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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66)화 (66/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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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내가 명한 것들은
    준비가 되었는가?

    덥석. 

    도영이 송하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씨근덕거리는 송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복장이 터지는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게 말이네.” 

    채선이 기어코 시무룩한 한숨을 내쉬었다. 송하의 눈매가 분한 듯 일그러지고, 화영의 붉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채선의 잇새로 침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도 은원군께서 어찌하여 나를 그리 귀하게 여기시는지 도통 영문을 모르겠네. 특히, 손발이 없는 것처럼 나를 달랑달랑 안고 다니시는 건 정말이지, 하인들에게 얼굴을 들지 못할 만큼 부끄럽다네. 어디 그뿐인 줄 아는가. 산보를 할 때는 길 잃을까 염려되는 세 살배기 어린아이처럼 늘 손을 잡고 다니신다네. 대관절 왜 그러시는 것일까?”

    “읏.”

    채선의 푸념에 화영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녀가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며 채선을 흘겨보았다. 

    “그렇, 습니까? 금실이 몹시 좋으신가 봅니다.”

    실상 그것은 빈정거리는 말이었지만,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선은 두 뺨을 살며시 붉혔다. 그녀가 시선을 떨구며 수줍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금실이 좋……아 보이는가. 요즘 들어, 은원군께서 한층 더 다정해지신 것 같긴 하네. 이건 자네에게만 하는 말인데, 보는 눈이 있든 없든 자꾸만 몸을 지분거리셔서……, 그럴 때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네. 심장이 자꾸 덜컹거려.”

    그렇게 말한 채선이 화영을 보며 해사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마음이 한결 가볍네. 실은, 은원군에 대한 얘긴 국태부인께 드리기 어렵잖은가.”

    “그렇, 습니까?”

    떨리는 입술을 가까스로 당긴 화영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그녀의 어조가 한층 높고 날카로워졌다.

    “그나저나 군대부인의 특기는 무엇입니까? 제 솜씨가 미천하여 군대부인께서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한 수 배웠으면 합니다.”

    화영은 이 지역에서 기예로 제법 이름이 난 여인이었다. 글, 그림, 악기, 춤, 무엇이든 한 손에 꼽힐 만큼 뛰어난 실력자였고, 그녀를 탐내는 혼처가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좁은 땅에 머물기에는 자신이 지나치게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이런 변방이 아니라 화려한 도성이 더 어울렸다. 

    멀리서 그녀의 그림자만 보여도 수많은 이들이 고개를 조아리는 곳.

    그런데 섬에서 자란 여인이 오직 태부의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은원군과 혼인을 하였다고 했다. 

    국태부인의 조카인 자신은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섬에서 나고 자란 모자란 여인이 은원군을 꿰찼다는 말이다. 

    물론,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태부의 조카와 권력의 뒤안길로 접어든 국태부인의 조카가 같은 처지겠느냐만, 그래도 그녀가 군대부인의 자리를 차지할 정도면 자신은 황제의 후궁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녀의 물음에 채선이 두 눈을 반짝이며 대꾸했다. 화영의 표정이 얼핏 불안한 빛을 띠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상체를 뒤로 물렸고, 그만큼 채선이 바짝 다가왔다.

    “은원군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네. 기예는 좋은 혼처를 얻기 위해 배우는 것인데, 나는 이미 더없이 좋은 혼사를 이루었으니 솜씨가 없어도 괜찮다고 하였거든. 그런데.”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채선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화영을 보았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화영의 고운 손등을 어루만지며 다정하게 위로했다. 

    “그대는 아직 혼처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솜씨가 미천하다니……. 그것 참, 안 되었군. 하지만 실망하기에는 이르네.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점차 나아질 것이네. 아니면, 국태부인께 배우는 것은 어떻겠는가? 내가 잘 말씀드리면 가르쳐주실 것 같은데. 국태부인의 솜씨가 아주 뛰어나시다네. 못 하는 것이 없으셔.”

    “……괜찮습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화영이 입술을 짓씹으며 간신히 미소를 머금었다. 

    이 근방에서 기예가 뛰어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자신을 위로하다니, 아무리 제가 뿌린 씨앗이라 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 위로가 진심이라 더욱 분통이 터졌다. 

    그렇다고 방금까진 솜씨가 미욱하다고 해놓고 금세 손바닥 뒤집듯이 제 실력을 자랑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더 억울했다.

    채선은 눈이 마주친 화영을 향해 방긋, 입꼬리를 당겼다.

    “너무 괘념치 말게. 나도 솜씨가 썩 훌륭한 편은 아닌데 이리 대단한 혼처를 구했으니, 자네도 곧 좋은 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네.”

    “……감사합니다.”

    화영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다시 한번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큽.

    송하는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삼키려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도영의 시선이 슬쩍 와 닿는 게 느껴졌지만, 눈앞의 상황이 너무 고소하여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잘하셨습니다, 군대부인!

    채선은 화영의 악의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때로는 복장이 터질 만큼 착한 그녀니 국태부인의 조카가 저를 시샘한다는 생각 따위는 애초부터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화영의 악의를 모두 물리쳤다. 어디 그뿐이던가. 되로 받은 것을 말로 돌려주기까지 하였다.

    화영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유쾌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송하가 채선을 향해 빙글거리는 웃음을 건넸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속이 시원했다.

    “?”

    눈이 마주친 채선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어찌하여 송하의 기분이 갑자기 좋아진 것일까, 생각하듯이.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답을 알 수 없었던 그녀는 동그란 눈매를 반으로 접고 말았다. 이유야 어쨌든, 송하가 기분이 좋으면 그녀 역시 즐거웠기 때문이다.

