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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53)화 (5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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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딱 장군감이십니다!

    “자네도 알다시피, 권좌에 앉기 위해 형과 아우의 목에 칼을 겨눌 수 있는 게 황족이란 족속들이네.”

    “말씀이 너무…….”

    “조금도 과하지 않네.”

    인애대군이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그는 자신을 습격한 자객의 배후에 황자들 중 하나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겉으로는 우애 좋은 형제인 양 웃어도 속으로는 하나같이 칼을 갈고 있을 터였다.

    불현듯, 인애대군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니 나라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어서야 되겠나.”

    “형님!”

    익제가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행여 누가 들었을까,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던 그가 “저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라며 몸을 물렸다.

    인애대군이 그에게 좀 더 상체를 붙이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은원군, 자네가 나의 힘이 되어주게. 내가 이리 부탁하네.”

    “하지만…….”

    익제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곤혹스러운 기색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익제의 망설임에 인애대군이 애가 탄 얼굴로 다그쳤다.

    “나는 황제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네. 그러나 2황자라는 자리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는다네. 태자 전하 다음가는 황위 계승 서열이 아닌가. 다시 말해, 황태자 전하에게는 가장 큰 적이고, 다른 형제들에게는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대상이란 말일세.”

    “형님.”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날아가는 곳이 바로 이 자리란 말이네. 그 사실을 알고서 어찌 두 손 놓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자네는 이런 나를 못 본 척할 정도로 무심한 아우가 아니잖나.”

    그의 다그침과 회유에 익제가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인애대군이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은원군, 나의 힘이 되어 주게. 내 그리하면 그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네.”

    “저 같은 것이 무슨 힘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자네가 할 일이야 많지.”

    인애대군은 집요했다. 한 번 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하고야 마는 그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익제는 이럴 때일수록 물러서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애대군이 애를 태우면 태울수록 저에 대한 믿음이 더욱 커질 터였다. 

    익제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난처하게 입을 열었다.

    “게다가 저는 내일부터 한동안 도성을 떠나 있을 예정입니다. 부인의 건강을 위한 결정이니 형님께서 너그럽게 이해해주십시오.”

    “그런가.”

    아쉬운 표정으로 한발 물러서던 인애대군이 마침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얼른 덧붙였다.

    “그곳에서 자네가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네.”

    익제가 고개를 숙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안광이 번득였지만, 인애대군은 미처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든 익제가 체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제야 인애대군이 허허허, 하고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익제가 아무도 몰래 살며시 입꼬리를 당겼다.

    ***

    채선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할 정도로 긴장했다. 힐끔, 눈동자를 돌리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는 인애대군의 정부인이 보였다.

    새카만 머리를 틀어 올린 국대부인은 생각보다 화장이 옅었다. 신분이 높은 여인일수록 화장에 공을 들인다는 걸 감안하면 꽤나 의외인 모습이었다. 

    게다가 걸치고 있는 옷 역시 푸른색 비단이다. 주로 화려한 색의 비단을 선호하는 여인들의 취향을 고려하면 그 역시 의외인 건 마찬가지였다. 

    차분하고 정갈한 분위기의 국대부인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채선을 쳐다보았다. 마치 내면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날카로운 눈동자에 채선은 지은 죄도 없이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지은 죄가 있었던가.

    “…….”  

    입안이 바짝 말랐다. 한 마디만 잘못해도 그녀의 비천한 출신성분을 들킬 것 같았다. 태부의 조카딸이 아니라, 산골에서 자란 평민의 여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까? 보나 마나 뻔하다. 그녀뿐 아니라 익제까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다.

    좋지 않은 생각은 눈덩이처럼 덩치를 부풀렸고, 채선의 소심한 심장은 점점 더 쪼그라들었다.

    조용히 그녀를 응시하던 국대부인, 선우가 낮은 목소리로 인사치레를 했다.

    “여기까지 찾아와 주어서 고맙네.”

    흐읍, 크게 심호흡을 한 채선이 신중하게 대꾸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불미, 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국대부인께서 많이 놀라셨다고 들었습니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차를 가져왔습니다.”

    채선의 말에 송하가 들고 있던 비단 보자기를 건넸다. 선우의 뒤에 있던 하녀가 앞으로 나와 그것을 받아 들었다.

    “고맙네.”

    “아닙니다.”

    “걱정을 끼칠 정도로 놀란 것은 아니나 마음은 고맙게 받도록 하겠네. 어차피 이 바닥이 다 그렇지 않은가. 자객의 습격 정도야 월례 행사처럼 흔한 일이지. 자네도 얼마 전에 독이 든 차를 마셨다고 들었네만.”

    “……예.” 

    그 직설적인 말에 채선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얼굴로 눈알만 대록대록 굴렸다. 

    그녀는 낯선 사람과 허물없이 어울릴 정도로 사교성이 넘치지도 않았고, 처음 본 사람과 수다를 떨 정도로 붙임성이 좋지도 않았다.

    아니, 애초에 사람들이 그녀를 피했다. 이전까지 채선의 세계는 가족이 전부였고, 지금은 향덕원 사람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

    머릿속이 텅 비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자신의 한마디에 모든 걸 망칠 것 같아 쉽사리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내가 그대를 귀하게 여기듯이, 그대 역시 그리 여기셔야 하오.’

