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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59)화 (5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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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언제까지
    손가락만 빨게 할 것이오.

    물을 채우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나.

    채선은 그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슬금슬금 엉덩이를 움직였다. 그리고 익제의 반대편 벽에 등을 딱 붙이고 앉았다. 익제를 마주 보는 자세로 무릎을 끌어안은 그녀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홧홧한 불길이 이는 듯했다. 물속에 들어앉아 있는데도 지독한 갈증이 치밀었다. 

    자신의 속내를 들킬까, 숨도 크게 쉴 수 없었다.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아슬아슬했다.

    그 순간, 익제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

    채선은 크고 단단한 그의 손바닥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눈매를 구부린 익제가 더없이 온화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누가 보면 남인 줄 알겠소. 자, 이리로 건너오시오.”

    “어디로…….”

    채선의 망연한 물음에 익제가 자신의 두 다리를 벌렸다. 그가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가랑이 사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때마다 참방참방,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

    채선은 얼음처럼 새파랗게 굳었다. 

    그녀의 목덜미가 발긋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귓불과 두 뺨, 눈 밑까지도 울긋불긋해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울 듯이 촉촉하게 젖었다. 

    익제는 그 모습을 유쾌하게 지켜보며, 어떤 흑심도 없다는 듯 그저 상냥하고 친절한 얼굴을 가장했다.

    그녀가 둘 곳 없는 시선을 떨구며 밭은 숨을 뱉었다.

    “아, 아니, 저는 여기에…….”

    “또다시 한기가 들어 그러오. 내게 부인의 온기를 나눠주지 않겠소?”

    “읏.”

    가여운 표정으로 턱을 덜덜 떠는 익제의 모습에 채선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흐엣취.” 

    그가 거창하게 재채기를 했다. 채선은 마치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 같은 얼굴로 덥석, 익제의 손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

    익제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첨벙.

    정신을 차린 채선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눈 깜짝할 사이, 그의 품에 안겨 있었던 탓이다. 

    그녀의 몸이 각목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익제가 그녀의 허리를 바싹, 당겨 안았다. 

    “어…….”

    무너지던 자세 그대로 그의 가슴에 뺨을 기대고만 채선이 조금씩 몸을 뒤척였다. 

    젖은 천 너머로 맞닿는 살갗의 감촉이 몹시 적나라했다. 생각보다 다부진 그의 몸에 채선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눈동자만 연신 데굴데굴 굴려댔다.

    대관절 언제 숨을 쉬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했던 일들이 그를 의식한 순간, 세상에서 가장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 되었다. 

    하녀들이 표정 없는 얼굴로 다가와 욕조 안에 따뜻한 물을 부었다. 한 김 식어가던 물이 다시금 더운 열기를 품었다.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것이 뜨거운 열탕 때문인지, 혹은 맞닿은 그의 살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익제가 서서히 무너지는 채선의 몸을 추슬렀다. 그녀는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아 익제의 가슴에 등을 기댔다. 단단한 두 팔이 허리를 감싸고 있어 도망갈 틈조차 없었다.

    힐끔, 채선이 저도 모르게 하녀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얼굴은 언젠가 보았던 노을보다도 더욱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필요하면 부를 테니 다들 물러가라.”

    익제의 명에 하녀들이 고개를 숙이며 줄줄이 방을 나섰다. 

    욕조 안에 꽃잎을 뿌리던 송하도 하던 일을 멈추고 걸음을 돌렸다. 힐긋, 방을 나서기 직전 송하가 채선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

    왜 자꾸만 늑대에게 잡아먹히려는 어린 양처럼 보이는 것일까, 송하는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에 느린 한숨을 내쉬며 욕실의 문을 닫았다.

    탁.

    “춥지 않소?”

    익제의 다정한 물음에 채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더워 죽을 지경이었다. 머릿속이 핑글핑글 돌았고, 뇌수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게다가 허리를 배회하는 커다란 손이 그녀의 신경을 온통 앗아갔다.

    미처 물에 가라앉지 못한 채선의 속치마가 수면 위로 둥실 떠올랐고, 그 위로 붉은 꽃잎들이 둥둥 떠다녔다. 

    익제가 손을 오므리더니 욕조의 물을 떴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레 뿌렸다. 행여 한기가 들까, 다정다감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물에 젖어 속살이 비치는 얇은 흰색 천을 보고서야 만족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꽃잎 하나가 그녀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는 채선의 머리카락이며 귓불, 어깨를 끊임없이 어루만졌다.

    그때마다 채선의 몸이 흠칫거렸다. 뭍으로 올라온 물고기 마냥 파닥파닥.

    익제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가슴께로 넘겼다. 눈앞에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가만히 입술을 비볐다.

    “흐……읍!”

    채선은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흘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익제가 젖은 천 너머로 그녀의 허리를 쓸어내리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오늘 일은 부인이 성급하였소. 누구보다 부인을 귀히 여기라 그리 당부를 하였는데, 고작 곰 같은 늙은이가 연못물 좀 뒤집어쓰는 게 무어 그리 대수라고, 그를 구하다 대신 물에 빠지느냔 말이오.”

    “……죄송합니다.” 

    채선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허리를 지분거리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그녀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우물쭈물하던 그녀의 손가락이 익제의 손목을 붙들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손을 물릴 생각이 없었다. 굳은살 박인 손이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채선의 몸이 다시 한번 튀어 올랐다.

    “게다가 그 늙은이가 그래 봬도 한때는 제국을 주름잡던 무장이오. 아무리 나이를 먹었다 한들 그 정도 반사 신경도 없겠느냔 말이오.”

    “……송구, 합니다.”

