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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57)화 (5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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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이 빚은 두고두고
    잊지 않을 것이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약해졌다. 익제는 처마 끝에 동그랗게 맺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낮게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출발하고 싶은데, 금방이라도 다시 비가 내릴 것 같군.”

    “아마 저 때문일 겁니다.”

    발이 묶인 게 마뜩잖은 듯한 그의 푸념에 채선이 의기소침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그제야 익제가 그녀의 성정을 떠올리곤 대뜸 화살을 돌렸다.

    “아니오. 괜히 이곳에 들른 내 잘못이오. 저 영감탱이가 저리 주책없이 나이를 먹었을 줄 누가 알았겠소?”

    그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이 마치 산골에서 지내던 때의 익제를 보는 것 같아 채선은 저도 모르게 빙긋, 웃음을 여물고 말았다. 

    가면을 쓴 것 같은 다정한 얼굴보다 저 투박한 표정이 더 반갑다면 자신의 머리가 이상한 것일까?

    “영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채선의 소심한 대꾸에 익제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혀를 찼다. 그의 목소리가 신랄하게 바뀌었다.

    “영감이오. 그런 주제에 어여쁜 것은 알아가지고 부인에게 눈독을 들이다니. 그자가 노망이 났나 보오.”

    “그, 그……!”

    예상치 못한 곳에서 훅 치고 들어오는 익제의 언행에 채선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두 뺨만 붉게 물들였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그녀가 팔랑팔랑 손 부채질을 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채선이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 황급히 방을 나섰다. 개나리처럼 노란 치마가 방문 너머로 사라졌다.

    느릿느릿, 그녀의 뒤를 따르려던 익제는 방으로 들어오는 원진의 모습을 보고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익제와 눈이 마주친 도영이 곧장 방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익제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가 옆으로 다가온 원진에게 무심한 물음을 던졌다.

    “어떻게 되었나?”

    “예정대로 내일 사냥제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광무대군은 모든 준비를 마쳤고, 사냥에 참석하는 이들이 속속 그의 집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도성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그곳의 소식은 시시각각으로 익제에게 전해졌다. 태풍의 눈에서 벗어났다고 하나, 그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른 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누구 하나 죽어야 끝이 나겠지.”

    저마다 속에 칼을 품고 있는 황자들의 면면을 떠올리던 익제가 비죽, 입꼬리를 당겼다. 이왕이면 자신이 없는 동안 최대한 많은 이들이 명을 달리했으면, 하는 의뭉스러운 바람을 품으며.

    “자, 그럼 나는 누가 죽어 나자빠질지 구경이나 해볼까.”

    ***

    채선은 처마가 길게 드리워진 회랑을 따라 걸었다. 비가 오는 날에도 가벼운 산책을 할 수 있도록 지붕이 드리워진 길은 중정으로 이어져 있었다.

    또옥.

    똑.

    처마에 맺힌 물방울이 평평한 돌 위로 떨어졌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비가 그치고 해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나 머리 위에는 아직도 시커먼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익제의 말처럼 당분간은 이곳을 떠날 수 없을 듯했다. 우중의 여정은 저보다 하인들이 더 고될 터였다. 

    “산책을 나오셨습니까?”

    그때, 등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살짝 예를 표한 이백중이 곧장 채선의 곁으로 걸어왔다. 그를 발견한 채선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의 이백중이 싫거나 불편한 건 아니었다. 평생 무인으로 살아온 그는 풍채가 크고 분위기가 위압적이었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다만, 가끔씩 저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을 따름이다. 아끼던 제자와 닮았다고 하였던가.

    그런 말을 들은 뒤라 꺼리는 내색을 할 수도 없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제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

    채선은 가볍게 알은체를 한 뒤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가 뒷짐을 진 채 그녀와 나란히 보조를 맞추었다. 

    누가 보면 사이좋게 같이 산책을 하는 것이라 생각할 만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오늘 같은 날씨에는 중정 연못의 운치가 아주 좋습니다. 물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이곳이 이승인지, 혹은 신선들이 머무는 무릉도원인지 모를 정도의 장관이 펼쳐진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이백중이 뜰 아래로 내려섰다. 그러다 채선이 따라오는 기색이 없자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

    난감한 표정을 짓던 채선이 체념 어린 기색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젖은 풀에 쓸린 치맛단이 금세 축축한 습기를 머금었다.

    “곧 다시 비가 내릴 것 같습니다.”

    이백중의 말에 채선은 찌푸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예, 그럴 것 같습니다.” 하고 대꾸했다. 

    그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채선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회한에 젖은 눈매는 그녀가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누군가를 보는 듯했다.

    더 이상 안 되겠는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던 송하가 도영에게 뒤를 부탁한다는 눈짓을 던지곤 재빨리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익제를 불러오기 위해서였다.

    도영은 채선의 등 뒤로 한 발 더 다가섰다. 이백중이 힐긋, 그를 일별하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비 온 뒤의 산책은 그 나름의 운치가 있지 않습니까.”

    “예. 세상이 조금 더 짙어진 것 같습니다. 같은 색으로 여러 번 덧칠한 것처럼요.”

