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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수라.
익제가 그런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자, 우리도 처소로 가서 오수나 즐깁시다.”
“하지만 졸리지 않은데요?”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틈만 나면 낮잠을 자자고 하는 익제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산골 처자의 하루는 늘 바빴다. 산중은 해가 짧아 낮 사이에 모든 일을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집안일은 물론이고, 약초를 캐거나 장에 다녀오는 것까지. 그러니 채선으로서는 심심하면 낮잠을 자자고 하는 익제가 이상했다.
게다가 요즘에는 그냥 잠만 자는 것이 아니었다. 자꾸만 그녀를 끌어안고 문지르고 지분거렸다. 그럴 때마다 채선은 잠이 오는 게 아니라 천리만리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단잠에 빠진 사람을 깨울 수도 없고, 몰래 빠져나오자니 어찌나 꽉 붙들고 있는지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채선이 익제를 피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저는 풍오에게…….”
그러나 그녀가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익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의 잇새로 동정을 자아내는 가녀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성에서 보내온 일들을 처리하느라 머리가 아파서 그러오.”
“도성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채선이 한달음에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걱정스러운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구석구석 훑었다.
익제는 눈치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단속하며 한층 더 앓는 소리를 냈다.
“어디,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가지라야 말이지.”
“!”
채선은 마치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양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까지 수많은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니, 일에 파묻혀 사는 익제가 가엽기도 하고, 놀고먹는 자신이 미안하기도 했다.
“제가!”
도와 드릴 건 없느냐고 물어보려던 채선이 이내 풀 죽은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던 탓이다.
익제는 두 눈을 슬며시 내리뜨며 느린 한숨을 내쉬었다.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숫제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는 손끝으로 눈썹을 문지르며 싸늘하게 굳은 낯으로 매를 들고 오던 원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죽은 매의 다리에는 검은색 천이 묶여 있었다. 천을 펼치자, 백묵으로 적힌 글자가 보였다.
「주씨 일가 접촉. 특이사항 없음.」
주어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익제의 동향을 보고하는 내용이란 사실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주씨 일가는 익제의 외가를 의미했고, 그가 이곳에 도착하여 외숙을 비롯한 외가의 사람들을 만났다는 걸 누군가에게 알리는 내용이었다.
다시 말해,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쥐새끼가 익제의 하인인지, 혹은 국태부인의 하인인지, 그것도 아니면 제3의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굴까.”
배후로 짐작 가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익제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인애대군의 짓일 수도 있었고, 도성에서 벗어난 그를 죽이려는 광무대군의 짓일 수도 있었다. 혹은, 그 외의 황자들이나 황태자의 소행일 수도 있었다.
누구 하나 용의 선상에서 제외할 수 없었다.
“도성에서 보낸 게 아니라, 이곳에서 보내는 것이로군요.”
천 조각에 적힌 글씨를 읽던 원진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를 발견한 장소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측 하인과 호위, 국태부인의 하인, 그중 누구든 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미 그들의 처소를 떠나 후원 근방에서 발견되었으니까요.”
“매가 죽었으니 그자도 언젠가는 들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겠군.”
익제의 시선이 원진의 손에 들린 검은 새를 향했다. 원진이 매의 몸통에 박힌 화살을 단숨에 뽑았다.
아직 딱딱하게 굳지 않은 매는, 그러나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깃털 두어 개가 느릿하게 날아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연락책으로 사용하는 매가 중간에 도망가거나 죽는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미심쩍긴 해도 저희의 소행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거기서 말을 끊은 원진이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매가 이곳과 도성을 익숙하게 오간다는 얘기는 이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 그렇군. 이미 쥐새끼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고 있었다는 말이지.”
과연 어느 놈일까.
익제의 눈매가 서늘한 빛을 띠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시퍼런 예기가 흘러나왔다.
원진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오싹한 한기에 소리 없이 심호흡을 하고는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매 한 마리를 잃었다고 하여 지금까지 하던 보고를 그만두지는 않을 겁니다. 새로운 매를 이용하겠지요. 하지만 너무 광범위합니다. 수백 명에 달하는 이들을 뒷조사하는 동안에도 그자는 중요한 정보들을 넘길 겁니다. 용의자들의 수를 줄일 묘수가 있다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마지막 말은 반쯤 푸념이었다. 원진은 생각보다 복잡해진 일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묘수라.”
그의 말을 입속에서 되뇌던 익제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무감한 눈동자가 스윽, 하고 가늘어졌다.
“너는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을 준비하라.”
“의원을 부르라고 할까요?”
짧은 상념에 빠져 있던 익제가 채선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천천히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눈앞에 있는 채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불현듯,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그녀가 새똥에 맞지 않았다면, 머리 위를 나는 매 같은 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불운의 별이라.
내심 혼잣말을 중얼거린 익제가 다음 순간,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비틀거렸다. 채선이 깜짝 놀란 얼굴로 그의 한쪽 팔을 붙들었다.
“괜찮으십니까?”
“부인과 함께 오수를 즐기고 나면 좀 나을 것 같소.”
“예, 얼른 가시지요. 송하야, 잠자리를 봐주련?”
익제를 부축한 채선이 서둘러 방을 나섰다.
흰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송하와 도영이 소리 없는 한숨을 삼키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익제의 검은 속내를 모르는 건 채선뿐이었다.
