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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63)화 (6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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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어찌하여
    아무것도 묻지 않으십니까?

    익제가 혼잣말을 삭이는데, 채선이 시무룩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로 참새 한 마리가 팔랑팔랑, 가벼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갔다. 

    저 건방진 새 새끼를 잡아다가 구워 먹을까, 삶아 먹을까. 

    음험한 속내를 숨긴 채 덩달아 고개를 들던 익제의 시선이 일순, 차갑게 식었다. 그의 눈동자는 겁대가리 상실한 참새가 아니라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창공에 머물러 있었다.

    검은 매 한 마리가 하늘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너울지는 노을 아래로 한쪽 다리에 묶인 검은색 천 조각이 맥없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괜찮소?”

    원진을 일별한 익제가 금세 온화한 눈으로 채선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의중을 눈치챈 원진이 매가 향하는 방향을 가늠하고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도영의 시선이 잠시 그의 등 뒤에 멈추었다가 도로 앞을 향했다.

    익제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

    채선은 조용히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도로록, 눈동자를 굴려 국태부인의 눈치를 살폈지만, 다행히 그녀는 별반 심기가 상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제야 채선이 긴장한 어깨를 조금 늘어뜨렸다.

    국태부인의 수많은 가르침은 마침내 모두 무위로 돌아갔고, 두 사람 앞에는 할 일 없는 긴 시간만이 남아 있었다. 

    초로록, 손바닥보다도 작은 찻잔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쥐고 차를 한 모금 마신 채선이 조심스레 잔을 내려놓았다.

    국태부인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심상한 어조로 말했다.

    “생각해 보니, 굳이 그 많은 것들을 배우지 않아도 될 성싶네.”

    “하지만…….”

    채선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국태부인이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나처럼 황궁에 있었다면야 기예가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겠지. 그곳은 수십 명의 후궁이 폐하 한 분의 눈에 들고자 치열하게 다툼을 벌이는 곳이니 말일세. 하지만 군대부인께서는 수많은 후궁과 솜씨를 겨루며 기 싸움을 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것이 정말로 배울 필요가 없기 때문인지, 혹은 끔찍한 그녀의 솜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국태부인은 그렇게 말했다.

    채선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그녀를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홍빛 꽃잎이 마치 주단처럼 아름답게 깔려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다보던 채선이 무심코 입술을 달싹였다.

    “상사화가 아름답습니다.”

    “저 꽃 이름이 상사화이던가?”

    국태부인이 두 눈을 살짝 크게 뜨며 채선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잇새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인데 한 번도 꽃 이름을 궁금해한 적이 없었군. 내가 무심하였어. ……상사화라, 이름이 무척 애틋하네.”

    “잎이 지고 난 뒤에 꽃이 피기 때문에 꽃과 잎이 서로 만날 수 없다 하여 상사화라 이름 붙여졌습니다.”

    “그런가? 꽃 하나에도 그런 사연이 숨어 있다니 신기한 일일세. 그러고 보면, 세상 만물 사연 없는 것이 없을 터인데.”

    채선은 저도 모르게 국태부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회한에 젖은 얼굴로 상사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꽃을 보는 것이 아닌지도 몰랐다. 그 너머에 있는, 채선이 모르는 그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상사화의 꽃잎처럼 서로 만날 수 없는 무언가를. 

    “국태부인께서는 어찌하여 아무것도 묻지 않으십니까?”

    그것은 생각하고 던진 물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선은 어쩌면 이곳에 온 후로 줄곧 그것이 궁금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국태부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왔다. 그녀의 눈동자가 자애로운 빛으로 물들었다. 

    채선의 잇새로 꽉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 못 하던 며느리가 하루아침에 수다스러워졌는데, 국태부인께서는 어찌하여 아무것도 묻지 않으십니까?”

    그제야 국태부인이 눈매를 반으로 접으며 웃었다. 그녀의 눈가에 희미한 주름이 졌다. 그조차 다정해 보여 채선은 저도 모르게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켜야만 했다.

    “한낱 꽃에도 사연이 있을 진데, 하물며 사람에게 사연 하나 없겠나. 자네가 말 못 하는 이의 흉내를 냈을 때는 그만한 연유가 있었을 테지.”

    “……국, 태부인.”

    모든 걸 이해하고 용서하는 그녀의 태도에 채선이 울음을 참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상했다. 그녀의 입장에서 자신의 행동은 충분히 비난할 만했고, 배신감을 느낄 만했다. 

    그런데도 국태부인은 채선을 나무라지 않았다. 사람들의 악의에 익숙했던 그녀는 타인의 자그마한 호의에도 금세 무너졌다.

    두 사람 사이에 그리 긴 시간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런데 그녀를 향한 국태부인의 신뢰와 애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마도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익제 덕분이리라, 생각하며 채선은 자신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작은 몸속에서 큰 감정이 용솟음쳤다. 채선은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감정을 삼키려 느릿하게 목울대를 울렸다.

    그때, 국태부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게다가 은원군께서 미리 서신으로 언질을 주셨다네.”

    “은원군께서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채선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자네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라, 단단히 못을 박아놓았더군. 필체가 어찌나 단호하던지 서신 앞에 은원군이 서 있는 줄 알았다네.”

    “그런……가요?”

    채선은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의 눈가가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익제가 없는 곳에서 그의 마음을 확인할 때마다 그녀는 몸속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간지러움을 느끼곤 했다. 

    더 이상 커질 수 없다고 생각한 마음은 하루가 멀다 하고 자꾸만 덩치를 부풀렸다. 익제를 향한 마음이 장마철의 보처럼 줄줄 흘러넘쳤다. 