    잠시 멈칫하던 그의 손이 슬그머니, 채선의 속치마 사이를 파고들었다. 나머지 한 손은 그녀의 목덜미를 느릿하게 훑어 내렸다. 

    “다음부터는 두 번 다시…….”

    그 순간.

    “읏!”

    촤르륵.

    채선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몸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졌고, 어깨 위로는 희미한 김이 피어올랐다. 

    젖은 천 너머로 잘 익은 과실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몸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녀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익제가 하던 말을 멈추고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갈 곳을 잃은 두 손이 어정쩡하게 수면 위를 부유했다.

    채선은 그를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욕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젖은 몸 위에 겉옷을 걸치며 방문을 열었다.

    “저, 저는 이만하면 된 것 같습니다. 그럼 마저 몸을 녹이고 나오십시오!”

    “어, 어머나! 부인!”

    문밖에 서 있던 송하가 갑자기 문을 열고 뛰쳐나온 채선의 모습에 깜짝 놀란 외침을 터뜨렸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송하가 한 박자 늦게 채선의 뒤를 쫓아갔다.

    “잠깐만요, 부인. 그러다 풍한이 드셔요!”

    하녀들이 바닥에 떨어진 물기를 닦았다. 

    “하.”

    익제는 욕조에 두 팔을 걸치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녀 하나가 곁으로 다가와 능숙한 솜씨로 그의 머리를 감기기 시작했다.

    “미치겠군.”

    그의 잇새로 탄식인지 한탄인지 모를 말이 흘러나왔다. 

    머리를 감기던 하녀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그녀는 금세 태연함을 가장하며 물기를 짰다. 주르륵,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물방울들이 낮은 통 안으로 떨어졌다.

    “언제까지 손가락만 빨게 할 것이오.”

    익제가 그곳에 없는 누군가를 향해 원망 어린 말을 던졌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달아오른 얼굴로 어쩔 줄 모르고 당혹스러워하는 그녀를 지켜보는 건 제법 유쾌했다.

    그런 한편으로 수줍음 많은 그녀의 반응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평생을 깊은 산골에서 가족들과 살아왔던 그녀였다. 남녀상열지사는 물론이고, 젊은 사내를 본 적 또한 손에 꼽을 만큼 적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순진한 반응을 즐기는 건 최근 들어 생긴 익제의 가장 큰 도락이었다. 거기에 눈물까지 글썽이면 금상첨화였다.

    그런데 슬슬 한계가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자신이 언제까지 점잖을 떨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인내의 끈은 금세라도 끊어질 것처럼 얄팍했다.

    익제가 두 손으로 세수를 하듯 얼굴을 쓸어 올렸다. 촤륵, 한 김 식은 물이 그의 턱 끝에 맺혔다가 떨어졌다. 그가 마뜩잖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찬물을 부어라.”

    “……예?”

    그 뜬금없는 말에 노련한 하녀들이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익제가 답답하다는 듯 가볍게 혀를 찼다.

    “찬물을 부으라는 말이 그렇게 어렵더냐?”

    “예.”

    그제야 하녀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순식간에 변한 익제의 태도에 곤혹스러움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티 내지 않을 만큼의 현명함을 갖추었다. 하녀들이 분주하게 나무 물통을 옮기며 욕조에 찬물을 부었다.

    아랫도리를 휘감던 겁화와 같은 열기가 서서히 식어갔다.

    ***

    “덕분에 잘 머물다 갑니다.”

    채선이 이백중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백중은 여전히 그녀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그녀의 곁에 선 익제의 눈매가 삐뚜름하게 변했다.

    “크음.”

    이백중은 그가 또다시 자신의 눈깔을 뽑아 버린다고 하기 전에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채선을 향해 뒤늦게 정중한 예를 표했다.

    “군대부인께서 저를 구하려 애쓰셨던 일은 두고두고 마음에 새겨둘 것입니다. 혹, 어려운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지체 않고 달려가겠습니다.”

    “이 공이 무언데?”

    “……예?”

    대답은 채선이 아니라 익제에게서 돌아왔다. 마치 시비라도 거는 듯한 퉁명스러운 어조에 이백중이 슬쩍, 눈동자를 돌렸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노려보는 익제와 눈이 마주쳤다.

    “이 공이 무언데 달려온다 만다 운운하는 것이오? 이 공이 내 부인의 친정 아비라도 되시오?”

    그러니까 한마디로 어디서 개뼈다귀 같은 놈이 수작질을 거느냐는 거다. 

    “그것이 아니라.”

    당혹스러운 이백중의 모습에 채선이 슬며시 익제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혹 저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나빠졌을까, 그녀의 눈매가 걱정스러운 빛을 띠었다. 

    그녀를 돌아본 익제가 속으로 혀를 차며 빙긋, 입꼬리를 당겼다.

    “이 공과 나는 막역한 사이오. 이 정도 농쯤은 아무것도 아니오.”

    농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백중은 자신이 언제 익제와 막역한 사이가 되었나,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제야 채선이 안심한 얼굴로 가마에 올랐다.

    이백중을 돌아보는 익제의 시선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그는 그런 익제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남은 여정 무탈하게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머지않은 날, 다시 뵙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다시 뵙는다라, 익제는 이백중의 말을 조용히 되뇌며 그를 응시했다. 먼발치에 황족의 그림자만 보여도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그가 다시 보자고 하였다. 

    익제는 그의 속내를 가늠하려는 듯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백중이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척 태연한 낯으로 그의 시선을 받았다. 

    흠, 낮은 침음을 흘린 익제가 핀잔을 던졌다.

    “그 전에 노망이나 들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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