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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61)화 (6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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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군사라니요?

익제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삼켰다. 여기서 웃었다가는 소심한 채선이 한동안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리란 사실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좀 더 운이 나쁘면 제 그림자만 보여도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칠 것이다.

익제가 다시 도영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도영이 찌푸린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저었고, 그녀의 뒤에 선 송하가 소리 없는 한숨을 삼켰다. 전혀 가망이 없는 솜씨인 모양이었다.

그런 그들의 소리 없는 대화를 알 리 없는 채선이 한층 더 침울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국태부인을 뵐 면목이 없어서…….”

“굳이 악기를 배워야 하오?”

근원적인 물음에 채선이 슬그머니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하지만 도성의 신분 높은 부인들은 악기 두세 가지쯤은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흠.”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하던 익제가 말을 이었다. 그의 잇새로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듯 다정한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그야 좋은 혼처를 찾기 위해 배울 수 있는 건 모두 배웠겠지. 하지만 부인은 이미 나와 혼인을 하였으니 상관없지 않소? 이제 와 어떤 놈에게 들려주려고 악기를 배울 것이오?”

“……그럴까요?”

채선이 ‘어떤 놈’이라는 저열한 말투를 모른 체하며 눈을 반짝였다. 익제가 그녀를 안심시키듯 온화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니 부인께서 딱 즐거울 정도로만 하시오. 악기 연주를 못 한다고 소박맞을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되니 말이오.”

“하지만…….”

채선이 말끝을 흐리며 힐끔, 눈동자를 들었다. 익제의 눈치를 살피던 그녀가 조심스레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시를 짓기는커녕 당최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는데요.”

익제가 또다시 도영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괜찮소.”

“글도 아직 한참 멀었구요.”

“차차 나아지고 있으니 괘념치 마시오.”

“실은, 그림에도 전혀 소질이 없어요.”

“……괜찮소.”

“춤도요.”

“그 역시 괜찮소.”

채선은 하나도 괜찮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녀가 툭 어깨를 떨구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국태부인께서 이들 중 하나만 특출나게 잘하면, 다른 것들은 못 해도 상관없다 하셨는데……. 하나도 잘하는 것이 없습니다.”

“음.” 

익제가 난감한 침음을 흘리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녀를 구슬릴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대꾸할 말을 찾은 익제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침묵을 깨뜨렸다.

“대신 부인은 식물을 잘 기르지 않소? 하인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황폐하던 땅이 부인의 손을 거치자 아름다운 도라지꽃밭으로 변하였잖소.”

“하지만 그건 신분 높은 부인이 할 만한 일은 아니잖아요.”

“요리와 바느질도 잘하였던 것 같은데?”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던 것이지, 잘한다고 할 만한 솜씨는 아닙니다.”

“게다가 나무도 잘 타지 않소? 나는 나무를 타고 담장을 넘어 도망을 갔다는 부인들의 얘기는 듣도 보도 못하였소.”

“……저를 놀리시는 것이지요?”

채선이 그녀답지 않게 뚱한 표정으로 익제를 흘겨보았다. 

그 또한 즐거웠다.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한 손을 뻗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채선의 얼굴을 감쌌다. 채선이 그 손바닥에 자신의 뺨을 살짝살짝 비볐다.

그녀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익제의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그건 경계심 많은 어린 짐승이 마침내 제게 살을 문지르는 것과 같은 벅찬 감정의 파고였다. 

그는 이대로 그녀를 덥석 껴안고 싶었다. 제품에서 도망가지 못하게 꽉 끌어안고서 그녀의 살갗을 잘근잘근 깨물고 싶었다.

그와 동시에, 이럴 때일수록 신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칫하다간 한발 다가온 어린 짐승이 두 발 달아나는 수가 있었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부인이군.

익제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대수롭지 않은 척 뒷말을 이었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뺨을 슬금슬금 문질렀다.

“그럴 리가 있겠소? 자, 그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 나와 함께 오수나 즐깁시다.”

“잠이 안 오는데요.”

채선이 말똥말똥한 두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차를 마실까? 아니면, 산책?”

“음…….”

“그것도 아니면 글공부를 하는 게 좋겠소?”

“산책하고 싶습니다! 바다를 보고 싶어요!”

채선이 언제 뜸을 들였냐는 듯 얼른 대답했다. 

방금까지 국태부인에게 시달리다 왔는데 또다시 공부를 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머리에 쥐가 난다는 표정으로 진저리를 쳤다.

조용히 웃음을 삼킨 익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거기서 잠시만 기다리시오. 내 금방 나가리다.”

그렇게 말한 익제가 창에서 몸을 물리고 방문으로 걸어갔다. 원진이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익제가 한순간에 일변한 표정으로 냉정하게 물었다.

“인애대군이 보낸 군사들은 언제 당도한다고 하더냐?”

“사흘 뒤부터 열흘에 걸쳐 도착한다고 합니다.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움직이면 눈에 띌 것을 우려하여서 조심하는 모양새입니다.”

‘풍주에서 여름을 난다고 하였지? 그곳에서 자네가 날 위해 해 줄 것이 있네.’

