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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60)화 (6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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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그대가 보는 세상.

    이백중은 돌아서는 익제를 웃는 낯으로 배웅했다. 

    선황제와 꼭 닮은 그는, 그러나 선황제와 전혀 달랐다. 그는 선황제처럼 병약하지도 않았고, 유약하지도 않았으며, 순진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가 또 한 번의 피바람을 몰고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어떠한 예감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백중의 눈매가 묘한 기색으로 일렁거렸다. 그것은 안타까운 듯 보이기도 했고, 걱정스러운 듯 보이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흥분된 듯 보이기도 했다.

    그는 다시 한번 익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살펴 가십시오.” 

    말 위에 오르던 익제의 시선이 잠시 가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저 곰 같은 여우를 움직인 건 나인가, 그녀인가.

    그의 상념이 깊어지려는 찰나, 행렬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수행하는 하인들이 수십 명에, 호위는 그 두 배가 족히 넘었다. 

    그들의 행차를 구경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고개를 빼고 요리조리 기웃거렸다.

    익제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말을 몰았다. 풍오 역시 고개를 한껏 쳐들고 기세등등한 태도로 걸음을 내디뎠다. 다각다각, 유난히 풍오의 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오만한 그의 말은 사람들의 관심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등 뒤의 마을이 멀어졌다.

    익제가 기다렸다는 듯 말에서 내려 가마 옆으로 걸어갔다. 한 손으로 비단 천을 걷은 그가 다정한 눈으로 가마 안을 들여다보았다.

    “부인.” 

    채선은 보는 눈이 없는데도 마치 벌이라도 서듯 허리를 바짝 세우고 앉아 있었다. 그것이 몹시 그녀다웠다. 

    익제는 뺨을 쓸고 지나가는 한낮의 바람만큼이나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나와 함께 말을 타고 가시겠소?”

    그 순간, 채선의 눈이 반짝였다. 송하가 눈치 빠르게 가마꾼들을 멈춰 세웠고, 채선은 익제의 품에 안겨 풍오의 등에 올라탔다. 흥, 풍오가 한층 더 기세등등한 태도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의 등 뒤에 앉은 익제가 고삐를 바투 쥐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얘기를 해 보시오.”

    “무슨 얘기를요?”

    채선이 힐긋 눈동자를 돌렸다. 익제의 숨결이 그녀의 귓불을 간지럽혔다. 채선은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라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그대가 보는 세상.”

    “제가 보는 세상이요?”

    “부인 눈에 어떤 것들이 보이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내게 얘기해 주시오.”

    채선이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저 멀리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익제님이 보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요.”

    “다를 것이오. 무척.”

    그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혹, 눈이 다 낫지 않으셨나요? 시력이 나빠지셨다던가……?”

    제 딴에는 가장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한 채선이 염려 가득한 눈으로 익제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금세 울상을 지었다. 익제가 불쌍하고 가여워 어쩔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입술을 앙다문 그녀가 짐짓 평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까지 비가 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푸른 하늘이에요. 저 구름 좀 보세요. 몽실몽실한 게 꼭 이불 속에 누빈 솜 같지 않습니까?”

    “그렇군.”

    “사실 예전에 익제님께서 하루가 멀다고 이불에서 땀 냄새가 난다며 잔소리를 하시는 바람에 매일같이 이불 빨래를 하느라 조금 힘들었습니다.”

    느닷없이 아픈 곳을 찔렸다. 익제는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제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기고 싶다고 생각하며 애처로운 목소리를 쥐어짰다. 

    “부인께서도 알다시피, 그때는 내가 몸이 좋지 않아…….”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경이 예민해지셨지요? 음……, 구름이 아주 빨리 움직이는 걸 보니, 곧 바람이 강해질 모양이에요. 앗, 저기 저것 좀 보세요. 저쪽이요.”

    채선이 들뜬 목소리로 손가락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웅덩이에서 물을 빨고 있는 나비 수십 마리가 보였다. 

    은은한 광택이 도는 청록색 날개를 접은 자그마한 나비였다.

    “산제비나비예요. 주로 산이나 계곡에서 볼 수 있는데, 산신령나비라고도 불리거든요. 왜 산신령나비라고 불리는지 아세요?”

    “왜 그렇게 불리오?”

    익제는 조곤조곤 이어지는 채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와 같은 세상을 보았다. 그것은 하오의 여름처럼 눈을 뜨지 못할 만큼 찬란하고 눈부신 세상이었다.

    ***

    국태부인은 누구보다 반갑게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채선은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얼굴이 이전보다 수척해져 저도 모르게 울상을 짓고 말았다.

    “서신에서는 건강하다고 하셨는데…….”

    “날이 더우면 이상하게 입맛이 없어 살이 내린 것뿐이니 걱정할 것 없네. 보기엔 그리 안 보이지만, 이래 봬도 내가 몸에 열이 많다네.”

    그 말에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은원군께서 국태부인을 닮으셨나 봐요. 여름만 되면 냉차를 찾으시거든요. 그러다 탈이 난다고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지만 도통 듣지를 않으세요.”

    마치 고자질 같은 그 말에 옆에서 냉차를 마시던 익제가 슬그머니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아들을 돌아보던 국태부인이 쓴웃음을 흘렸다.

    “그런가. 나는 은원군께서 몸에 열이 많은 줄도 몰랐네.”

    그것은 어릴 적부터 떨어져 지낸 두 사람의 관계를 대변하는 말이었다. 어쩌면 남보다 못한 실낱같은 인연. 

    지금에서야 채선을 핑계로 몇 번이나 얼굴을 보았지만, 예전에는 일 년에 한 번도 보지 못하는 날들이 수두룩했다.

