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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67)화 (6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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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

    이렇게 손이 많이 가서야, 원.

    송하는 익제가 어째서 채선을 그리 놀리는지 알 것 같다며 웃음을 삼켰다. 그녀의 반응이 즉각적이었기 때문이다. 찌르면 찌르는 대로 날 것 같은 반응이 돌아왔다. 

    그녀가 아는 것을 익제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채선이 그의 놀림에서 벗어날 길은 요원하다고 봐야 했다.

    채선의 암울한 앞날을 짐작한 듯 송하가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다 축 처진 어깨에 뜨끔한 얼굴을 했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구나!

    송하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녀를 놀리는 게 즐거워도, 채선의 우울한 표정 하나에 전전긍긍하는 사람 역시 송하였기 때문이다.

    “듣기로 귀한 손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아마 그래서 바쁘신 게 아닐까요?”

    “귀한 손님?”

    그녀의 한마디에 채선은 언제 침울했냐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송하가 자못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미심장한 눈으로 아무도 없는 후원을 슥, 둘러본 그녀가 채선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채선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댄 송하가 작게 속삭였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손님께서 호위 몇 명만 데리고 은밀하게 방문하셨다는데, 소문으로는 문효대군이시라고 합니다.”

    “문효대군?”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도 모르게 힐긋, 도영을 바라보았다. 

    정자 기둥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낀 그는 나른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채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문효대군이라면 폐하의…….”

    “예, 셋째 아드님이시죠.”

    “도성에 계시는 분이 이 먼 곳까지는 왜……?”

    의구심 가득한 채선의 눈동자에 송하가 멈칫했다. 그녀라고 그 답을 알 리 만무했던 탓이다. 송하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곤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채선은 다시 산등성이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커다란 구름이 산꼭대기에 걸려 있었다. 짙은 그늘이 산 정상을 뒤덮었다. 구름이 바람에 떠밀려 갈 때마다 커다란 그늘 역시 유유히 흘러갔다. 

    빛과 그림자.

    문득, 고개를 돌린 채선이 다시 한번 도영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

    원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랫동안 고개를 젖히고 있었던 탓에 목과 등이 뻐근했다. 

    통증 때문에라도 한 번쯤은 고개를 숙일 법했지만, 그는 마치 부모 죽인 원수를 노려보듯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푸른 하늘을 응시했다. 

    그의 왼손에는 활이 들려 있었고, 오른손은 이미 반쯤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수풀 너머에서 까만 점 같은 것이 날아올랐다. 원진의 예리한 시선이 까만 형제를 따라 움직였다. 그것은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매의 형체를 갖추었다. 

    “행동 한번 빠르군.”

    조소를 흘린 원진이 화살촉을 하늘 위로 겨냥했다. 다음 순간, 그가 거침없이 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가벼운 파공음과 함께 빠르게 하늘을 꿰뚫었다. 

    털썩.

    화살에 맞은 매가 바닥으로 낙하했다. 원진은 매의 사체가 떨어졌을 만한 곳으로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발밑의 풀이 요란하게 아우성을 쳤다. 그는 시야를 가린 나뭇가지를 걷으며 정원 깊숙이 들어갔다. 

    무릎까지 자란 풀들 사이를 헤매자, 마침내 몸통에 화살이 박힌 매 한 마리가 보였다.

    “…….”

    원진은 천천히 허리를 굽혀 죽은 매를 주웠다. 매의 다리에는 검은색 천이 묶여 있었다. 모든 게 익제의 예상대로였다. 

    그는 매의 사체를 내려다보며, 그날 익제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너는 곧장 인근 지역으로 가서 이 집의 하인뿐 아니라 우리 측 하인과 호위 중 그 누구도 얼굴을 모르는 젊은 사내를 하나 데려와라. 단, 귀한 집 자제처럼 보이는 낯이어야 할 것이다. 그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호위 대여섯을 대동하게 하라.”

    원진은 마치 뜬구름을 잡는 것 같은 그의 말에 대답 대신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의 의중을 짐작하지 못한 탓이었다.

     허공의 한 점을 쏘아보던 익제가 비죽,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리며 냉소를 흘렸다.

    “그리고 은밀히 사람을 풀어 말을 전하라.”

    아.

    원진이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그제야 주군의 심중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익제의 목소리가 의미심장한 빛을 띠었다.

    “우리 측 하인들에게는 그 손님을 문효대군이라 소문내고, 호위들에게는 한위대군이라고 소문내며, 어머니의 하인들에게는 효성대군이라 소문을 내라.”

    하인들은 대군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고, 병사들은 한위대군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실로 교묘한 술책이었다. 

    게다가 하인이라고 하여 다 같은 하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비슷한 부류끼리 어울렸으며, 생각만큼 쉽게 섞이지 않았다. 

    국태부인의 하인과 은원군의 하인들은 머무는 처소가 달랐고, 하는 일이 달랐으며, 행동반경 역시 달랐다. 

    하인들끼리도 그럴 진데, 하물며 호위들은 어떻겠는가. 그들은 하인들과 한층 더 거리감이 있었다. 그 틈을 노린 계책이었다. 소문은 그들의 울타리 안에서만 떠돌 터였다.

    설령 소문의 주인공이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해도 괜찮았다. 그때쯤이면 첩자는 이미 행동을 개시한 뒤일 테니.

    “예, 주군.”

    “그리하면 적어도 어느 측에 첩자가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겠지.”

    익제의 조용한 혼잣말에 원진은 새삼 그가 몇 수 앞까지 내다보는지 궁금해졌다.

