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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55)화 (5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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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내 부인의 얼굴에
뭐가 묻었소?

익제는 잠시도 쉬지 않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불을 빤다 싶으면 나물을 말리고 있고, 약초를 돌본다 싶으면 어느새 밥을 짓고 있던 그녀의 모습을. 

그때는 앞을 볼 수 없어 막연히 상상만 했던 광경에 지금 채선의 얼굴을 그려 넣으니 마치 화룡점정처럼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의 눈매가 손톱달마냥 부드럽게 휘어졌다.

“정 그러면 나와 함께 말을 타고 가시겠소?”

“……풍오를요?”

익제의 물음에 채선은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검은 말에 시선을 던졌다. 터벅터벅 걷던 풍오가 자신의 이름을 알아듣곤 커다란 눈동자를 돌렸다. 영특한 말이었다.

“멈추어라.”

눈치 빠른 송하가 얼른 가마 앞으로 돌아가 문을 들어 올렸다. 채선이 쭈뼛거리며 가마에서 내려섰다. 수십 명의 행렬이 그녀 하나로 인해 걸음을 멈추었다. 

“풍오.”

영리한 말은 그 한 마디만으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차렸다. 풍오가 곁으로 다가와 다리를 구부렸다. 

채선을 먼저 풍오의 등에 태운 익제가 이내 말 등 위로 올라탔다. 풍오는 두 사람을 태우고도 힘든 기색 하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잠깐 멈추었던 행렬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채선의 온 신경이 등에 집중되었다.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조금만 힘을 빼도 익제의 가슴과 자신의 등이 맞닿을 듯했기 때문이다. 

심장이 등 뒤에서 쿵쿵, 소리를 내며 거칠게 뛰었다.

“가끔 이렇게 풍오를 탈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소. 풍주에 도착하면 내가 부인에게 말 타는 법을 알려 드리리다.”

“정말요?”

그 말에 채선이 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익제가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채선은 그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조심하시오.”

“……예. 감사합니다.”

그는 도영으로부터 채선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고 있었다. 

그가 지켜보지 않는 곳에서 그녀가 누구를 만났고,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어떤 음식을 먹었고, 제가 없는 동안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그리고 심지어는 그녀가 몇 번 넘어졌는지까지 빠짐없이 보고가 되었다.

그러니 채선이 국대부인과 나눈 대화 정도야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적당한 때를 살피는 중이었을 따름이다.

나처럼 다정한 남편을 두고, 누구한테 승마를 배우겠다는 건지. 살살 꼬드기면 고래 등 같은 저택도 내어줄 판에 고작 그 말 한마디 못해서야, 쯧쯧. 

내심 혀를 찬 익제가 속내를 감추고 온화한 표정으로 채선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수줍게 미소 지으며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채선의 왼쪽으로 바다처럼 넓고 긴 강이 펼쳐져 있었고, 전방으로는 녹음이 우거진 산자락이 대지에 녹아들 듯 몸을 누이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보는 강물은 마치 호수처럼 잔잔했다. 

하지만 채선은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한없이 고요해 보이는 강물도 그 속으로 들어가면 온몸이 휘청거릴 만큼 유속이 빠르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인생 역시 그와 같을지도 모른다. 멀리서는 평온하고 잠잠해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치열하고 분주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낸다. 

익제의 곁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에게서 어떤 언질도 듣지 못했지만, 채선은 충분히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생각만큼 아둔하지도, 멍청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채선이 익제의 옷소매를 움켜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다른 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맹렬하게 살아내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흐르고 흘러 마침내 큰 바다에 당도할 수 있을 터였다.

그곳에서 익제와 함께 고래를 볼 수 있을까.

“저기 보십시오.”

그때, 채선이 손가락을 들어 먼 하늘을 가리켰다. 가만히 제 옷소매를 쥐고 있는 그녀의 손끝을 내려다보던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늘 한 편이 짙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새들이 무리를 지어 날아갑니다.”

드문드문 찍혀 있는 구름 아래로 수십 마리의 철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우두머리가 선두에서 무리를 이끌었고, 나머지 철새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질서정연하게 날갯짓을 했다. 장관이었다. 

익제가 무어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채선이 다시 손가락을 뻗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노을을 품은 강처럼 반짝였다.

“저기 보세요. 저 아래, 개망초가 무더기로 피었습니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끝도 없이 피어 있는 하얀 개망초 꽃밭이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개망초 군락지는 마치 눈 쌓인 들판처럼 보이기도 했고, 혹은 풍성한 솜털을 깔아 놓은 것 같기도 했다.

“그렇군.”

신기했다. 좀 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 그의 눈앞에 선연하게 펼쳐졌다. 익제는 느릿하게 눈동자를 돌려 제 앞에서 요리조리 바쁘게 움직이는 작은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그녀는 익제의 가슴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있었다. 부쩍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를 대변하듯.

“저기 좀 보세요. 사공이 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손님을 여럿 태웠나 봅니다. 어쩌면 오늘은 고깃국을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운이 좋은 날인가 봐요.”

“그렇군.”

“저 산등성이에 분홍색 꽃이 한 무더기 피어 있는 거, 보이세요? 아마 배롱나무일 겁니다. 이 시기엔 배롱나무꽃이 정말 예쁘거든요.”