    채선은 살랑살랑, 곰살맞은 바람이 부는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좋은 날에 좋은 이를 만나 좋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더없이 좋은 하루였다.

    익제에게도 오늘 하루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간이기를 바라며, 채선은 이곳에 없는 한 사내를 떠올렸다. 

    상냥한 바람이 마치 익제의 손길처럼 온화하게 그녀의 뺨을 쓸고 지나갔다. 

    ***

    “군사의 반이 당도하였습니다.”

    서탁 옆에 바짝 붙어선 원진은 아무도 없는 방을 한 번 돌아보고 나서야 다시 익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톡톡, 서탁을 두드리던 익제가 무심한 눈동자를 들었다.

    “그들의 상태는?”

    “어중이떠중이는 아닌 듯했습니다. 인애대군께서 엄선한 군사를 보낸 게 틀림없습니다. 조금만 훈련을 시키면 여차할 때 써먹기 좋을 만큼 단련되어 있었습니다.”

    “좋다. 하지만.”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익제가 잠시 침묵했다. 일순, 그의 눈동자가 선득한 빛을 띠었다. 

    그의 일변한 분위기를 눈치챈 원진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들은 인애대군의 군사다. 그것을 잊지 마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내부의 첩자를 잡지 못한 상태라 군사들은 성 밖에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지금 당장은 첩자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잘했다. 내가 명한 것들은 준비가 되었는가?”

    “예, 그렇지 않아도…….”

    원진이 막 무슨 말인가 하려던 찰나, 문밖의 하인이 인기척을 내며 다가왔다.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가 언성을 높였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익제가 원진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가 다 끝났다는 뜻이었다.

    문밖의 하인은 안에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이리로 모셔올까요?”

    “되었다. 귀한 손님께서 먼 길을 오셨는데 내가 직접 마중을 나가는 게 예의지. 손님은 어디 계시느냐?”

    다급한 기색으로 뛰어나간 익제가 복도를 빠르게 가로지르며 물었다. 

    “어이쿠.” 

    반쯤 뛰다시피 그의 뒤를 따르던 하인이 고개를 숙였다.

    “대문 앞에 계십니다.”

    익제는 서둘러 대문으로 향했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청색 포 자락이 펄럭거리며 그의 다리를 휘감았다. 

    늘 여유로운 그의 조급한 걸음에 하인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둘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무슨 일이시지? 그러게, 어디 불이라도 났나? 불이 났으면 우리가 먼저 알았겠지, 듣기로 손님께서 오셨다는구먼, 어떤 손님인데 주인님께서 저리 반색을 하시나? 난들 아나, 아주 귀한 손님인 모양이지.

    하인들 사이에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갔다. 

    그 사이, 익제는 대문에 당도했다. 호위 대여섯을 이끌고 온 비단 옷차림의 젊은 사내가 대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복숭앗빛 혈색이 감도는 곱상한 외모는 한눈에 보기에도 귀티가 났다.

    익제가 그를 향해 깍듯한 예를 갖추었다.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잘 지내셨는가?”

    “예, 도성에서 예까지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시겠습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자세한 얘기는 안에서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지.”

    익제는 그를 극진히 대우하며 자신의 처소로 안내했다. 두 사람이 지나는 동안 눈치껏 허리를 숙이던 하인들이 또다시 저들끼리 숙덕거렸다. 

    “은원군께서 저리 정중하게 대할 만한 사람이 이 땅에 있었던가?” 

    “방금 도성에서 오셨다는 말을 못 들었는가? 귓구멍 좀 잘 파고 다니시게.” 

    “내 귓구멍 걱정하기 전에 자네 귓구멍이나 걱정하게. 그나저나 도성에서 이 먼 곳까지 누가 오셨을까? 옥안이 환한 게 딱 봐도 높은 분이겠군.”

    익제는 하인들의 호기심을 모른 체하며 젊은 사내를 향해 염려가 섞인 시선을 던졌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는, 그러나 어렵지 않게 하인들이 있는 곳까지 가 닿았다.

    “호위 여섯만 데리고 오시다니, 너무 성급하셨습니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다 보니 그리되었네.”

    “허나, 매사 신중하셔야지요. 귀하신 몸이 아닙니까?”

    “허허, 내 앞으로는 조심하겠네.” 

    정체불명의 남자가 머문 시각은 고작해야 차 한 잔 마실 정도였지만, 소문은 그보다 빠르게 퍼졌다. 

    그의 정체를 추측하는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오고 갔다. 누군가는 익제의 외사촌이라 하였고, 누군가는 도성에서 온 귀한 손님이라고 하였다.

    그때, 한 사람이 그 사내를 본 적이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사내의 정체는 조금 더 은밀하고 신속하게 현림원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

    “오늘은 은원군께서 많이 바쁘신 모양이구나.”

    채선은 구름의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은 산등성이를 올려다보며 반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자의 팔각지붕이 매서운 뙤약볕은 막아주었지만,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탓에 그녀를 둘러싼 공기가 제법 뜨거웠다.

    힐끗. 

    산등성이를 헤매던 그녀의 시선이 아닌 척 후원 입구를 훔쳐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익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채선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쯤이면 익제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그녀를 만나러 오고도 남을 시각이었다. 난감해하는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슬금슬금 침상으로 끌고 갈 시각이기도 했다.

    일이 많으신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하염없이 먼 하늘만 응시하는 그녀의 모습에 송하가 빙글빙글,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채선이 그녀의 대꾸를 짐작한 듯 “그런 게 아니라!” 하고 선수를 쳤지만 송하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시침을 뚝 뗐다.

    “제가 무어라 하였습니까? 저는 입도 달싹하지 않았습니다.”

    “으…….”

    얼굴을 붉힌 채선이 시무룩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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