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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68)화 (6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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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은근히 고수란 말이지.

    “작은 실수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게 승마요. 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진 이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소?”

    “조심하겠습니다.”

    채선의 목소리가 간절한 빛을 띠었다. 

    익제는 그녀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었다. 방을 온갖 보석으로 장식해 달라면 그리해줄 것이고, 비단으로 길을 만들어 달라면 그리해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만에 하나의 확률에도 마음을 놓을 생각은 없소. 앞으로 부인은 내가 없이 혼자서 말에 타는 것은 금지요.”

    “……예에.”

    할 수 없다는 듯 채선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안 되는 일을 조를 만큼 뻔뻔하지 못했고, 체념에 익숙했다. 

    그러다 문득, 그 말속에 숨은 뜻을 깨달은 채선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익제님과 함께 말을 타는 것은 괜찮나요?”

    “나와 함께라면.”

    익제가 선심을 쓰듯 이해심 넓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환하게 웃던 채선이 일순,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 많이 바쁘신가요?”

    “그건 어찌 물어보시오?”

    “바쁘시지 않다면, 저와 같이 말을 타실래요?”

    “내 어찌 부인의 청을 거절한단 말이오.”

    익제가 안고 있던 채선을 다시 풍오의 등에 태웠다. 그리고 그 역시 말 등 위로 올라갔다.

    “자, 고삐를 바투 쥐시오.”

    “예.”

    채선이 익제의 가르침대로 고삐를 암팡지게 움켜쥐었다. 그녀가 “이랴!” 하고 기세 좋게 소리쳤다. 

    시큰둥하게 서 있던 풍오는 익제가 슬쩍 배를 걷어차자, 그제야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채선의 입에서 가느다란 웃음이 터졌고, 익제가 그런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도영이 눈치껏 자리에서 물러나 송하의 옆으로 걸어갔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송하가 그에게 슬쩍 귓속말을 했다.

    “그런데 어째 주인님께서 계속 이쪽을 노려보시는 것 같습니다?”

    도영이 대수롭지 않은 척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부인께 말 타는 법을 가르친 게 언짢으신 모양이지.”

    “아…….”

    뒷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송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익제로서는 일석이조였다. 채선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과 그녀가 다른 이에게 말 타는 법을 배우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것. 

    송하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도영을 바라보며 말없이 그를 위로했다. 그러다 불현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읊조렸다. 

    “처음에는 분명 멋지고 자애로우신 주인님이셨는데…….”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을 쥐가 듣는다고 하였다. 그녀는 혹 제 말을 훔쳐 들은 새가 없는지, 경계 어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아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

    화영은 이상하게 채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한 얼굴을 하고서 자신의 말을 따박따박 받아치는 것도 그렇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국태부인의 애정을 독차지하는 것도 그랬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썩 잘난 것 같지도 않은데 군대부인의 자리를 꿰찬 것이 가장 불만스러웠다.

    순한 척을 하지만, 은근히 고수란 말이지.

    하긴, 군대부인 정도면 온갖 정치질의 한가운데에 있을 터였다. 듣기로, 도성의 부인들은 남자들만큼이나 알력 싸움이 크다고 했다. 

    남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설치는 부인도 있는가 하면, 그 스스로 권력을 일궈나가는 부인들도 있다고 했다.

    그 속에서 단련된 솜씨라면 자신의 핀잔을 받아치는 것쯤은 누워서 떡 먹기일 것이다. 분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군대부인은 그녀보다 한 수 위였다.

    화영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슬그머니 채선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녀는 두 눈을 반으로 접으며 국태부인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정말입니다. 국태부인께서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시니 모르실 뿐, 이곳에 사는 이들은 하나같이 부인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제가 당장 나가서 그때 만났던 그 어부를 데리고 올까요?”

    “아니네. 되었네.”

    채선은 그녀가 고개만 끄덕이면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 모습에 국태부인이 웃음을 터뜨리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니까 이런 게 이상하다는 거다. 기껏해야 입술 끝을 당기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 게 전부인 국태부인이 몹시 유쾌하다는 듯 소리 내어 웃는다는 게 말이다. 

    도대체 그녀가 무슨 술수를 부렸길래.

    화영은 쓴 눈으로 채선을 노려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아무리 그녀가 눈꼴시다고는 하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화영은 채선의 행동을 보고 배우자고 생각하며 뱃속에서 들끓는 분함을 억눌렀다.

    언젠가 도성으로 진출할 그 날을 위해 자존심 따위는 개나 주자.

    화영이 방긋, 미소를 머금으며 채선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녀가 말간 웃음을 돌려주었다.

    때마침 하녀가 차를 가져왔다. 하녀는 정갈한 동작으로 그들 앞에 차를 내려놓았다. 국태부인과 군대부인, 그리고 화영 순으로.

    뾰족한 눈으로 자신의 찻잔을 노려보던 화영이 “앗!”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

    “저런.”

    “괜찮으셔요?”

    화영이 의아한 눈을 했고, 국태부인이 눈매를 찌푸렸으며, 송하가 대번에 곁으로 달려왔다. 

    송하는 붉은 핏방울이 배어 난 그녀의 손가락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방금 전 채선이 쥔 찻잔을 꼼꼼히 살폈다.

    “찻잔의 이가 깨졌습니다.”

    송하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국태부인의 하녀를 흘겨보았다.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서 어떻게 하겠냐는 듯.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하녀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의 잇새로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송구합니다. 송구합니다.”

    소매에서 깨끗한 천을 꺼낸 송하가 채선의 손끝에 묻은 피를 닦았다. 