인애대군의 병문안을 갔던 날, 그가 익제의 손을 잡으며 간절하게 당부했다.

익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눈을 피해 군사를 모아주게.”

“군사라니요?”

익제의 경악성에 인애대군이 “쉿.” 하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는 아무도 없는 방안을 한 번 둘러보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도성에 둘 수 있는 사병의 수는 제한되어 있지 않나. 만에 하나, 나를 위해 움직일 병사가 필요하네. 그러나 내 일거수일투족은 누군가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겠지. 군사를 움직였다가는 반역죄로 처형당할 걸세.”

“그런데 어찌 제가?”

익제가 두려운 표정으로 반문했다. 인애대군이 괜한 말을 했다는 듯 낮게 혀를 차며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자네는 황자들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가. 도성을 떠나 유유자적하게 지내는 자네를 눈여겨 사람은 없을 걸세. 그러니 그곳에서, 아무도 몰래 나를 위한 군대를 키워주게. 내 물심양면으로 모든 것을 지원하겠네.”

익제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인애대군이 안달한 표정으로 바짝, 그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제발, 내 이리 간절히 부탁하네. 자네 말고는 믿을 이가 없어서 그러네. 정체 모를 괴한에게 화살까지 맞았는데, 내 이제 와 누구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자네는 내가 죽어 나자빠지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

바닥을 내려다보던 익제가 몰래 입꼬리를 당겼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찰나였을 뿐, 금세 표정을 수습한 그가 난감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어찌 인애대군의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고맙네. 고마워. 내 이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네.”

인애대군이 익제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눈동자에 굳은 신뢰가 엿보였다. 인애대군은 익제의 마음이 변할세라 서둘러 입을 열었다.

“군사는 내가 보내겠네. 그들을 먹이고 입히며 재울 돈도 보내지. 자네는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네. 그저 그들이 묵을 곳을 내어주고, 기강이 해이해지지 않도록 관리만 해 주면 되네. 결정적인 순간, 도성으로 달려올 수 있도록.”

마치 어리석은 이를 꾀듯 달콤한 목소리였다.

“까딱하면 목이 달아날 판에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니. 이기적인 작자 같으니라고.”

냉소를 흘리던 익제가 저만치 서 있는 채선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눈이 마주친 그녀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환한 웃음을 돌려주었다. 잇속이나 이해타산 없이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 깨끗한 웃음이었다.

익제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녀의 미소를 빤히 응시했다. 

뱃속에 칼을 숨긴 이들의 음험한 속내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친밀한 미소를 띠고 있단 한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알 수 없는 건 채선이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대신 연못에 빠지는 행동 같은 건 더더욱. 

그래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

멀뚱멀뚱 서 있는 그의 모습에 채선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얼굴 가득 머금고 있던 웃음이 사라지고 대신 의아한 표정이 자리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시나, 그녀의 눈매가 걱정을 품기 시작할 때.

“걸어서 가시겠소?”

익제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입매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다감한 빛을 띠었다. 그제야 채선이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익제는 수줍은 듯 소매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채선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자신보다 타인을 더 귀하게 여기는 삶 따위는 한 번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그녀가 자신을 해하지 않을 것임은 알고 있었다. 

살얼음판 위를 걷듯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연명하는 익제에게는 그것만으로도 크나큰 위로였다. 계산할 필요 없이 온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장소.

맹렬한 여름 햇살이 두 사람의 등 뒤를 끈질기게 쫓아왔다.

***

방으로 들어서던 익제가 문득,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방안을 훑었다. 채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익제가 생각에 잠긴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도영으로부터 마지막 보고를 받은 것은 이각 전이었다. 그녀가 처소로 돌아와 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방 안에는 채선이 없었다. 그가 찌푸린 표정으로 돌아서는 찰나.

“주군.”

호위 하나가 막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채선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도영을 대신해 그의 말을 전하는 호위무사였다. 그가 살짝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조아렸다.

“집무실에 계신 줄 알았습니다.”

아마도 길이 엇갈린 모양이었다. 익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다그쳤다.

“부인은 어디 계시느냐.”

“대금을 가지고 후원으로 가셨습니다.”

“대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단어의 등장에 익제의 미간이 좁아졌다. 호위가 한층 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현악기보다는 대금이 좀 더 수월해 보인다며, 연습을 하겠다고 후원으로 가셨습니다. 이곳에서는 여러모로…… 민폐가 될 것 같다고 하시며.”

포기를 한 게 아니었던가.

역시 그녀의 머릿속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그게 싫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껏 익제의 주변에 없던 부류의 인간이었다.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선함과 상대의 저의를 의심하지는 않는 올곧음.

문제는 그런 성격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거다. 이곳은 그녀가 지금까지 살던 세상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찰나의 방심과 어리숙한 믿음이 생사를 가르는 곳.

“그렇다면.”

익제의 입꼬리가 씩, 하고 올라갔다. 

“피는 내 손에 묻히면 그만이지.”

나직한 혼잣말을 중얼거린 익제가 후원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그의 조급한 뒷모습을 보던 원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군대부인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조바심을 내는 그가 이상하다는 듯.

물론, 한 번 도망간 적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실패하지 않았던가.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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