을 할뿐더러, 국태부인 역시 그녀의 수작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처소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익제는 제가 없는 자리에서 또다시 채선이 곤란을 당할까, 점점 걸음을 빨리했다. 아무리 채선이 그녀의 악의를 눈치채지 못한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화영의 악의를 덮어쓰게 놔둘 마음이 없었다. 

익제의 낯이 서늘하게 굳었다.

***

화영은 국태부인이 피곤하다며 자리를 뜬 이후에도 채선의 뒤를 쫄래쫄래 쫓았다. 평소라면 국태부인이 일어나자마자 볼일은 끝났다는 듯 곧장 집으로 돌아갔겠지만, 지금은 채선의 일거수일투족도 놓쳐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도성에서 온 부인이었고, 화영보다 한 수 위였다.

“으음, 덥지 않은가?” 

화영과 나란히 걷던 채선이 한참을 고민한 끝에 객쩍은 한마디를 건넸다. 이 더운 날, 굳이 후원 산책까지 따라나선 그녀가 걱정스러운 듯.

화영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화사한 미소를 날렸다.

“예, 괜찮습니다. 군대부인과 함께 산책을 하니 날이 더운 것도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채선의 입이 금세 헤벌쭉 벌어졌다. 

송하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며, 화영을 조용히 흘겨보았다. 한 번만 더 우리 부인을 무시하면 이번에는 누가 말려도 절대 참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며.

화영은 두 사람의 뒤를 따르는 송하와 도영을 의식한 듯 연신 그들을 힐긋거렸다. 그러고 보니, 국태부인과 담소를 나눌 때도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이들이다. 도성의 부인쯤 되면 집안에서도 하녀와 호위무사를 데리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다음에는 나도 보란 듯이 하녀와 호위를 데리고 와야겠구나.

가마꾼을 제외하고는 수행하는 하녀 하나 없이 혼자서 덜렁덜렁, 현림원을 찾은 화영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흐려서 그런지 산책하기 딱 좋습니다. 좀 더 볕이 강했다면 너무 더웠을 것입니다.”

“자네 말이 맞네.”

채선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저만치서 풀을 뜯고 있는 풍오의 모습이 보였다. 

구름 사이로 떨어지는 한 줄기 햇살에 풍오의 까만 털이 흑요석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채선은 대번에 반색을 하며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발견한 하인이 꾸벅 고개를 숙였고, 눈동자만 힐끔거린 풍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다시 풀을 뜯었다. 

“말, 이 아닙니까?”

헐레벌떡, 채선의 뒤를 따라온 화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채선이 풍오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윤기 나는 검은 털이 손끝에서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은원군께서 가장 아끼시는 말이라네. 아주 영리한 말이지.”

무심하게 풀을 뜯는 풍오의 귀가 쫑긋거렸다. 용케 자신의 칭찬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풍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심드렁한 얼굴로 풀숲에 코를 박았다. 

하인들이 질 좋은 여물을 준비해주는데도 풍오는 가끔 한 번씩 이렇게 후원을 헤집으며 풀을 뜯곤 했다. 그럴 때는 주로.

“그렇군요. 이 말이 바로 은원군께서…….”

화영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풍오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채선이 하는 건 저 역시 해보아야 성이 찼기 때문이다.

“아, 아니…….”

그러나 풍오가 이렇게 저를 본체만체 풀만 뜯는 건 주로 심기가 뒤틀렸을 때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채선이 황급히 그녀를 만류했다.

아니, 만류하려고 했다.

“꺄아악!”

그보다 먼저 풍오가 고개를 돌리며 입을 쩍 벌렸다. 하얗고 커다란 이빨이 그녀의 팔을 물듯이 위협했다. 

번뜩이는 이빨이 허공에서 맞물리며 딱 하고 큰소리를 냈다. 정말로 무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녀를 겁주려는 행동이었다. 

풍오의 위협은 제대로 통했다. 화영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지르다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은 것이다. 

“…….”

채선은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화영은 마치 괴물이라도 본 듯했다. 두 눈을 부릅뜬 그녀가 엉덩이를 바락바락 밀며 풍오에게서 조금이라도 멀리 달아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흥.

풍오가 콧방귀를 뀌며 다시 풀을 뜯기 시작했다. 

채선은 자신이 저지른 일도 아닌데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민망해졌다. 그녀가 화영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화영이 무심코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

따뜻했다. 

그것이 이상했다. 살아 있는 인간의 손이니 따뜻한 게 당연했지만, 화영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채선을 바라보고 말았다. 

그 순간, 눈앞에 있는 이가 저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확인한 기분이었다.

화영은 이름난 가문의 여식이었고,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비록 저물어가는 권력이라고는 하나, 황후를 배출한 가문의 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이 그녀를 우러러보았다.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을 만지는 것조차 조심했다. 

다른 사람의 체온을 느낀 게 언제였더라, 화영이 머릿속을 뒤적였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는 말은 까마득할 만큼 오래되었다는 뜻일 거다.

멍하니 서 있는 화영의 모습에 채선은 많이 놀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이며 힐끔, 풍오의 눈치를 살폈다. 화영의 귓가에 동그랗게 구부린 손바닥을 갖다 댄 채선이 작게 속삭였다.

“풍오가 참 영리한데 성격이 좀…….”

그 말에 화영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린 그녀가 “그런데 그 말을 왜 굳이 귓속말로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솜털을 간질이는 채선의 따스한 숨결이 어색한 것처럼.

채선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말했잖은가. 풍오가 무척 영리하다고.”

“…….”

일순, 화영은 저도 모르게 한심한 시선을 던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 말이 무슨 뜻인가? 설마 저 짐승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다는 건가? 

방금까지 느꼈던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부인.”

등 뒤에서 여름 바람처럼 더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익제가 바다색보다 짙은 청색의 포 자락을 휘날리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더없이 다정한 눈으로 채선을 바라보았다. 반갑게 미소 짓던 채선이 이내 수줍은 표정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산책을 하고 있었나 보구려.”

“예.”

화영은 은원군에게 눈길을 주었다. 자신의 사촌 오라비인 그는 어디 한 군데 빠지는 구석이 없는 사내였다. 고귀한 출신성분과 옥 같은 외모, 당당한 풍채와 자애로운 성격까지. 

그녀의 아비는 술이 얼큰하게 들어가면 “그분만큼 황제의 자리에 잘 어울리는 분이 없을 터인데.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구나.”라며 한탄을 하곤 했다. 

화영은 면류관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부친의 말처럼 몹시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와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대면하는 것은 처음인 그녀가 긴장한 기색을 감추며 애써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주대엽의 여식, 화영입니다.”

“반갑구나.”

잠깐 그녀를 일별한 익제가 다시 채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눈앞의 여인보다 땀에 젖은 채선의 귀밑머리가 더 신경 쓰이는 듯했다. 

그가 채선의 옆머리를 매만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한참 더운 시각에 산책이 웬 말이오? 그러다 행여 몸이라도 상할까 염려스럽소.”

“괜찮습니다. 구름이 낮게 끼어 생각만큼 덥지 않습니다.”

채선의 말에도 익제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그의 화살이 멀뚱멀뚱 서 있는 송하와 도영에게로 날아갔다.

“너희는 어찌하여 부인께서 산책을 하시는데 뙤약볕을 그냥 맞게 하고 있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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