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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58)화 (5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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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같이 목욕을
    하는 게 어떻겠소?

    이백중이 그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그제야 익제는 자신이 이성을 잃고 과하게 반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 안에 위치한, 잉어 몇 마리가 노니는 것이 전부인 연못이었다. 애초부터 수심을 그렇게 깊이 팔 리 없었다.

    그러나 채선이 물에 빠지는 것을 본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 목덜미를 덥석, 움켜쥐는 기분이었다. 

    누구보다 냉철하다고 자부한 그가 이것저것 따질 겨를 없이 본능적으로 몸을 던졌다. 

    익제는 짐짓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채선을 옆구리에 끼고 걸음을 옮겼다. 물살을 가르며 가장자리로 나아간 그가 그녀를 번쩍 들더니 땅 위에 앉혔다. 

    도영이 그런 채선을 부축했고, 익제는 혼자서 훌쩍 몸을 띄웠다.

    주르륵.

    뭍으로 올라온 익제의 몸에서 연못물이 쏟아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백중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채선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번 더 그런 눈으로 내 부인을 쳐다보면 그 눈깔을 뽑아 버린다고 경고하였을 터인데.”

    익제의 험악한 음성이 그에게 꽂혔다. 그제야 이백중이 조용히 시선을 거두고 익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군대부인께서는 저를 구해주시려다 연못물에 빠지셨습니다.”

    “내, 이 빚은 두고두고 잊지 않을 것이오.”

    익제가 서슬 퍼런 목소리로 뇌까렸다.

    “예.”

    이백중이 어떤 대가든 치르겠다는 듯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가 다시 한번 채선에게 시선을 던졌다. 

    조금 과장하여 그의 반밖에 되지 않는 가녀린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몸을 날렸다. 

    그것은 본능적인 행동인 듯 그녀는 단 한 순간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아마도 눈앞의 여인은 더없이 선량한 사람이리라.

    불현듯,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피 냄새가 떠나지 않는 전장에서 제 등 뒤를 지켰던 한 제자가 있었다. 

    그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몸을 던져 막았던 군인이었다. 어깨에 화살이 박히고도 “괜찮으십니까?”라며 제 안부부터 묻던 순한 사내였다. 

    “가십시다. 고뿔이라도 걸리면 큰일이오.” 

    익제가 채선을 덥석, 안아 들었다. 채선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버둥거렸다.

    “거, 걸어갈 수 있습니다. 다리를 다친 게 아닌데요!”

    하지만 그는 채선의 외침 따위는 들리지 않는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무슨 말인가 더 할 것 같던 그녀가 딱딱하게 굳은 익제의 얼굴을 보고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조용히 그의 품에 뺨을 기댔다.

    이백중은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입매에 힘을 꾹 주었다.

    ***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고 화로를 피워라. 부인께서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따뜻한 물을 준비하라. 서둘러라.”

    익제의 거침없는 명에 하녀들이 꽁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분주하게 움직였다. 송하가 마른 천을 가져와 채선의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기를 닦았다. 

    “과하십니다. 여름이라 춥지도 않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의 일도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흠뻑 젖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걸요.”

    채선이 하녀들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입을 열었다. 

    익제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그의 잇새로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니오. 행여 부인께서 고뿔이라도 걸리면 여기 있는 하녀들의 목이 날아갈 것이니 조금도 과한 일이 아니오.”

    “…….”

    일순, 방 안의 공기가 멈춘 것 같았다. 

    화로를 피운다, 새 옷을 내어온다, 바쁘게 움직이던 하녀들이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그의 말투와 내용 사이의 간극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채선이 한 박자 늦게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

    송하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채선의 머리카락을 닦기 시작했다. 그제야 다른 하녀들 역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하던 일을 계속했다.

    채선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눈으로 익제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하녀 하나가 그의 곁으로 다가가 마른 천으로 익제의 젖은 몸을 닦았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수족 노릇을 하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듯 태연하게 그녀의 시중을 받았다.

    무언가 달랐다.

    채선은 온화하게 미소 짓는 익제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여전히 살갑고 다정했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마치 화가 난 듯 보였던 탓이다. 

    그건 그녀가 산골에서 보았던 익제의 모습과도 사뭇 달랐다. 어쩌면 이것이 좀 더 그의 본성에 가까운지도 몰랐다. 

    익제가 그런 그녀의 얼굴을 구석구석 핥듯이 응시했다. 마치 채선을 시험하는 듯한 눈으로.

    “…….”

    그 순간, 채선은 슬며시 입꼬리를 당겼다. 그녀는 기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본성이 무엇이든, 그것을 자신에게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는 사실이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익제가 가면을 쓰고 대하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제야 뚫어질 듯 쳐다보던 익제의 눈매가 누그러졌다.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채선의 뺨을 감쌌다.

    “부인께서는 나를 연모해 주셔야 하오.”

    “!”

    그 말에 채선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제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심장이 쿵쿵 뛰었다. 

    결국 그녀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시선을 떨어뜨리며 작게 속삭였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얕고 희미한 목소리였다.

    “……하고, 있습니다.”

    익제가 설핏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의 목소리가 한결 더 달콤하게 변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설령 내가 어떤 모습을 하더라도, 부인께서는 나를 연모해 주셔야 하오.”

    채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의아한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 익제를 향했다. 

    그는 조금 전과 다름없는 다정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익제가 왜 그러냐고 묻듯 가볍게 눈썹을 들썩였다.