    어쩌면 흘러내린 마음이 그녀의 걸음마다 점점이 찍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하지. 이래서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아차릴 텐데. 내가 익제님을……한다고.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선의 머리 위로 국태부인의 한숨 소리가 내려앉았다.

    “하지만 조금 아쉽긴 하네.”

    “무엇이요?”

    채선은 그녀의 한숨에 땅이 꺼지기라도 한 양 놀란 표정을 지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걱정 어린 그녀의 눈동자에 국태부인이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자네와 나누는 필담이 근래 들어 가장 즐거운 일이었는데, 그럴 수 없으니 말이야. 게다가 자네의 글 실력도 나날이 좋아져 예전 같은 당돌함이 보이지 않아 아쉽다네.”

    “……저를 놀리시는 것이지요?”

    채선이 시무룩하게 되물었다. 조용히 국태부인을 힐끔거리는 눈매가 살짝 토라졌다. 이럴 때는 국태부인과 익제가 꼭 닮았다고 생각하며, 채선은 슬금슬금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 국태부인이 “놀리다니. 그럴 리가 있나.”라고 손을 저었지만, 썩 믿음이 가진 않았다.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채선이 불현듯,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하며 화제를 바꾼 그녀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를 냈다.

    “국태부인께서는 산속에 있는 집에서 기르는 도라지가 산도라지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집 도라지라고 생각하십니까?”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국태부인이 의아한 듯 눈썹을 휘었다. 그러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고민하듯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얼마나 산중인가?”

    “아주 아주 깊은 산중입니다.”

    “흐음, 그것 참 어려운 문제로군. 아무리 집에서 키우는 도라지라고 하나, 뿌리를 내린 땅이 심심산골이라 하니 산도라지가 아니겠는가?”

    “역시 그렇지요?”

    채선이 눈을 반짝일 때였다. 방문이 열리며 익제가 들어왔다. 두 여자의 시선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익제가 두 사람에게 차례로 시선을 주곤 흔흔한 물음을 던졌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정답게 나누고 계십니까?”

    그를 향해 예를 표한 채선이 짐짓 의기양양한 태도로 어깨를 폈다. 그 모습이 꼭 잘난 체하는 풍오 같아 익제의 눈매가 의외로운 기색을 품었다.

    “국태부인께서 아무리 집에서 키우는 도라지라 하여도 그곳이 깊은 산중이면 산도라지가 아니겠냐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오던 익제가 잠시 멈칫했다. 그가 알 수 없는 눈으로 채선을 내려다보았다.

    든든한 아군을 등에 업은 채선의 기세가 사뭇 등등했다. 갈색 눈동자가 설탕에 절인 과일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피식.

    익제의 잇새에서 웃음이 샜다. 그녀의 예상치 못한 행동은 때로 그를 식겁하게 만들기도 했고, 때론 노곤하게 풀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도성에서 날아온 소식에 방금까지 날을 세우던 신경이 스르륵 무뎌지는 게 느껴졌다. 국태부인이 그런 익제의 속내를 짐작한 듯, 다정한 눈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익제가 황급히 표정을 수습하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것을 어찌 산도라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손으로 잡초를 뽑고, 거름을 주고, 살뜰히 보살폈으니, 산도라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산도라지라고 하기에는 인간의 손길이 너무 많이 닿았지 않습니까?”

    익제의 반박에 채선의 얼굴이 곧장 시무룩한 빛을 띠었다. 그녀가 도움을 요청하듯 국태부인을 힐긋거렸다. 

    국태부인의 나긋한 목소리가 그를 향했다.

    “허나, 한 가령과 연산댁이 은원군을 정성껏 돌보았다 하여 은원군께서 그들의 아이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은원군은 선황제 폐하와 저의 아이지요.”

    “…….”

    말이 막힌 듯 잠시 침묵하던 익제가 “그렇습니다.” 하고 순순히 수긍했다. 

    그제야 채선이 환하게 핀 얼굴로 함지박만 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두 눈을 반짝이며 국태부인을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에는 오롯한 존경과 경애가 담겨 있었다.

    쯧, 익제가 내심 혀를 찼다. 국태부인은 그의 생모였다. 그런데 채선이 그녀를 흠모하듯이 바라보았다는 이유만으로 심기가 뒤틀리니, 스스로도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그가 재빨리 속내를 숨기며 평연한 표정을 가장했다. 그때, 채선이 그를 돌아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그럼 산도라지가 맞는 것이지요?”

    “어머니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소.” 

    익제의 말에 채선이 질끈, 웃음을 베어 물었다. 사실, 산도라지는 그녀의 오랜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그로 인해 사기꾼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으니 여간 마음이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오해가 풀렸으니 앞으로는 두 발 뻗고 잘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 그때.

    “그보다 부인의 뒤끝이 이리 긴 줄 몰랐소.”

    익제가 뚱한 목소리로 퉁을 놓았다. 채선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두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꽃과 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생각났을 뿐입니다.”

    채선은 뒤끝이 길지 않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국태부인을 돌아보며 “그렇지요?” 하고 동의를 구했다.

    옅은 미소를 흘린 국태부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몸이 고되어 이만 누워야겠으니, 부부간에 정다운 시간을 보내세요.”

    그 말에 채선의 얼굴이 더럭, 불안한 빛을 띠었다. 수심에 가득 찬 눈동자가 국태부인의 안색을 세심하게 살폈다.

    “혹, 제가 오래 붙잡고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닐세. 나야말로 즐거운 시간이었네. 이제 오수에 들 시간이 된 것뿐이니 그런 얼굴 하지 말게. 늙으면 잠이 많아지는 법이거든.” 

    “예. 살펴 가십시오.”

    채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녀의 부축을 받고 나가는 국태부인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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