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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65)화 (6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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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살려, 주세요.

이래서 같이 오수를 들고 싶지 않았던 건데.

채선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으로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익제의 나른한 시선이 그녀의 손등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의 재촉하는 듯한 눈빛에 채선이 마지못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풍오를 보러 가려 하였는데.”

“풍오를? 어찌하여?”

목덜미를 더듬던 손이 그녀의 턱을 쓰다듬다가 어느새 뺨 위로 올라왔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채선의 볼을 천천히 문질렀다. 

느리게 움직이는 손끝이 그녀의 속눈썹을 간질였다. 그때마다 솜털이 곤두섰다. 

채선은 발가락에 힘을 꽉 주며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삼켰다.

“으, 지금쯤 얼굴을 보여주고 달래주지 않으면…… 금세 토라져서 하인들을 힘들게 하니까요.”

“쯧, 그놈의 어리광을 너무 받아주지 마시오.”

“어리광인가요?”

“어리광이지.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성질을 내는 게 어리광이 아니면 무엇이오?”

“그렇군요.”

채선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익제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풍오를 생각하고 있던 그녀는 부지불식간에 다가온 입술에 놀라 두 눈을 부릅뜬 채로 굳어 버렸다. 

부드러웠다.

아니, 거칠었던가.

채선은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난생처음 겪는 짜릿함과 발밑이 무너지는 듯한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그녀는 마치 바닷가에 널브러진 하찮은 모래알 같았다. 파도가 움직이는 대로 하염없이 쓸려나가는 작은 모래알.

그래서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귓불을 쓰다듬는 손길이 저릿저릿했다. 눈앞에서 별이 튀는 것 같았다.

실은 그때도 그랬다. 그와 함께 목욕을 하던 날, 그녀의 몸속에 뜨거운 불씨가 들어앉은 것처럼 뭉근한 열기가 그녀를 휘감았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죽어가던 불씨가 활활 되살아났다. 생전 겪어본 적 없는 정염이 들끓었다. 온몸이 배배 꼬였다.

때문에 채선은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녀는 화마와 같은 열기를 견디다 못해 하얀 재가 되어 버렸을 터였다.

피식, 가볍게 웃음을 흘린 익제가 천천히 손을 들어 채선의 두 눈을 가렸다. 시야가 까맣게 물들자, 그제야 더럭 겁이 났다.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감각은 지나치게 예리했고, 두근거리는 심장은 까마득한 벼랑 위에 서 있는 듯 조마조마했다.

“!”

하지만 다음 순간, 채선은 입술을 깨무는 익제의 행동에 파드득 등을 떨고 말았다. 까만 어둠 속에서 그의 감촉이 한층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의 냄새가 한층 더 짙어졌다. 숨이 점점 더 가빠왔다. 

“아…….”

채선의 잇새를 비집고 탄식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

익제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는 마치 참았던 둑이 무너진 것처럼 거칠고 조급하게 그녀를 탐했다. 

부드러운 입술이 더없이 사납게 파고들었고, 채선은 폭풍에 휩쓸린 모래 알갱이처럼 속절없이 쓸려갔다.

창밖에 쏟아지는 뙤약볕보다 뜨겁고 맹렬한 입맞춤이었다. 

익제의 나직한 한숨 소리와 함께 사라졌던 매미 소리가 다시금 귀청을 찢을 듯 시끄럽게 울렸다. 흡사 그녀의 머릿속에 매미가 들어앉아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감각이 뒤엉켜 엉망이 되었다.

“흐아.”

잠시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채선이 우는 소리를 흘렸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채선은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익제를 올려다보았다. 

그것이 난생처음 겪는 감각에 대한 혼란 때문인지, 아니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생긴 생리적인 현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채선의 동그란 눈망울에는 부연 눈물이 대롱대롱 맺혀 있었다.

하아.

익제의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살포시 채선의 입술을 닦던 그가 다시금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찰나. 

“……살려, 주세요.”

채선의 잇새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

문득, 익제가 그 자리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 동안 채선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그의 입술이 열리고 그 사이로 탁한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살려 달라. 내가 부인을 잡아먹기라도 하오?”

“하지만…….”

채선이 울상을 지으며 자신의 심장을 꽉 움켜쥐었다. 

익제는 붉게 달아오른 두 뺨과 금세라도 떨어질 듯 아롱지는 눈물, 하얗게 질린 채 파들거리는 손끝 같은 것들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숙이며 채선의 코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순순히 상체를 물렸다.

“잡아먹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은데.”

“!”

죽을 것 같다는 그의 말에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톡, 하고 터진 눈물이 관자놀이를 따라 데구르르 굴러떨어졌다. 

그녀는 방금까지 울먹이던 것도 잊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눈을 감은 익제가 그런 채선의 시선을 눈치챈 듯 조용히 입꼬리를 당겼다. 그가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으며 “잠깐 눈을 붙입시다.” 하고 말했다.

“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한참 뒤에 슬쩍 덧붙여진 혼잣말은 매미 소리에 묻혀 채선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잠시 쭈뼛거리던 그녀가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하.”

익제의 잇새에서 나직한 한숨이 터졌다. 그녀는 조금 전, 골치가 아프다는 그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문질러주면 두통이 나을 것 같다는 말도. 

이 어리숙한 인간아. 그러니 나 같은 놈한테 잡아먹히는 것이지.

