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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56)화 (56/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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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이 공의 눈깔을
    뽑아 버리겠소.

    그제야 자신의 무례를 깨달은 이백중이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닙니다, 그저…… 태부 어른의 조카분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이백중이 미심쩍은 투로 물었다. 

    그녀에 대한 소문은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날아들었다. 태부가 은원군을 손에 넣고 쥐락펴락하려는 모양이구나, 낮은 침음을 흘렸던 기억도 났다. 

    두 눈을 가늘게 뜬 익제가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렇다면 군대부인의 고향이……?”

    “수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섬이오. 이 공께서는 들어도 알지 못할 것이오. 나도 처음 듣는 곳이었으니까.”

    “그렇습니까?”

    이백중이 다시 채선에게로 시선을 던졌고, 익제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그의 시야에서 그녀를 완전히 가렸다. 

    익제의 목소리가 언짢은 빛을 띠었다.

    “내 부인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것 같소이다.”

    그의 삐딱한 물음에 이백중이 “허허허.” 하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가 화제를 바꾸려는 듯 집 안을 가리켰다.

    “긴 여정에 지치셨을 터이니 일단 안으로 드십시오.”

    이백중이 한발 앞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줄지어 선 이백중의 하인들이 익제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개중에 지위가 높은 가신들이 익제와 채선을 처소로 안내했고, 다른 이들은 익제의 하인들에게 묵을 방을 내어주었다.

    “이전에 이백중을 본 적이 있소?”

    방으로 들어온 익제가 기다렸다는 듯 물음을 던졌다. 채선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래, 부인께서 알 리가 없지.”

    고개를 끄덕이던 익제가 반쯤 혼잣말로 “늙으면 곱게 늙어야지. 내 이백중이 저리되었다는 건 미처 몰랐군.” 하며 혀를 찼다.

    채선은 저를 빤히 쳐다보던 이백중의 눈빛을 떠올렸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적여도 기억에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게다가 인상이 강한 탓에 한 번 보면 쉬이 잊힐 얼굴도 아니었다. 고개를 모로 기울인 그녀가 끝내 영문을 알 수 없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익제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헝클어진 옆머리를 가만히 쓸어 넘겼다. 그의 입매에는 어느새 다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피곤하지 않소?”

    “여기까지 제 발로 걸어온 적이 없는데 어찌 피곤하겠습니까? 가마꾼과 풍오가 고생이 많았습니다.”

    채선이 동그란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말없이 만져도 놀라거나 피하지 않았다. 그것이 몹시 기꺼워 익제의 눈매가 한층 더 부드럽게 굽었다.

    “덥지는 않소?”

    “참을 만합니다.”

    “그럼 하인들이 짐을 푸는 동안 집을 한 바퀴 돌아보시겠소? 이곳에서 사흘은 머물 예정이니 길을 익혀 두어서 나쁠 것은 없을 것이오.”

    “예.”

    채선은 익제가 내민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하가 비죽 웃으며 두 사람의 등 뒤를 따라붙었고, 도영이 그림자처럼 그들을 수행했다. 

    ***

    “내가 머무는 동안 집을 비운다고 하지 않았소? 나를 모신다던 장자는 어디 가고 이 공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오?”

    익제는 저녁 식사에 동석한 이백중을 보며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채선을 흘깃거린 이백중이 뻔뻔한 투로 대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귀한 손님께서 걸음 하셨는데 주인이 집을 비우는 것은 도리가 아닌 듯하여 제가 직접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흠.”

    익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그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이백중을 노려보았다. 저 늙은 곰 같은 여우가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가늠이라도 하듯이. 

    “그것 참 고맙소. 대군들께서도 이 공의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하소연을 늘어놓으시던데, 내게는 그 귀한 얼굴을 아낌없이 보여주니 말이오.”

    “관직에서 물러난 이가 대군들을 뵐 일이 무엇 있겠습니까? 괜한 구설에나 오를 뿐이지요. 말년은 조용히 살다 가는 것이 제 마지막 바람입니다.”

    “오호, 그런데 내게는 그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오? 아아, 나는 권력에서 밀려난 세력 없는 황족이라 구설에 오를 걱정이 없어서 그런가?”

    그들을 둘러싼 공기에 뾰족뾰족 가시가 돋은 것 같았다. 어조나 음성은 다감하였으나, 이면에 숨겨진 날 선 공방이 느껴졌다.

    “!”

    힐끔, 눈동자를 들던 채선은 이백중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녀가 얼른 시선을 떨구었다. 

    식탁 위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으나, 누구도 수저를 들지 않았다. 

    “이 공.” 

    익제의 온화한 음성에 이백중이 채선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그를 보았다. 

    익제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을린 얼굴과 부리부리한 눈, 고집스러운 입매, 그리고 떡 벌어진 풍채 같은 것들을. 

    이백중은 범의 기운을 뿜어대는 전형적인 무인의 상이었다. 

    “예, 말씀하십시오.”

    “한 번만 더 그런 눈으로 내 부인을 쳐다보면 이 공의 눈깔을 뽑아 버리겠소.”

    “…….”

    방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것이 무시무시한 말의 내용 때문인지, 혹은 저열한 말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무척 의외였던 건 분명하다. 이백중뿐 아니라 시중을 들던 하인들조차 하던 일을 멈추고 당혹스럽게 눈동자를 굴렸으니 말이다.

    “죄송합니다.”

    이백중이 깔끔하게 사과했다. 그가 머쓱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마치 핑계처럼 뒷말을 덧붙였다. 탁하고 걸걸한 목소리가 식탁 위를 건너왔다.