    매의 사체를 나무 아래에 묻어 은폐한 원진은 곧장 익제의 처소로 향했다. 듣는 귀가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한 뒤에야 그가 익제에게 검은 천을 내밀었다. 

    “하.”

    천에 적힌 글자를 읽던 익제가 냉담한 한숨을 흘렸다. 그가 손에 든 천을 서탁 위에 내려놓으며 원진에게로 스윽 밀었다. 

    원진이 백묵으로 적힌 글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효성대군과 접촉.”

    원진이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도한 것 같기도 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국태부인의 하인이로군요.”

    익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진이 그의 눈치를 살피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우리 쪽 사람이 아니라.” 하고 한마디를 거들었다. 

    익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들키지 않았다 뿐이지, 우리 쪽에도 첩자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익제가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뗐다.

    “이곳의 하인 중 글을 쓸 수 있는 자.”

    그의 의중을 짐작한 원진이 고개를 숙였다.

    “예. 국태부인의 하인들을 철저히 조사해 보겠습니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하인이 그리 많을 것 같진 않으니,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아니다. 시일은 좀 걸려도 좋으니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진행하라. 그전까지 인애대군의 군사들은 성안으로 들이지 말고.”

    “예, 주군.”

    원진이 곧장 등을 돌려 방을 나갔다. 톡톡, 서탁을 두드리던 익제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부인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문밖에 서 있던 하인이 즉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조금 전, 도영의 수하가 남기고 간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전했다. 

    “후원에서 말을 타고 계시다고 합니다.”

    “말이라?”

    익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여기 있는데 누구와 함께 말을 탄다는 것인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익제가 단숨에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그가 성큼성큼, 후원으로 향했다.

    “굉장하구나, 풍오야. 넌 정말 영리한 말이란다.”

    후원으로 들어서는 순간, 채선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흥, 건방진 말이 금세 기고만장해서 코웃음을 쳤다. 그걸 이제 알았냐는 듯.

    “…….”

    시야를 가린 나뭇가지를 손으로 걷자, 말 위에 앉아 있는 채선의 모습이 보였다. 오만한 말은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느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도영이 한 걸음 앞에서 고삐를 잡고 걸었다. 하지만 풍오는 그가 선두에 서 있는 것이 못마땅한 듯 부리부리한 눈을 흘기며 연신 뜨거운 숨을 뱉어냈다. 

    송하는 행여 풍오의 뒷발에 걷어차이기라도 할까, 멀찍이 떨어져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맙소. 덕분에 이리 말을 탈 수 있으니.”

    채선의 목소리가 말 등 위로 떨어졌다. 힐긋, 뒤를 돌아본 도영이 빙글거리며 웃었다.

    “별말씀을요. 악기나 춤보다는 훨씬 소질이 있으십니다. 그보다 허리를 좀 더 꼿꼿이 세우십시오. 몸에서 힘을 빼시고요.”

    “허리를 세우는데 몸에서 힘을 빼라니…….”

    채선은 도영의 이율배반적인 주문에 끙끙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허리를 펴면 몸에 힘이 들어가고, 몸에서 힘을 빼면 허리가 굽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도영이 피식 웃었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날이 오늘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허벅지나 둔부가 아프지는 않으십니까?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도 아프지 않소. 실은 정말로 말을 타 보고 싶었다오.”

    “내가 가르쳐준다고 하지 않았소? 부인께서는 그새를 못 참고 딴 놈과 말을 타는 것이오?”

    느닷없이 날아든 익제의 목소리에 채선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등을 돌렸다. 그 바람에 상체가 비틀거리며 그녀의 몸이 기우뚱, 하고 기울어졌다.

    “으아악!”

    “부인!”

    일순, 익제가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그 순간, 풍오가 영리하게 몸을 틀어 채선이 균형을 잡도록 도왔다. 그녀는 풍오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간신히 흑마의 등에 매달렸다.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하얗게 얼어붙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하아. 

    순식간에 그녀의 곁에 당도한 익제가 채선의 허리를 붙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잇새로 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심하시오. 초보자가 말에서 눈을 떼는 법이 어디 있소?”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누가 인기척도 없이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라고 했습니까, 라는 말은 차마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채선이 부모에게 꾸지람을 들은 아이처럼 풀 죽은 기색으로 어깨를 떨구었다. 

    뒤늦게 이성이 돌아온 익제가 낮게 혀를 찼다. 

    “내 이러니 어찌 부인에게서 한시라도 눈을 뗄 수가 있겠소? 내가 없으면 금세 팔다리 하나 정도는 부러뜨릴 터인데.”

    그러니까 그게 다 익제님 때문인데요, 라는 말 역시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도대체 내가 없을 때는 어떻게 살았소? 이렇게 손이 많이 가서야, 원. 여태 목숨이 붙어 있는 게 용하구려.”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며 생색을 낸 익제가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녀가 무사한 걸 확인한 풍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발밑을 풀을 뜯었다. 이빨로 아그작아그작 씹은 풀을 다시 퉷 하고 뱉는 걸 보니, 딱히 배가 고픈 건 아닌 듯했다.

    익제가 두 손에 힘을 줬다.

    “어어…….”

    갑자기 몸이 허공에 붕 뜬 채선이 당황한 얼굴로 그의 목을 덥석, 끌어안았다. 

    문득, 익제의 눈매가 누그러졌다. 채선을 땅에 내려놓으려다 생각을 바꾼 그가 그녀를 양팔로 끌어안은 채 다시 한번 엄한 얼굴을 했다.

    “앞으로 부인 혼자서 말을 타는 것은 금지요.”

    채선이 억울한 표정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말 타는 법을 알려주신다고 하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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