    “세상이 짙어졌다……. 그렇군요. 비가 한 번 올 때마다 나무가 한층 푸른빛을 띠지요. 어제와 오늘이 마치 딴 세상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름을 좋아합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은원군께서는 몸에 열이 많아 여름이 고역이신 듯합니다. 그러니 이 계절이 빨리 지나가 주었으면 싶기도 합니다.”

    “허허허. 두 분의 금슬이 아주 보기 좋습니다.”

    이백중과의 대화는 생각만큼 불편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연못가에 도착해서야 서서히 걸음을 늦추었다. 

    채선은 눈앞에 펼쳐진 신비롭고 장엄한 광경에 일순, 넋을 빼앗겼다. 

    널찍한 연못 위로 자욱한 물안개가 끼어 있었다. 그 안에 몸을 숨기고 있는 용이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 같은 풍경이었다. 뿌연 안개가 스멀스멀 다가와 채선의 몸을 감쌌다.

    이백중이 그런 그녀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심결인 양 그녀를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

    “고향이 작은 섬이라 하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연못에서 느릿하게 시선을 뗀 채선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 

    그녀는 이백중의 추궁에 슬며시 등을 긴장시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도영이 성큼, 다가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혹, 형제가 어찌 되십니까?”

    “오……라버니와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그녀는 질리도록 외웠던 태부 조카딸의 신상을 떠올리며 얼굴도 모르는 오라버니와 남동생의 존재를 되새겼다. 그리고 땀이 배어난 손바닥을 슬쩍, 치맛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문득, 이백중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여자 형제는 없습니까?”

    “!”

    덜컥, 심장이 떨어졌다. 그의 날카로운 안광은 마치 그녀의 거짓말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도영이 다시 한 발짝 곁으로 다가서는 찰나, 채선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한 번만 더 입을 열면 이번에는 말이 아니라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채선은 애써 당당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뿌린 씨앗이었다. 그러니 거두는 것 또한 그녀의 몫이었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채선을 응시하던 이백중이 불쑥, 입을 열었다.

    “혹시 부친의 존함이 어찌 되십니까.”

    그 순간.

    “아!”

    그의 발밑이 무너졌다. 연못 가장자리의 흙이 비에 젖어 이백중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다. 

    갑작스러운 일에 그의 낯빛이 일변했다. 이백중은 서둘러 한 발 뒤로 물러섰지만, 그곳의 흙까지 내려앉았다. 이백중의 커다란 체구가 연못 쪽으로 기울었다. 

    “위험합니다!”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녀가 이백중의 손을 잡고 자신의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채선의 무게가 턱없이 가볍다는 것이었다.

    “부인!”

    등 뒤에서 도영이 그녀를 소리쳐 불렀다. 그러나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그녀의 몸이 종잇장처럼 가볍게 날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

    풍덩.

    채선은 꼬르륵, 소리를 내며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놀란 마음에 팔다리를 휘저었지만 거추장스러운 옷 탓에 여의치 않았다. 물에 젖은 옷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겁이 나지는 않았다. 자신의 악운을 생각하면 오히려 당연하다 생각될 정도였다. 다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게 조금 곤란할 뿐이었다. 

    난감하게 되었구나, 하고 채선이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첨벙.

    또다시 물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연못 속으로 뛰어든 모양이었다. 아마도 도영이리라, 생각하며 채선은 미안한 기색으로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굳이 그까지 연못물에 뛰어들지 않아도 되는데. 그저 손만 내밀어주면 될 터인데.

    “!”

    그러나 다음 순간, 채선의 눈동자는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익제가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뻗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듯 그의 입술이 달싹였지만, 그 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의 잇새에서 보글보글, 기포가 터졌다.

    채선은 표정이 싹 사라진 그의 얼굴을 보며 멍하니 두 눈만 깜빡였다. 그녀의 몸이 조금씩 아래로 가라앉았다. 처음 보는 얼굴의 그가 그녀를 향해 사나운 기세로 헤엄쳐 왔다.

    깜짝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던 잉어들이 서서히 두 사람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초조하게 물살을 가르며 다가온 익제가 단숨에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그가 곧장 수면 위로 올라갔다. 푸핫, 채선이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괜찮소?”

    익제의 턱 밑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채선의 뺨 위에 맺힌 물기를 닦느라 여념이 없었다. 

    채선은 느릿하게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꺼풀 위에 맺혔던 물방울이 또르르, 뺨을 타고 굴러떨어졌다. 그제야 익제의 얼굴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였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그는 평소와 달랐다. 가면을 덮어쓴 다정한 얼굴도, 언짢은 기색을 드러낸 신경질적인 얼굴도 아니었다. 

    익제는 채선이 처음 보는 표정으로 그녀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예. 저는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채선이 이백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마저 두 팔을 뻗지도, 그렇다고 거두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익제가 서슬 퍼런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의 시선은 마치 시퍼런 칼날처럼 예리하게 이백중을 난도질했다. 

    익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일 때, 채선이 두 발을 땅에 딛고 일어섰다. 그녀의 허리를 붙들고 있던 익제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

    연못물이 가슴께밖에 오지 않았다. 채선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 겸연쩍은 표정으로 물 밖에 서 있는 이들을 올려다보았다. 

    도영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고, 송하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연못이 생각보다 얕다고 말씀드리려 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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