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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54)화 (5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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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너와 네 모친은
    죽은 사람이다.

    “예? 아, 예.”

    채선이 반쯤은 반갑고, 또 반쯤은 아쉬운 표정으로 엉덩이를 뗐다. 두 사람은 안부를 주고받으며 천천히 방을 나섰다. 건강하시란 인사와 또 보자는 인사가 오갔다. 

    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들던 채선이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아.”

    뜰 앞을 서성이는 익제가 보였던 탓이다. 그가 인기척을 느낀 듯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익제의 눈매가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뒤늦게 국대부인을 발견한 그가 선우에게 인사를 건네며 채선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예. 은원군께서도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하하하.”

    익제가 머쓱한 웃음을 흘리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가 돌계단을 내려오는 채선을 향해 얼른 한 손을 내밀었다. 

    선우의 눈치를 살피며 잠시 멈칫하던 채선이 “제가 자주 덤벙거려서요.” 하며 변명 같은 말을 흘렸다. 

    그녀가 익제의 손을 잡았다. 채선이 부드러운 땅에 내려섰으나 그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겸연쩍은 듯 꼬물거렸다.

    “보기 좋습니다.”

    국대부인이 그렇게 말했고, 익제가 다시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선우는 그 자리에 서서 문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익제가 채선의 귓가에 다정한 귀엣말을 속삭이자, 그녀가 어깨를 떨며 웃음을 터뜨렸다. 둘 중 누구에게서도 거짓 속셈이나 술수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은 그치질 않는다네.”

    닫힌 문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린 선우가 느긋하게 등을 돌렸다. 하녀들이 줄줄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동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

    끼이익.

    짙은 어둠과 적막한 고요를 뚫고 육중한 나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효명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있는 곳에서는 저벅저벅 울리는 발소리만 들릴 뿐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새카만 어둠을 응시하고 있자, 오래지 않아 일렁이는 불빛이 다가왔다. 그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숨 막히는 침묵을 깨뜨렸다.

    “문을 열어라.”

    “예.”

    “……원진.”

    효명이 무심결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주 오랜만에 목구멍을 비집고 나온 소리는 형편없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효명은 고개를 들어 횃불에 일렁이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원진은 고집스럽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효명이 슬쩍, 한쪽 입술을 당겼다. 상처를 건드린 것인지 찌릿한 통증이 잠시 일었다가 사라졌다. 

    그는 회한에 젖은 눈으로 자신의 동료를 응시했다. 한때는 서로의 등을 지키던 사이였으나, 지금 원진에게 그는 배신자에 지나지 않았다.

    “원진.”

    효명이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미안함이 녹아 있는 목소리였다. 

    그 순간, 원진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그것은 살기 같기도 하였고, 비난 같기도 하였으며, 혹은 원망 같기도 하였다. 어쩌면 셋 모두일지도 모른다. 

    재빨리 표정을 수습한 원진이 딱딱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눈을 가려라.” 

    “예.”

    효명은 이 순간이 자신의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죽여서 끌고 나가든, 나가서 죽이든 마찬가지였다. 

    그가 체념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고, 병사들이 검은 천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두 손마저 꽁꽁 묶었다.

    효명의 양팔을 붙든 사병들이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파리하게 지친 효명은 그들의 손에 들리다시피 하여 질질 끌려갔다.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지나 보드라운 흙이 밟혔다. 마침내 지하 감옥을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더 이상 퀴퀴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코끝을 스치는 후덥지근한 공기가 더없이 상쾌하게 느껴졌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건가.”

    효명의 나직한 물음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병들이 그를 어딘가에 밀어 넣었다. 이번에는 두 발을 묶었다. 

    곧이어 그것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수레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던 효명이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냥 수레가 아니라 오물을 실어 나르는 수레인가 보다.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수레가 향덕원을 빠져나가 어둠 속으로 녹아들 때쯤, 원진이 불쑥 입을 열었다. 감정이라곤 읽을 수 없는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네 놈 집에 불이 났다.”

    “!”

    효명이 수레 위에 쓰러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두 눈이 가려진 채 원진의 목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렸다. 

    그의 담담한 목소리가 마치 청천벽력처럼 효명의 귓등을 때리고 지나갔다.

    “두 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하나는 나이 든 여성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젊은 사내의 것이었다더군.”

    “어, 머니……?”

    얼이 빠진 얼굴로 그 말을 중얼거린 효명이 서서히 입매를 찡그렸다. 뒤늦게 그 말의 무게를 깨달은 듯 그의 잇새에서 짐승 같은 포효가 터져 나왔다.

    “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어머니의 안위를 위해 목숨같이 모시던 주군도 배신했다. 설령 자신이 죽더라도 어머니는 무사하시길 바랐던 탓이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단다. 그것도 지옥 불처럼 뜨거운 화마에 휩싸여. 

    이것이 배신자의 말로인가.

    “으아아아!”

    효명이 핏대를 세우며 절규했다. 원진이 사병에게 눈짓을 했고, 사병은 곧장 그의 입에 더러운 천을 쑤셔 넣었다. 

    그 사이로, “그륵, 그륵.”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흐느낌이 비어져 나왔다. 눈을 가린 검은 천이 축축하게 젖었다. 

    효명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수레 바닥에 쿵, 쿵, 머리를 찧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얼굴로 사지를 버둥거렸다.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그의 이마에서 붉은 피 한 줄기가 관자놀이를 따라 흘러내렸다.

    “으으윽.”

