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그렇게 나를 연모해 주시오.
후원이 가까워질수록 익제의 낯빛이 묘하게 변했다. 삐이익, 삑, 알 수 없는 날카로운 소음이 하늘을 찢었다. 갈 곳을 잃은 애매한 시선이 먼 산을 향했다.
그곳은 저택에서 녹음이 가장 우거진 장소였다. 평소에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새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삐이익.
그 괴상한 소음은 후원 한가운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는 그곳에 있는 정자에서.
익제의 시선이 팔각정에 닿았다.
정자 난간에 걸터앉은 채선이 대금을 삑삑 불어 대고 있었다. 마음 같지 않은 듯 그녀의 얼굴이 점점 울상으로 변했다.
옆에 있는 송하는 그녀 몰래 귀를 틀어막았고, 도영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한 채 하릴없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흠.
초보자라는 사실을 감안해도 썩 훌륭한 솜씨는 아니었다.
하지만 익제는 빙긋, 웃음을 베어 물며 곧장 그곳으로 걸어갔다. 귀청을 찢을 듯한 소음도 계속 듣다 보니 조금씩 익숙해지긴 했다.
“역시 대금도…… 안 되겠지?”
채선의 침울한 물음에 송하가 슬그머니, 귀를 막았던 손을 떼고는 난처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웬만해서는 잘했다, 최고다, 치켜세워 주는 그녀도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짝짝짝.
“훌륭하오.”
등 뒤에서 날아든 목소리에 채선이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귀신처럼 기척 없이 다가오는 익제의 행동에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를 흘겨보려던 채선은 뒤늦게 익제가 자신의 조악한 대금 연주를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쥐구멍은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 대금을 잡았는데 소리를 낼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하오.”
“처음이 아니라, 사흘째인데요.”
“……사흘째인데 그 정도 소리를 내다니, 참으로 대단하오.”
익제가 잠시 틈을 두고 말을 정정했다. 채선이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힐끔거렸다. 불신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를…… 놀리시는 것이지요?”
“그럴 리가 있겠소? 내 요 며칠, 도성에 두고 온 일들을 처리하느라 분주하여 부인께서 배운 것들을 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때마침 부인의 대금 연주를 듣게 되었으니 어찌 아니 기쁘겠소?”
“연주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채선이 우울한 낯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애꿎은 대금만 쥐어짰다.
익제는 그 모습을 좋아했다. 자신의 한마디에 울고 웃는 그녀의 모습을.
문제는 다른 사람의 한마디에도 울고 웃는다는 거다. 그 꼴은 도저히 봐 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볼 때면 속에서 천불이 들끓었다.
저놈의 소심한 성격을 뜯어고치든지 해야지, 원.
험한 속내를 숨긴 익제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곁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잠자코 있던 도영이 불쑥, 입을 열었다.
“부인, 은원군께 한 곡조 연주해 달라고 부탁해 보십시오. 주군께서 대금 연주에 일가견이 있으십니다.”
그 말에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마치 진짜냐고 묻는 듯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익제가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기대에 찬 그녀의 얼굴을 보니, 차마 안 된다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슬쩍, 도영을 노려본 그가 쓴웃음을 흘리며 채선의 손에 들린 대금을 가져갔다.
“오랜만에 잡는 대금이라 제대로 소리가 나올지 모르겠소.”
“그래도 저보다야 잘하시겠죠.”
그걸 말이라고.
익제가 혼잣말을 삼키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가만히 눈동자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그럼 내가 한 곡조 연주할 테니, 부인께서는 어머니에게 배운 춤사위를 보여 주시오.”
“춤……사위요?”
채선의 눈매가 대번에 의기소침한 빛을 띠었다.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목소리가 흩어지는 연기처럼 희미했다.
“춤이라고 할 만큼 배운 게 없습니다. ……국태부인께서 몇 동작 가르쳐 주시다가 금세 포기를 하셨거든요.”
큽.
익제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도대체 잘하는 게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하지 않을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그간 배운 동작만이라도 보여 주시오. 혼자 연주하려니 머쓱하여 그렇소.”
“하지만…….”
“대금 연주도 들려주었는데 춤사위라고 못 보여줄 연유가 무엇이오?”
“……예.”
그 말은 실상 그 끔찍한 대금 솜씨보다야 낫겠지, 라는 뜻이었지만 채선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익제가 입술 위로 대금을 가져가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치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매끈한 피리 소리가 흘러나왔다. 깨끗한 그 음률은 채선의 것과 달리 한 치의 막힘도 없이 유유히 흘러갔다.
“!”
채선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부릅떴다. 청아하고, 애틋한 대금 소리가 붉게 노을 지는 하늘 위로 산산이 부서졌다.
낮은음은 더없이 애절했고, 높은음은 더없이 청명했다. 그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곡조를 뽑아냈다.
게다가 대금을 부는 익제의 자태는 또 어떠한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수려했다. 그래서 채선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 익제가 눈을 떴다. 채선의 표정을 보던 그의 눈매가 불현듯, 유쾌한 기색을 띠며 얄팍하게 휘어졌다.
그렇게 나를 연모해 주시오.
더.
더.
더 많이.
익제가 채선을 향해 가만히 눈짓을 했다. 어서 춤을 추지 않고 뭐 하냐는 재촉이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가 머뭇머뭇,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선은 다시 한번 눈동자를 굴려 익제의 기색을 살폈다. 이제라도 그 말을 물려주지 않으려나, 하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서.