속으로 그녀의 험담을 지껄이던 익제가 나른한 숨을 뱉으며 오지 않는 잠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어느새 그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

“내 조카딸이네.”

국태부인의 소개에 채선보다 두어 살 어려 보이는 여인이 그녀를 향해 다소곳하게 예를 표했다. 

채선은 여인의 아리따운 얼굴에 반쯤 넋을 잃었다. 원래도 어여쁜 외모인데, 거기에 분까지 곱게 바르니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화려했다. 이런 걸 두고 금상첨화라고 하는 모양이다. 

여인의 붉은 입술 사이로 정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군대부인.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진심으로 기쁩니다. 저는 국태부인의 오라비 되는 주대엽의 여식, 화영이라고 합니다.”

“반갑습…….”

고개를 숙이던 채선이 힐끔, 송하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뜨악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채선은 재빨리 허리를 펴며 짐짓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몇 날 며칠, 국태부인을 보며 배운 표정이었다. 

“반갑네.”

그제야 송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과 섞이지 않고 외따로 떨어져 살았던 채선에게는 군대부인으로서의 모든 것이 어색했지만, 그중에서 위계나 상하 관계가 가장 낯설었다. 

그건 제가 살던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었고,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저보다 나이 많은 이에게 하대를 해야 했고, 때로는 저보다 어린 이에게 존대를 해야 했다.

한 가령이 있었다면 잔소리깨나 들었겠구나.

채선이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국태부인이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화영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다시 그녀에게로 눈길을 주며 말했다.

“고향에 돌아왔다고는 하나, 심신이 허약하여 바깥출입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네. 실상은 이 큰 저택에 갇혀 지내는 것이나 다름없었지. 그런 내가 적적할까, 때가 되면 들러서 말벗을 해 주는 기특한 아이라네.”

“그렇습니까?”

채선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화영을 응시했다. 국태부인에게 좋은 사람이라면, 저에게도 좋은 사람이었다. 

호의가 섞인 그녀의 시선에 화영이 살포시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그러자 수줍은 물망초처럼 더없이 청초해 보였다. 

“군대부인과 비슷한 또래라 나보다 좋은 말 상대가 될 것 같아 불렀으니 편히 담소를 나누시게. 매일같이 이 늙은이 대화 상대만 하고 있을 수야 없지 않나.”

“아닙니다!”

채선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두 손을 저었다. 그녀는 국태부인을 단 한 번도 늙은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고, 그녀와 보내는 시간을 지루하다 느낀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중 어떤 것도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식은땀만 뻘뻘 흘리는 채선의 반응에 국태부인이 옅은 웃음을 흘렸다. 화영이 그런 국태부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소리 내어 웃는 그녀의 모습이 생소하다는 듯.

그때, 하녀 하나가 다가와 국태부인에게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숨 섞인 목소리를 흘렸다.

“의원이 들었다 하니, 잠시 그를 만나보고 오겠네. 날이 더워지면서 의원의 걱정이 늘었지 무언가. 그렇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도무지 들어 먹지를 않아. 나를 중환자 대하듯 하니, 이거야 원. 그럼 이야기들 나누고 있게나.”

“예.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화영이 살갑게 국태부인을 따라나서며 그녀를 방문 앞까지 배웅했다. 자리로 돌아와 앉은 그녀가 눈을 내리뜨며 침묵했다. 

어쩐지 갑자기 차가워진 듯 보이는 그녀의 낯빛에 채선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화영이 살포시 입꼬리를 당겼다. 

착각이었나? 

채선은 그녀를 오해한 것이 미안한 듯 겸연쩍은 미소를 건넸다. 화영이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성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아름답다고 하더니 그것도 다 거짓말인 모양입니다.”

“!”

그 말에 채선의 대뜸 송하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그건 도성에서 온 채선이 소문만큼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송하가 울컥하며 주먹을 움켜쥐는 찰나, 채선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자네는 도성에 가 본 적이 없는가?”

“……예.”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던 듯, 화영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도성까지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하는 먼 여정이었다. 여자 혼자의 몸으로 그 긴 여행길에 오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도성에는 연고도 없지 않은가.

“그럼 그럴 만도 하겠구먼.”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빙긋 입꼬리를 당긴 채선이 마치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도성도 사람 사는 곳이니 이곳과 크게 다르지 않다네. 그래도 확실히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기는 하더군. 일전에 은원군과 함께 도성에서 가장 큰 저자에 간 적이 있는데, 남녀 할 것 없이 마주치는 이마다 하나같이 아리따워 눈이 호강하였다네.”

자신의 빈정거림에 일말의 타격도 받지 않은 채선을 보며 화영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채선의 말간 눈동자는 그녀에게 악의가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날카롭게 치뜬 눈으로 채선을 노려보던 화영이 다시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도성에서 왔다고 잘난 체하는 그녀의 콧대를 꺾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은원군께서는 어찌하여 군대부인과 같은 분을 아내로 맞이하셨을까요? 아무리 태부 어르신의 조카라 하여도 격이 훨씬 떨어지지 않습니까. 듣자 하니, 이름도 듣지 못한 작은 섬에서 자라셨다면서요?”

“윽.”

송하가 이번에야말로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녀가 서슬 퍼런 눈으로 화영을 노려보며 무심코 한 발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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