    “군대부인께서 제가 아는 이와 몹시 닮아 본의 아니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틀에 박힌 변명이 가소롭다는 듯 익제가 한쪽 입매를 비스듬하게 당겼다.

    “내 부인이 이 공의 첫사랑과 닮기라도 하였소? 이 공의 첫사랑이라면 지금쯤 백발의 노파가 되어 있을 터인데.”

    “제가 그 정도로 늙진 않았습니다.”

    노년의 문턱에 서 있는 이백중이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익제의 눈빛과 목소리가 신랄했다. 그는 이백중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당초의 목적은 새까맣게 잊은 듯, 평소의 가면을 벗어던졌다. 

    “십수 년 전에 이미 늙고 쇠하여 더 이상 관직에 앉을 수 없다는 핑계로 낙향한 이가 잘도 떠들어대는군.”

    “크흠.”

    이백중이 다시 한번 헛기침을 했다. 그것이 겸연쩍은 자신의 과거 탓인지, 일변한 익제의 태도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노련한 하인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식사 준비를 끝낸 후 방 밖으로 물러났다. 

    이백중은 깊게 주름이 팬 눈으로 채선을 흘깃거리다 이윽고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첫사랑이 아니라 제가 아끼던 제자와 닮으셨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백중의 말에 잠시 뜸을 들이며 침묵하던 익제가 그에게 미심쩍은 시선을 던졌다.

    “제자라면…… 남자인가?”

    “예.”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느냐는 듯한 이백중의 대꾸에 채선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아랫입술이 삐죽거렸다.

    쯧, 하고 혀를 찬 익제가 별안간 언성을 높였다.

    “내 부인을 두고 사내를 닮았다니, 무례에도 정도가 있소!”

    “그것이 아니라!”

    이백중은 비로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화들짝 놀라며 채선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풀 죽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그는 여인의 섬세한 감성 따위는 알지 못했고, 자신의 말에 채선이 침울해할 거란 사실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연신 엉덩이를 뒤채었다.

    채선은 슬그머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밥맛이 뚝 떨어졌다는 듯. 

    익제에게 가장 어여쁜 모습만 보여주어도 모자랄 판에 그 앞에서 사내를 닮았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녀의 소심한 심장이 우울함으로 너울질 만했다.

    익제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서슬 퍼런 눈으로 이백중을 쏘아보았다. 그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그것이 아니라.”는 말만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이백중이 도와달라는 듯 간절한 시선으로 익제를 바라보았다. 그를 향해 살기를 번득이던 익제가 채선을 돌아보며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저 늙은이의 말은 괘념치 마시고 마저 식사하시오, 부인. 점심이 변변치 않았는데 저녁마저 건너뛰면, 나중에 잠들 때가 되어 속이 출출할 것이오. 나를 봐서라도 몇 술만 더 뜨시오.”

    마치 사람이 바뀐 것 같은 익제의 태도에 이백중이 입을 쩍 벌렸다. 익제는 눈앞의 여인을 깨지는 유리처럼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이백중은 얼이 빠진 모습으로 익제와 채선을 번갈아 보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로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단아하고 말간 외모에 자꾸 시선이 가기는 하지만, 이백중은 그녀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숱하게 보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익제만 해도 그녀보다 화려한 생김이었다. 길고 깊은 눈매와 우뚝 솟은 코, 밀가루 인형 같은 하얀 피부는 남성적인 매력과 중성적인 매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예에.”

    채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수저를 쥐었다. 그제야 이백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채선의 표정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익제가 어찌하여 그녀를 싸고도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채선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면 꼭 연약한 동물을 괴롭히기라도 한 양 양심이 콕콕 찔렸기 때문이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던 이백중이 흠칫, 어깨를 굳혔다. 익제가 예리하게 날이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두고 봅시다.

    그가 입 모양만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백중은 수염을 긁적이며 마치 변명 같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정말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에 헤어진 제자와 닮아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가고 말았습니다. 그 녀석한테 딸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아이가 자랐다면 이렇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백중이 채선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녀는 상장군이 얼마나 대단한 자리인지 몰랐지만, 아무에게나 머리를 숙일 만큼 낮은 지위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채선이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황급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찮습니다. 정말로 괜찮아요. 그 제자 분의 소식은 알지 못하나요?”

    “예.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런. 꼭 만나셨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군대부인께서는 아량이 하해와 같이 넓으시군요.”

    이백중이 인자한 미소를 띤 채 그녀를 칭찬했다. 채선의 볼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노려보던 익제가 뾰족한 태도로 끼어들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곧은 말을 하기로 유명했던 이 공도 세월이 흐르니 입에 발린 말을 할 줄 아는군. 아첨이 보통이 아니오.”

    “아첨이 아닙니다. 군대부인의 고운 심성에 깊은 감명을 느낀 것뿐입니다.”

    “흥.”

    익제는 자신이 왜 저자를 만나고자 그 먼 길을 돌아왔는지 뒤늦게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가 사흘 머물기로 한 계획을 물리고, 내일 당장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후두둑.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렸다. 간헐적으로 떨어지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더니, 이윽고 천둥과 번개까지 치기 시작했다. 

    창밖에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하인들의 발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채선은 열린 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이백중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먹구름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그새 비가 퍼붓는 모양입니다. 폭우가 그칠 때까지 이곳에서 편히 쉬다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녀는 언짢은 기색의 익제와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는 이백중을 번갈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의 공기는 여전히 삭막했다. 음식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체기가 있는 듯 가슴이 꽉 막혔다. 

    더없이 불편한 식사 자리라고 생각하며, 채선은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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