익제가 소리 없이 눈빛만으로 또 한 번 그녀를 다그쳤다.
하아.
결국 한숨을 내쉰 채선이 할 수 없다는 듯 두 팔을 들었다.
이 아름다운 대금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건 그의 연주를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국태부인에게 배운 동작을 떠올리며 느릿느릿 몸을 움직였다.
“…….”
두 팔은 어색하게 허공을 갈랐고, 두 다리는 갈 곳을 잃은 채 주춤거렸다. 긴장한 몸은 각목처럼 뻣뻣했고, 다음 동작을 생각하는 표정은 더없이 딱딱했다.
한 마디로 우스꽝스러웠다는 말이다.
그러나 익제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입으로는 대금을 불며, 눈으로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았다.
몇 동작 보여주지 않았는데 벌써 배운 게 동났는지, 그녀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그 순간, 채선이 문득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익제의 눈썹이 슬쩍 휘어지는 찰나, 그녀가 그 자리에서 팽그르르 돌았다.
짙은 녹색 치마가 펄럭이며 한여름의 잎사귀처럼 싱그럽게 피어났다. 이울어진 붉은 햇살이 그녀의 뺨 위에 길게 내려앉았다.
“!”
익제는 홀린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투박하고 서툰 몸짓에 차갑게 굳어있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춤은 보는 이의 눈을 현혹시키진 못했지만, 보는 이의 마음을 앗아갔다. 올곧게 부딪히는 그녀처럼 솔직한 춤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쿠당탕.
“으앗!”
채선이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혼자 발이 꼬여 나자빠졌다.
“부인!”
익제가 대번에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함부로 내팽개쳐진 대금이 바닥을 데구르르 굴러갔다. 그가 다급하게 채선의 상체를 안아 들었다.
그녀가 그의 품 안에서 몸을 축 늘어뜨리며 웩웩, 헛구역질을 했다.
“……어지러워요.”
하, 익제의 잇새에서 의미 모를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안도 같기도 했고, 어이가 없는 것 같기도 했으며, 혹은 허탈한 것 같기도 했다.
옆에 있던 송하가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다가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국태부인께 춤을 배우실 때도 지금과 꼭 같으셨습니다. 돌 때마다 넘어지시니, 국태부인께서 굳이 춤은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춤을 배우기 전에 뼈가 부러지든, 바닥이 무너지든, 둘 중 하나는 사달이 날 것 같다구요.”
그 말에 채선은 호된 꾸지람을 들은 아이처럼 풀 죽은 기색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힐끔, 익제의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가 혹 그가 실망하지는 않았나, 걱정하는 듯했다.
익제가 그런 그녀를 덥석, 안은 채로 일어났다.
“앗! 괜찮습니다. 내려 주십시오. 이제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다 귀한 부인의 몸에 상처라도 나면 나만 손해요. 그러니 얌전히 있으시오.”
그의 단호한 거절에 채선이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익제의 품에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묻었다.
귀하게 자라지 않은 그녀는 이처럼 융숭한 대접을 받을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지곤 했다. 그래서 채선은 그의 옷깃을 가만히 그러쥐었다.
언뜻, 익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자에서 내려온 그가 성큼성큼, 자신의 처소를 향해 성마른 걸음을 내디뎠다.
“며칠 전, 이곳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산제비나비 같았소.”
“……위로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제가 춤을 못 추는 건 알고 있습니다.”
“거짓말이 아니오. 내 눈에는 정말로 그리 보였소.”
채선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지만, 그 말을 믿는 기색도 아니었다.
그러나 익제는 진심이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눈에 콩깍지가 쓰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춤사위가 더할 나위 없이 서툴고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그는 그보다 훨씬 아름답고 훌륭한 춤을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녀만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심장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혹은, 반대로 시커먼 음심이 솟아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채선을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생각보다 작고 연약한 몸이었다. 이대로 힘을 주면 뚝 하고 부러질 것처럼.
“…….”
그래서 조바심이 났다. 행여 이 작은 몸이 상하기라도 할까 봐, 그답지 않게 안절부절못하고 애가 탔다. 누군가 억센 손으로 심장을 움켜쥐는 것처럼 가슴이 꽉 죄어오기도 했다.
그것은 불안함과도 닮았고, 초조함과도 닮았으며, 한편으로는 두려움과도 닮았다.
“정말이오. 아니면 나 말고 잘 보여야 할 사람이 또 있소?”
익제가 나직하게 물었다. 그의 눈매는 다정했지만, 채선은 왠지 모를 한기가 느껴져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있다고 대답하면 익제는 웃는 낯으로 그자의 목을 조를 것 같았다.
“아니요. 없습니다.”
채선이 그렇게 대답하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붉은 노을이 마지막 꼬리를 드리웠다. 익제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앞을 바라보는 순간.
“윽.”
채선이 침울한 신음을 흘렸다.
“왜 그러시오?”
그가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일순,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
눈치 빠른 송하가 다가와 그녀의 머리에 묻은 새똥을 닦아 주었다.
익제의 품에 안겨 있는데도 그녀만 새똥을 맞았다는 게 신기하다 못해 대단할 지경이었다. 아니, 그보다 눈을 떼자마자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게 더 희한했다.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로군. 이래서야 한시라도 눈을 뗄 수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