    “…….”

    그런데 어째서인지 모를 한기가 느껴졌다. 더없이 다감한 얼굴 앞에서 쓸데없이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면 저 상냥한 눈빛이 순식간에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채선이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설혹 세상 사람들 모두가 등을 돌리더라도 익제님을 연모하는 마지막 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녀의 확답에 그의 눈매가 비로소 만족스러운 빛을 띠었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그제야 채선은 자신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 겸연쩍은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굳이 따지자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등을 돌리는 건 익제보다는 그녀에게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익제의 눈동자가 짙어지는 찰나, 방문이 열리며 하녀가 들어왔다.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채선이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겠다는 뜻이었다. 익제의 달콤한 목소리가 방을 나서는 그녀의 등을 때렸다.

    “부인.”

    채선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익제가 더없이 다정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붉은빛이 감도는 가느다란 입술을 달싹였다.

    “같이 목욕을 하는 게 어떻겠소?”

    “……예?”

    방금까지 옅은 미소를 짓던 그녀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러다 한 박자 늦게 그가 한 말의 뜻을 알아차리곤 두 눈을 부릅떴다. 

    하녀들이 다시 한번 일제히 얼어붙었다. 

    그 속에서 오직 익제만이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나도 으슬으슬한 게 이러다 고뿔이 오지 않을까 싶소.”

    “그럼 익제님께서 먼저……!”

    채선의 낯빛이 금세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하녀들을 돌아보며 “은원군께서 목욕하실 준비를…….”이라고 외치는 그녀를 보며 익제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내, 부인을 두고 어찌 염치없이 혼자만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겠소?”

    “하지만…….”

    “부인께서는 나를 소인배로 만들 셈이오? 이백중이 나를 보고 무어라 하겠소? 부인을 두고 제 살 궁리만 하는 졸렬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오.”

    “그럼 제가 빨리 목욕을 끝낼 터이니 그 후에…….”

    “에취!”

    익제가 재채기를 하며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껴안았다. 그의 턱이 덜덜 떨렸다. 

    도영이 가증스러운 눈으로 익제를 힐긋거렸으나, 하얗게 질린 채선은 제 발로 성큼성큼 덫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익제의 손을 잡아끌었다.

    “익제님 말씀대로 같이 목욕을 하는 게 낫겠습니다. 서두르렴, 송하야.”

    “……예.”

    송하는 목 끝까지 치민 말을 꿀꺽, 삼켰다. 그녀 같은 아랫것들은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목이 달아나는 법이었다. 

    송하는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그래서 익제의 시커먼 속내를 눈치채지 못한 척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죄송하여요, 부인.

    송하의 소리 없는 사죄가 공기 중으로 허무하게 흩어졌다.

    *** 

    찰랑찰랑.

    속옷만 걸친 익제가 서슴없이 커다란 나무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찰박이는 물소리가 났다. 

    채선은 어디를 쳐다봐야 할지 알 수 없어 애꿎은 벽만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어서 들어오지 않고 뭐 하시오? 그러다 고뿔이 걸리겠소.”

    고뿔.

    채선은 자신이 고뿔에 걸리면 하녀들이 고초를 치르리라던 익제의 말을 떠올리곤 서둘러 입을 열었다. 

    “지, 지금 들어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힐끔, 그녀가 눈동자만 돌려 익제를 훔쳐보았다. 

    그는 나무로 만든 욕조에 팔꿈치를 걸친 채로 느긋하게 기대어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수면 위를 둥둥 떠다녔고, 얇은 흰색 천 너머로 딱 달라붙은 살갗이 선명하게 비쳤다.

    익제가 뚫어질 듯이 집요한 눈으로 채선을 응시했다. 마치 세수라도 하듯 두 손으로 뺨을 훑어 내린 그가 빙긋, 입꼬리를 당겼다. 그리고 채선을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자, 이리 오시오. 무얼 머뭇거리시오?”

    익제의 목소리는 마치 어린아이를 꾀듯 은근하고 달콤했다. 속옷 천 너머로 그녀의 굴곡진 몸이 드러났고,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살결이 희미하게 비쳤다.

    문득, 익제의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그가 다시 한번 낮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흡사 우물 밑바닥에서 울리듯 공명이 큰 목소리였다.

    “물이 따뜻하여 순식간에 한기가 달아나는군. 거기 그러고 서 있지 마시고, 부인께서도 어서 들어오시오.”

    “……예, 그럼.”

    언제까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라 채선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마른침까지 한 번 삼키고 나서야 미적미적, 한 발을 내디뎠다. 

    송하가 얼른 그녀의 옆으로 다가서며 한쪽 팔을 부축했다. 바닥이 미끄러워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탓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도 매일같이 고꾸라지는 그녀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참방.

    채선이 한 발을 살그머니 욕조 안으로 집어넣었다. 발끝에서 시작된 따스한 온기가 혈관을 타고 말초까지 퍼져 나갔다. 그제야 어쩌면 추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선은 나머지 한 발도 욕조 안으로 집어넣었다. 온몸이 찌르르하니 진하게 울렸다. 송하가 안심한 듯 천천히 손을 놓았다.

    그곳은 귀한 손님을 위해 마련된 욕탕이었다. 나무로 만든 욕조는 두 사람이 들어앉아도 좁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 커다랬다. 

    방 한구석에서는 화롯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하녀들은 끊임없이 데운 물을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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