    그녀의 울적한 표정에 채선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 별안간 큰소리로 외쳤다.

    “제가 알려 드릴게요!”

    국태부인의 시선이 채선을 향했다. 그녀는 국태부인의 가느다란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뼈가 앙상한 마른 손등에 온기가 스몄다.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은원군께서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하는지 제가 다 알려 드릴게요.”

    그 말에 국태부인이 빙긋, 입꼬리를 당겼다. 그녀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고맙네. 그럼 나는 무엇을 알려주어야 하나. 어디 보자…… 글을 알려 드릴까?”

    흠칫, 채선의 등이 긴장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도로록, 굴러갔다. 그러곤 잡고 있던 국태부인의 손을 슬그머니 놓았다.

    그때, 익제가 노곤하게 풀어진 목소리로 나직한 한마디를 던졌다.

    “부디 제 즐거움을 빼앗지 말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국태부인은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더없이 따스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마 이제까지 익제와 함께 한 날들을 꼽으면 채 일 년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도성을 벗어날 수 없었고, 그녀는 이곳을 벗어나 고된 여행길에 오를 수 없었다. 

    그래서 익제는 그녀의 아픈 손가락이었고, 누구보다 애틋한 아들이었다. 

    한참 익제를 응시하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채선을 바라보았다.

    “그럼 나는 글 외의 모든 것을 알려 주겠네.”

    “……글 외의, 모든 것이요?”

    채선이 시무룩한 얼굴로 되물었다. 공부 시간이 늘어나는 건 딱히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특히, 어려서부터 책만 펴면 도망을 다니던 그녀에게는. 

    “군대부인이라면 알아야 할 것들이지.”

    “……예.”

    결국 채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자신이 군대부인으로서의 자질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익제가 축 처진 그녀의 어깨를 보며 몰래 웃음을 베어 물었다.

    ***

    삐이익.

    마치 새의 울음 같은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공을 맴돌던 매가 수직으로 낙하했다. 

    땅에 부딪히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대지 위로 날아오른 매가 수평으로 비행하더니 곧장 창문턱에 내려앉았다.

    새카만 매는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었다.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낯선 방안을 기웃거렸다. 

    창가로 걸어간 원진이 매의 한쪽 다리에 묶인 종이를 풀었다. 그리고 자그마한 고기 한 덩어리를 손바닥 위에 올려 두었다.

    순식간에 고기를 낚아챈 매가 하늘 위로 비상했다. 울창한 나무 이파리 너머로 사라지는 매의 뒷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원진은 걸음을 돌렸다.

    서탁 앞에 앉아 있던 익제가 원진이 내민 종이를 받아 들었다. 서신에 적힌 내용은 몹시 간결했다.

    「문효. 화살. 부상. 불명.」

    익제가 원진에게 서신을 건넸다. 뒤늦게 거기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그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도성에서 벌어진 사냥제는 이레간 이어진다고 하였다. 이백중의 저택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걸린 시일과 매가 날아오는 데 걸린 시일을 따지면, 지금쯤 사냥제는 막을 내렸을 것이다.

    “문효대군이 화살에 맞았으나 죽지는 않았다. 화살을 쏜 자의 정체는 알 수 없다, 는 뜻이군요.”

    원진의 말에 익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냥이다. 하인들은 짐승들을 풀고, 개들은 사냥감을 몰며, 대군들은 활을 쏘았을 것이다. 그 와중에 수풀 속에서 주인을 알 수 없는 화살 한 대가 날아온다 한들 썩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냥이란 명목하에 정적을 암살하는 일이야 고리타분할 만큼 뻔한 수법이 아니던가. 

    “자세히 알아보라 지시할까요?” 

    고개를 끄덕이던 익제가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열린 창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던 탓이다. 

    아니나 다를까, 종알종알 떠들어대는 송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옆에서 채선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인 채 타박타박, 힘없는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알아볼 수 있으면 알아보되, 굳이 꼬리를 잡힐 필요는 없다. 적당한 선에서 처리하라고 전하라.”

    “예.”

    싸늘하게 뇌까린 익제가 입가에 다정한 미소를 띠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걸어간 그는 방금 전 매가 내려앉았던 문턱에 두 팔을 걸쳤다.

    “어찌하여 부인의 얼굴이 수심에 젖었소? 어머니께 호된 야단이라도 맞으셨소?”

    갑자기 날아온 목소리에 깜짝 놀란 얼굴로 걸음을 멈춘 채선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창가에 서 있는 익제를 발견하고는 꽃이 피듯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그녀의 눈꼬리가 아래로 쳐졌다. 익제가 힐긋, 그녀의 등 뒤로 시선을 던졌다. 

    도영으로부터 그녀가 국태부인에게 악기를 배우고 있다는 보고는 받았다. 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걸 보니, 아마 악기 연주가 뜻대로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채선이 타박타박, 풀을 밟으며 창가로 걸어왔다. 창문 앞에 선 그녀가 의기소침한 눈으로 익제를 올려다보았다. 

    익제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채선이 알면 기겁할 말이지만, 사실 그는 그녀의 시무룩한 표정을 꽤 좋아했다.

    “아닙니다. 국태부인께서는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으시고,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그저?”

    창 하나를 두고 마주 선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익제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제 솜씨가 너무…….”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채선이 떨구었던 고개를 불쑥, 쳐들었다. 그리고 사뭇 억울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도무지 음의 차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다 거기서 거기 같습니다. 물론, 국태부인께서 연주하시는 음률은 천상의 소리처럼 아름답지만, 제 손끝에서 튕기는 현은 그 소리가 그 소리인 것 같습니다!”

    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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