“정말로 의원을 부르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이러다 혹, 큰일이라도 나면 어찌합니까?”
“부인께서 이마를 문질러 주시오. 가만 보니, 부인 손이 약손이더이다. 부인의 손만 닿으면 아프던 것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니 말이오.”
“예. 주무실 때까지 문질러 드리겠습니다.”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느냐는 듯 채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해줄 것은 없느냐고 묻는 그녀의 목소리가 차츰 멀어졌다.
서로를 마주 보며 가증스러운 얼굴을 하던 송하와 도영이 걸음을 서둘렀다.
“자, 이리 오시오.”
침상에 누운 익제가 쭈뼛거리는 채선을 향해 한 팔을 뻗었다.
채선은 선뜻 발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머뭇거렸다. 열어 놓은 창에서는 더운 바람이 들어왔으나, 가느다란 미풍은 그녀의 속눈썹도 흔들지 못했다.
익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다 부러 서운한 얼굴로 눈을 내리떴다.
“되었소. 나 혼자 눈을 붙이리다. 이깟 머리통, 깨어지면 그만이지.”
“아, 아닙니다!”
그제야 채선이 슬그머니 침상 위로 올라갔다. 송하와 도영은 이미 물러난 뒤였고, 방 안에는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남들이 보는 양 낯이 붉어졌다. 귀를 찢을 듯한 매미 소리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킬 것처럼 시끄럽게 진동했다.
“어서 오시오.”
익제가 금세 온화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채선이 그의 팔 위에 조심스레 머리를 올려놓았다.
익제가 팔을 안으로 당기자, 그녀의 몸이 속절없이 딸려갔다. 그는 한 팔로 채선의 머리를 껴안고, 다른 팔로 그녀의 허리를 둘렀다.
“오늘은 무얼 하였소?”
정말로 잠이 오는지 익제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변했다. 채선은 그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국태부인과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음…… 송하와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참, 바닷가를 거닐면서 이 지역에 사는 어부를 만났는데요, 그자가 말하기를 고래는 고등어처럼 생긴 생선이 아니랍니다.”
“하하하. 여태 고래가 고등어처럼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익제가 눈을 감은 채 웃음을 터뜨렸다. 채선이 들썩거리는 그의 가슴을 보며,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집채만큼 큰 물고기라 하시어 엄청 큰 고등어처럼 생겼나, 하고 짐작했는데 나이 든 어부가 아니라고 하지 뭐예요. 그러곤 모래사장 위에 고래 그림을 그려주었습니다. 한데, 상상과 너무 달라서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마치 커다란 배처럼 생겼어요.”
“커다란 배라.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오.”
“드넓은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이 가히 장관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이 든 어부도 이제까지 살면서 딱 한 번 보았다고 하는데, 여유로운 모습이 과연 바다의 제왕이라 불릴 만하답니다. 가끔 한 번씩 몸통을 물 위로 내밀고 등에 난 구멍으로 물줄기를 쏘아 올리는데, 그럴 때면 하늘에 무지개가 생긴다고 해요. 어찌나 신기한지, 송하와 함께 넋을 놓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조곤조곤 이어지는 채선의 말에 익제가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아마도 그녀는 채신없이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늙은 어부의 말에 쫑긋, 귀를 세웠을 것이다. 갈색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그 순간을 목도한, 얼굴도 모르는 어부가 괘씸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떤 노력도 없이 그녀의 시선을 독차지한 그가 밉살스러웠다.
늙은 어부라 하였지? 어디 사는 누구인가.
익제가 서슬 퍼런 분노를 삼키는 사이, 채선의 목소리가 시무룩하게 변했다.
“운이 엄청 좋아야 평생에 한 번, 고래를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제가 볼 수 있을까요?”
그 말은 흉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불운한 그녀에게 고래를 볼 수 있는 행운이 찾아오겠느냐는 뜻이었다.
일순, 익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가 바짝 맞붙은 그녀의 몸을 조금 더 당겨 안았다. 하나의 이음매처럼 두 사람의 사지가 빈틈없이 맞물렸다.
“내가 약조를 깨뜨릴 소인배로 보이시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채선이 꽁지에 불붙은 강아지처럼 펄쩍 뛰었다. 하지만 익제의 품에 폭삭 안긴 탓에 꼼지락거리는 데 그치고 말았다. 대신 그녀가 기대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언젠가, 꼭 같이 고래를 봐요.”
“그래, 그럽시다.”
“참. 그리고 제가 국태부인의 손님이라고 하자, 어부가 어찌나 깍듯하게 대하던지요. 민망하여 죽을 뻔하였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국태부인을 존경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채선은 금세 조곤조곤 이야기를 이어갔다. 익제의 눈매가 다시 누그러졌다.
“그랬소?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고귀한 황후가 나셨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리고 또 무얼 하였소?”
“그리고 또…….”
무슨 말인가 하려던 채선이 흠칫, 등을 굳혔다. 허리 위에 올라와 있는 손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한 탓이었다. 힐끔, 그녀가 저도 모르게 익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는 처음과 조금도 다름없는 표정으로 채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척추를 따라 슬금슬금 기어 올라가는 것은 그의 손이 아니라는 듯.
“그…….”
날개 뼈를 간질이는 손끝에 채선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익제가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그리고 또 무얼 하였소?” 하고 재우쳐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