    사병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원진을 보았으나, 그는 내버려 두라는 듯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돌릴 따름이었다. 

    수레는 그 뒤로도 한참을 달렸다. 마치 경사진 땅을 오르듯 뒤로 기울어진 수레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마침내 바퀴가 멈추고 원진이 맥없이 늘어진 효명을 끌어냈다. 

    사병들이 그의 입에 있던 천을 빼고 눈을 가렸던 안대를 풀었다. 손과 발을 묶었던 밧줄도 잘라냈다.

    깊은 산중이었다.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달려올 사람이 없는 곳.

    효명은 공허한 눈으로 제 앞에 가득 찬 어둠을 바라보았다. 절망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렸다. 그는 목전에 다가온 죽음을 기다리듯 체념 섞인 얼굴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사박사박.

    그때,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사병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가벼운 발소리였다. 그러나 눈을 떠 그의 정체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군들 어떠랴. 제가 죽는 것은 기정사실인데. 

    그 순간.

    “명아.”

    “!”

    귓속을 파고드는 그리운 목소리에 효명이 감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의 잇새로 망연한 부름이 흘러나왔다.

    “어, 머니…….”

    “명아!”

    효명의 어미가 울면서 뛰어왔다. 그녀가 자신의 아들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미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울음을 터뜨렸다.

    효명은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어 억지로 삐걱거리는 고개를 들었다. 원진은 예의 그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너와 네 모친은 죽은 사람이다.”

    “…….”

    “두 번 다시 도성에는 얼씬하지 마라. 내 눈에 띄면, 다음번엔 주군께서 무어라 하시든 내가 널 죽일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넌 배신자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잊지 않을 것이다.”

    “!”

    일순, 효명이 숨을 멈추었다. 그 말의 의미를 깨닫자,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설마……?”

    나를, 살려주신다고?

    목구멍이 콱 막힌 탓에 뒷말은 미처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이것으로 일전에 네가 나의 목숨을 구해준 빚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 는 것이 주군의 마지막 전언이셨다. 떠나라. 가서 죽은 듯이 살아라.”

    툭.

    원진이 꾸러미 하나를 던졌다. 제법 묵직한 소리가 났다. 효명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주머니를 향했고, 그의 어미가 꾸역꾸역 치미는 울음을 삼켰다.

    원진이 탐탁잖은 표정으로 혀를 차며 등을 돌렸다.

    “주군께서는 저놈이 뭐가 예쁘다고 노잣돈까지 챙겨 주시는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지. 가자.”

    “예.”

    원진과 사병들이 말에 올랐다. 쓸모없는 빈 수레와 말 한 마리는 그곳에 버려두었다. 

    올 때와 달리 말발굽 소리가 쏜살처럼 멀어졌고, 한 무리의 사내들은 밤 속으로 녹아들듯 순식간에 효명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돈 꾸러미와 수레, 그리고 자신의 모친을 보던 효명이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아!”

    퍽. 퍽.

    그가 두 손으로 땅을 내리치며 비통하게 절규했다. 어미가 속절없이 떨리는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난데없는 괴성에 놀란 산새들이 이른 잠에서 깨어 파다닥, 날갯짓하며 밤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

    “부인, 괜찮으시오? 힘들지는 않소?”

    하늘하늘 흔들리는 비단 천을 걷고, 그 사이로 불쑥 익제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흔들리는 가마 안에서 지루함에 몸을 뒤치고 있던 채선이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는 눈곱만큼도 지겹지 않다는 듯 시침을 뗐다.

    “괜찮습니다.”

    익제가 다 안다는 듯한 얼굴로 빙긋, 입꼬리를 당겼다. 그가 천천히, 가마와 속도를 맞추어 걸으며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열린 창 너머로 살랑거리는 여름 바람과 함께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예전에 상장군을 지내셨던 이백중 어른의 댁이 있소. 그곳에서 며칠 묵고 갈 것이니 피곤하여도 조금만 참으시오.”

    열기를 품은 바람이 좁은 가마 안을 쓸고 지나갔다. 갈 곳을 잃은 바람이 채선의 뺨 위에 내려앉았다. 그녀의 두 볼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저어…….”

    채선이 망설임 끝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익제가 그녀를 향해 온화한 시선을 던졌다. 무슨 말이든 해보라는 듯이.

    “제 뱃멀미 때문에 먼 길을 돌아가게 되어서 송구합니다.”

    “아니오. 애초에 이번 여정에 이백중 어른을 뵐 참이었소. 그러니 부인께서는 괘념치 마시오.”

    그러나 본론은 그게 아니었다는 듯 그녀가 힐끔, 익제의 눈치를 살폈다. 머뭇머뭇, 입술을 달싹이던 채선이 한참 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차라리 걸어가면 안 되나요?”

    “걸어간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익제가 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녀가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우물우물, 말을 이었다.

    “앞이 안 보이니 답답하기도 하고…… 제가 걸어도 이것보다는 빠르겠습니다.”

    가마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란 말에 한 발 한 발 신중히 걷던 가마꾼이 들으면 화들짝 놀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채선이 입술을 삐죽였다.

    익제의 눈매가 흔흔한 빛을 띠었다.

    “하하하. 내 어찌 보기에도 아까운 부인을 걷게 만들겠소?”

    “아마 여기서 제가 제일 잘 걸을걸요?”

    하긴, 그렇긴 할 거다. 하루 종일 약초를 캔다고 산을 누비고 돌아다니던 체력이니 평지를 걷는 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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