    익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나자, 방금까지 불안하게 들썩거리던 심장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는 발에 차이는 돌멩이만큼 하찮은 그녀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것은 채선의 세계가 송두리째 뒤집힐 만큼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녀는 세상 누구보다 비천하고 남루한 존재였다. 사람들에게는 역신이었고, 스스로에게는 재앙신이었다. 그러니 귀하다는 익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그대를 가장 최우선으로 둬야 하오.’

    채선은 두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마치 그가 곁에 있는 것처럼 익제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다음 순간, 그녀가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뺨에 꽂히는 송하의 눈빛이 따가웠다. 그제야 이곳에 오는 동안 그녀가 일러주었던 말들이 하나씩 생각났다.

    ‘하실 말씀이 없으실 땐 칭찬을 늘어놓으셔요. 아무리 성인군자라 하여도 제 얼굴에 금칠해 주는 사람을 싫어하는 모습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 칭찬!

    채선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녀의 눈동자가 긴장한 빛을 띠었고, 송하가 마치 응원이라도 하듯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구, 국대부인께서는 듣던 대로이십니다.”

    “듣던 대로라? 그래, 무슨 말을 들었는가?”

    선우가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녀의 위치는 타인의 칭송을 질리도록 듣는 자리였고, 안타깝게도 그녀는 입에 발린 말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이 하는 칭찬이라고 해 봐야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였다. 아름답다거나, 우아하다거나, 고귀한 기품이 흘러넘친다거나.

    “배포가 크시고 시원시원하신 게 그…… 딱 장군감이십니다!”

    “……장군감.”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선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송하가 “으으.” 하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채선이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이윽고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상하다. 분명 익제님께서 배포가 크고 시원시원하다고 하셨는데.

    채선이 힐끔, 눈동자를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하하하.”

    선우가 장군처럼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방 안에 있던 하녀들이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목을 젖히고 웃던 그녀가 채선에게 시선을 던졌다.

    “내가 그리 보이는가?”

    “예? 아니, 저, 음…… 예.”

    도움을 청하는 듯한 눈으로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던 채선은 모두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자 풀 죽은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선우의 눈매가 한층 더 유쾌한 빛을 띠었다.

    “하긴. 어릴 때는 자수나 서화보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더 좋아하긴 했지.”

    “정말이십니까?”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여인들에게 얘기했다면 분명 앞에서는 대단하다 치켜세우며 뒤돌아서는 험담을 할 만한 경솔한 고백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눈앞에 있는 채선은 앞뒤가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굉장하십니다! 말이라니요?” 

    채선은 저도 모르게 눈을 빛내며 선우를 우러러보았다. 방금까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던 그녀가 봇물 터지듯 와르륵 수다를 쏟아냈다.

    “실은 은원군께 아주 영리한 말 한 마리가 있습니다. 이름이 풍오라고 하는데, 다른 말보다 덩치가 크고 똑똑하지요. 성격은 좀…… 그렇지만, 그래도 저는 잘 따릅니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요, 풍오를 타 보고 싶지만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답니다.”

    “그런가? 은원군께 가르쳐 달라고 하지 그러나?”

    “하지만 은원군께서는 늘 바쁘신데 괜히 저 때문에…….”

    채선이 또다시 찌무룩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은원군이라는 한 마디에 발긋하게 물든 뺨을 보던 선우가 누그러진 눈으로 웃었다. 

    “예까지 군대부인을 데리고 오는 걸 보면 은원군께서 팔불출이라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인데, 가르쳐 달라고 하면 분명 기뻐할 것이네.”

    “팔불출이 아니십니다! 아니에요! 그건 헛소문이에요!”

    채선이 두 손을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선우는 어째서 은원군이 부인에게 홀딱 빠졌는지 이해할 것 같다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만약 그녀를 직접 보지 않았다면 타인을 속이기 위한 은원군의 연기라고 생각했겠지만, 채선에게는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 칼을 가는 이들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녀와 대화를 할 때는 치밀한 계산과 이해타산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짧은 시간 안에 깨달은 것을 은원군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선우가 생각을 갈무리하며 조용히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채선이 사뭇 의기양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저도 뭔가 잘하는 게 있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말은 타지 못하지만 나무는 잘 탑니다.”

    “……부인.”

    송하가 난처한 표정으로 채선을 말렸다. 그제야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채선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동그랗던 눈매가 금세 침울한 빛을 띠었다.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열두 번도 더 바뀌었다.

    하하하, 선우가 기어코 웃음을 터뜨렸다. 방 안이 떠들썩할 만큼 호탕한 웃음이었다.

    “나무를 잘 타는가?”

    “저기, 그러니까, 그게…….”

    “그럼 다음에 내게 나무 타는 기술을 가르쳐주게. 나는 군대부인께 승마를 가르쳐 드리겠네.”

    “정말입니까? 또 와도…… 괜찮을까요?”

    채선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우가 안 될 게 무어 있냐는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제든지 오시게. 나도 말동무가 생긴 것 같아 즐겁네.”

    그때, 방문이 열리며 하녀 하나가 조용히 다가왔다. 국대부인에게 귓속말을 한 그녀가 뒤로 물러났고, 가볍게 눈썹을 들썩인 선우가 채선에게 시선을 던졌다.

    “은원군께서 자네를 마중 오셨다는군. 이만 일어나셔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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