    채선은 저도 모르게 송하의 소매를 힐긋거렸다. 그녀의 소매 속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머리에 묻은 새똥을 닦을 천부터 상처를 치료할 약초까지, 말만 하면 다 튀어나왔다. 신기한 소매였다. 

    그녀의 세심한 모습에 문득 이선이 떠올랐다. 채선이 가시에 찔리거나 새똥에 맞아 울상을 짓고 있으면, 그녀를 놀리면서도 상황을 수습하는 건 늘 이선의 몫이었다. 

    언니는 잘 지내고 있을까.

    채선의 눈매가 시무룩한 빛을 띠었다. 이선을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녀가 무척 보고 싶었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였던 두 사람은 이토록 오래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다. 고작해야 이선이 장에 다녀오는 동안이 전부였을 뿐이다. 

    자신의 반쪽에 대한 그리움이 뼛속에 사무쳤다. 동시에 채선은 그녀를 볼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광무대군은 익제를 제거하려는 정적이었고, 이선과 그녀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그것은 흡사 널뛰기와 같았다. 한 사람이 올라가면, 다른 한 사람은 내려가야만 했다. 두 사람은 결코 만날 수 없었다.

    게다가 채선은 결정적인 순간, 익제를 선택했다. 흉인의 별과 광무대군에 대한 이야기까지 모두 솔직하게 털어놓은 뒤 그의 처분을 기다렸으니, 결과적으로는 이선을 배신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선은 언젠가 그녀를 다시 만날 날을 꿈꾸었다. 자신이 새똥을 맞으면 웃음을 터뜨린 이선이 나뭇잎을 톡 꺾어 머리에 묻은 오물을 닦아줄 그 날을. 

    채선이 저도 모르게 옷 위로 노리개를 만지작거렸다.

    “이를 어째. 의원을 부를까요?”

    송골송골, 자꾸만 배어나는 핏방울을 보며 송하가 다급하게 물었다. 잠깐만 눈을 떼도 상처를 달고 오는 채선이 걱정스러웠지만, 상처가 늘 때마다 서늘해지는 익제의 안광을 마주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둘 중 무엇이 더 무서운가 하면, 물론 후자였다.

    “이정도 가지고 의원은 무슨. 호들갑 떨 것 없단다, 송하야.”

    송하의 성마른 물음에 채선이 짧은 상념에서 깨어나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송하가 이번에는 국태부인에게 힐긋, 시선을 던졌다. 그녀가 재촉하는 듯한 눈으로 국태부인의 안색을 살폈다. 

    이래 봬도 채선은 명색이 군대부인이다. 황제의 조카이자, 선황제의 아들인 은원군의 부인이라는 말이다. 

    그녀를 다치게 한 하녀의 실수를 그냥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국태부인이라고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하녀를 바라보던 그녀가 이윽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군대부인이 피까지 본 마당에 네 실수를 눈감아줄 수가 없겠구나.”

    “국태부인!”

    하녀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화영은 지루한 표정으로 차를 마셨다. 사소한 실수로 쫓겨나는 하녀들이야 한둘이 아니었고, 그녀에겐 딱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화영은 하품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젊은 하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채선의 다리를 붙잡았다. 송하가 그런 그녀의 손을 매몰차게 떼어냈다. 

    하지만 하녀는 한층 더 악착같이 채선의 다리를 붙들었다.

    “익!” 

    쌍심지를 켠 송하가 다시 한번 그녀의 어깨를 밀며 소리를 질렀다.

    “놓아라!”

    “군대부인!”

    하녀는 채선이 그녀의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 채선의 다리에 몸을 딱 붙인 하녀가 절박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하녀의 뺨을 따라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때, 채선이 고개를 들어 국태부인을 바라보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부인!”

    하녀의 편을 드는 그녀의 말에 송하가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으로 채선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 대신 송하를 바라보며 가만히 눈매를 접을 따름이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읏.”

    그제야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무례한 언행으로 연산댁에게 쫓겨날 위기에 처한 저를 구해주던 채선의 모습이.

    그녀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송하가 체념 섞인 표정으로 어깨를 떨구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지만, 송하는 자신이 겨 묻은 개라고 자신했다. 적어도 그녀는 채선이 피를 보도록 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송하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부루퉁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주인님께서 화를 내실 거여요.”라는 혼잣말은 누구의 귀에도 닿지 않을 만큼 작았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조심성이 없었던 제 탓도 있는 것을요. 그리고 보세요, 어디를 다쳤는지 모를 정도로 상처가 작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채선이 자신의 검지를 들었다. 피가 멎은 손가락은 그녀의 말처럼 멀쩡했다.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상처 자국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실 그 말의 속뜻은 자신의 불운한 운명을 탓하는 것이었다. 하녀의 부주의가 아니라도 그녀에게는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었고, 이 정도 상처는 불운의 축에도 끼지 못했다. 

    “하지만…….”

    국태부인이 난감한 듯 눈살을 찌푸리는 찰나, 하녀가 대뜸 바닥에 이마를 대고 절을 했다.

    “군대부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흰 눈으로 그 모습을 노려보던 송하가 다시 한번 입술을 삐죽였다. 채선이 무릎 꿇고 있는 하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네. 괘념치 말고 차나 새로 내주게.”

    “예, 군대부인. 정말로 감사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금방 새로운 차를 내오겠습니다.”

    연신 허리를 숙이며 절을 하던 하녀가 눈물을 훔치면서 방을 나섰다. 

    화영은 희미하게 찌푸린 눈으로 채선을 보았다. 그러다 잠시 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고수였어. 국태부인 앞이라고 아량이 넓은 척을 하다니, 도성에서 온 부인이라 무엇이 달라도 다르구나. 확실히 보고 배울 필요가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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