“그렇소?”

“예. 벚꽃보다 강인하고, 복사꽃보다 화려하죠.”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채선이 주위를 둘러보다 익제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음에 아무도 몰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롱나무가 있는 곳을 알려 드릴게요. 제가 살던 곳에서 멀지 않아요. 엄마한테 혼나거나 언니랑 싸울 때면 찾아가던 곳이거든요. 제가 발견한 비밀 장소예요.”

“그것참 고맙소.”

그녀가 몸담은 세계는 그의 것보다 작고 좁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은 세상을 보았다. 

익제는 제 앞에 펼쳐진 낯선 세계에 시선을 던지며 마치 한숨 같은 탄식을 터뜨렸다. 

그것은 그가 숨 쉬던 세계보다 소박하지만, 더없이 아름답고 소란스러운 세계였다. 개망초가 피어 있고, 사공이 노를 젓는 세계.

“꼭 알려주시오.”

“예. 하지만 꽃을 꺾어 익제님의 방에 장식을 해두진 않을 거예요.”

“부인이 그리 뒤끝이 긴 성격인 줄은 내 미처 몰랐소.”

반쯤 농이 섞인 익제의 토라짐에 채선이 얼른 두 손을 저었다. 그녀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덥석, 익제의 팔을 붙잡았다.

“그런 게 아니라, 익제님이 싫어하시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정말이오? 내 성격이 강퍅하다고 돌려 까는 것이 아니라?”

“돌려 까다니요…….”

채선은 시정잡배 같은 말투에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익제가 소리 없이 웃으며 고삐를 바투 쥐었다. 두 사람의 몸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닿았다.

하인들은 두 사람의 대화에 웃음을 삼키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들의 등 뒤로 새카만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던 탓이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리며 거친 폭풍을 몰고 올 것 같은 거대한 비구름이었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오랜만이오, 이 공.”

익제는 너그러운 얼굴로 이백중의 인사를 받았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모습보다 다소 나이가 들었지만, 단단한 풍채와 날카로운 기개는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다. 과연 중앙군을 통솔하던 상장군다웠다.

그는 현 황제가 즉위한 후 와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하였다. 그가 군에 미치는 영향력을 알고 있는 황제가 몇 번이고 만류하였다는 소문이 도성을 몇 바퀴나 돌았다. 

그러나 황제의 삼고초려에도 불구하고, 이백중은 끝내 낙향을 택하였다. 고집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내였다.

그런 이백중이 가느다란 미소를 띠고 있는 익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회한에 젖은 눈동자는 익제가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누군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자신이 모시던 선황제, 혹은 찬란하게 빛나던 과거.

그가 잡념을 떨치듯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이리 쉬어갈 수 있어 다행이오.”

익제가 굳이 이곳에 들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이백중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를 얻는다는 건 천군만마를 얻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를 탐내는 이 역시 익제 혼자만이 아니었다. 

도성에는 아직도 그의 말 한마디에 군사를 움직일 수많은 무관들이 있었다. 그는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비장의 수였고, 그가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제 편으로 포섭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백중은 더 이상 정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했다. 황제의 삼고초려마저 거절한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했다.

익제가 그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건넸다.

“숙식을 허락해 주어서 고맙소.”

“백성 된 도리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옹색한 집이지만 편히 머물다 가십시오. 은원군께서 이곳에 머무는 동안 저는 지기의 집에서 따로 지내기로 하였으니, 내 집이다 생각하고 머무십시오. 제 장자가 은원군을 모실 겁니다.”

이백중이 예를 표하며 선을 그었다. 

쯧, 익제가 그의 속내를 눈치채고는 혀를 찼다. 그는 이미 익제의 의중을 파악했고, 그가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도록 집을 떠나 있으려는 심산이었다.

빌어먹을, 눈치 빠른 노친네 같으니라고. 덩치는 곰 같으면서 이럴 때만 약삭빠른 여우로군.

익제가 웃는 얼굴 아래로 이백중의 험담을 지껄일 때였다. 송하가 가마의 문을 열었다. 

한 손은 송하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펄럭이는 치마를 붙잡은 채선이 넘어지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가마에서 내려섰다. 

이백중과의 첫 만남에서 엉덩방아를 찧을 수는 없지 않은가.

무사히 땅을 디딘 그녀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눈치를 살피다 사박사박, 익제의 곁으로 걸어갔다.

저분이 이백중이라는 사람인가 보구나.

채선은 두 사람에게 선뜻 집을 내어준 이백중을 향해 감사의 마음을 담아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 자리에 한 가령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이백중에게 어느 정도의 존칭을 사용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천하를 호령하던 상장군이었다. 허나, 지금은 관직에서 물러난 이였다. 그 간극이 늘 채선을 헷갈리게 했다. 

“인사하시오. 내 부인이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군대부…….”

이백중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일순, 그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채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뺨에 꽂히는 뜨거운 시선에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난감한 빛을 띠고 빠르게 깜빡였다.

이백중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노골적이고 부담스러운 시선을 견디다 못한 채선이 슬그머니 익제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가 살짝 익제의 옷자락을 쥐었다.

힐긋, 눈동자를 돌려 채선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익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잇새로 못마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부인의 얼굴에 뭐가 묻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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