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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52)화 (5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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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설마, 같은 자의 소행일까요?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황자들 중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황제의 자리를 탐내는 건 광무대군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될 것이다. 황제의 핏줄은 황위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이었던 탓이다. 

냉정하고 영리한 태자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씨를 안고 갈 리 없었다. 그러니 당하기 전에 먼저 친다.

광무대군은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황자들의 면면을 하나씩 떠올렸다.

두 눈을 가늘게 뜬 달지가 커다란 앞니 두 개를 드러내며 말했다.

“예상했던 일이니 당황하실 것 없습니다. 하늘이 혼돈으로 어지러워지고 있습니다. 허나, 이 혼전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단 한 분, 광무대군이 되실 겁니다.”

“흠.”

귀에 살살 감기는 달콤한 말에 광무대군이 흡족한 얼굴로 입꼬리를 당겼다. 

달지가 작은 눈을 다시 창밖으로 던졌다. 하늘은 여전히 구름으로 뒤덮여 별의 움직임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제 손으로 천하를 거머쥐게 될 그 날을 기다리며.

***

“인애대군의 문안이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익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사촌 형님 되는 분인데,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습격을 받으셨다 하니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소? 출발을 하루 미루고 인애대군부터 한 번 찾아뵈어야겠소. 그 길에 부인이 동행해준다면 한량없이 기쁘겠소만.”

“하지만 저는…….”

그녀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변을 우물거렸다. 

향덕원이라는 커다란 우물 안에 갇혀 사느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녀는 군대부인이 아니라 촌스럽고 무지한 산골 처자 심채선이었다.

채선이 쉬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익제가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얼렀다.

“내가 인애대군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부인께서는 국대부인을 위로해 주면 좋겠소. 듣자 하니, 국대부인께서도 많이 놀라셨다고 하더이다.”

“제가 어떻게…….”

채선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다시 입술을 달싹였지만, 익제는 그녀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2황자의 부인답게 배포가 크고 시원시원하신 분이오. 그런 분이 이번 일로 심려가 크시다니 얼마나 놀라셨을 것이오? 부인께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한결 기분이 나아지실 게 분명하오.”

그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만 있다가 와도 된다는 뜻이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채선이 한참 만에야 불쑥, 입을 열었다.

“제가 같이 가는 게 익제님에게 도움이 됩니까?”

“…….”

일순, 그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익제는 마치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물음은 다른 의도 없이 순수하였지만, 실은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도움.

그녀의 말이 옳았다. 익제는 채선의 존재를 이용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는 인애대군이 자신을 부인에게 빠진 팔불출로 여겨주길 바랐고, 제게서 의심의 시선을 돌려주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채선의 동행이 필요했다.

익제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도움이 되오.”

“그럼 가겠습니다.”

그 말에 채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준비를 도와주렴, 송하야.”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익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채선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문득, 그가 입매에 꾹 힘을 주었다. 

***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익제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인애대군이 허허, 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익제는 그 모습에 속을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사냥을 좋아하는 그는 누구보다 호전적인 성격이었고, 동시에 승부욕도 남달랐다. 게다가 되로 받은 일은 반드시 말로 갚아줘야 직성이 풀리는 뒤끝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자객의 습격을 받았는데 실없는 웃음이나 짓고 있을 리 만무했다.

“괜찮네. 다리를 살짝 접질리기는 하였지만 그리 심한 건 아니라네. 의원 말이 며칠 안정을 취하면 낫는다더군.”

“그렇습니까? 그만하길 천만다행입니다.”

그렇게 대꾸한 익제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인애대군이 그때 일을 떠올리듯 입매를 찡그렸다. 방금까지 사람 좋던 얼굴이 순식간에 일변했다.

“석중교를 지나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화살이 날아왔네.”

“석중교라 하면.”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익제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다시 인애대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버드나무가 우거진 다리 아닙니까.”

“그렇네. 자객이 숨어 있어도 눈치채지 못할 만하지. 하지만 다행히 그자의 화살은 내가 아니라 말목을 꿰뚫었다네. 천운이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인애대군이 비죽, 조소를 머금었다.

“그자는 첫발에 자신의 목표를 이루었어야 했어. 내 호위들은 그에게 두 번의 기회를 내줄 만큼 만만한 자들이 아니거든.”

반쯤 농이 섞인 그의 말에 익제가 문득 원망스러운 얼굴로 그를 나무랐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첫발에 목표를 이루었어야 한다니요? 듣기 송구스럽습니다.”

“허허, 미안하네.”

인애대군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한결 누그러진 표정의 익제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그래서, 그자는 잡으셨습니까?”

그 한마디에 인애대군이 웃음기를 지우고 끌끌, 혀를 찼다. 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호위들이 뒤를 쫓았으나 이미 종적을 감추고 사라진 뒤였다더군.”

“저런. 누구인지는 전혀 짐작이 안 가십니까?”

“글쎄.”

인애대군은 말을 아꼈다. 짚이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어쩌면 눈앞에 있는 익제 역시 용의자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익제는 인애대군의 음험한 속내 따위는 모른다는 듯 멀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며칠 전, 원진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삼순의 가슴에서 뽑은 화살을 원진에게 건네며 익제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은밀히 네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

원진은 어떤 분부든 받들 준비가 되었다는 듯 결연한 표정으로 “예.”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익제의 서늘한 시선이 까만 화살촉에 머물렀다.

“이 화살로 인애대군이 탄 말의 목을 꿰뚫어라. 허나, 절대로 인애대군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목적은 그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것뿐이다. 결코 네 정체를 들켜서도, 뒤를 밟혀서도 안 된다. 할 수 있겠느냐?”

“맡겨만 주십시오, 주군.”

원진이 비장한 태도로 화살을 받아 들고는 그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건 그렇고.”

인애대군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짧은 상념에서 깨어난 익제가 슬며시 입꼬리를 당기며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향덕원의 하녀가 군대부인의 차에 독을 탔다는 소식은 들었네. 부인은 괜찮은가?”

그 물음에 방금까지 웃고 있던 익제가 입매를 찡그렸다. 그의 얼굴 위로 씁쓸함과 분노, 슬픔과 같은 복잡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인애대군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참 만에야 감정을 추스른 익제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하여 오늘도 같이 왔습니다. 지금쯤 국대부인을 뵙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인애대군이 “허허, 정말로 팔불출이 따로 없군. 잠시도 떨어지기 싫은가.”라며 반쯤 농 섞인 야유를 던졌다.

익제가 쑥스러운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굽었다.

“오늘 부인과 함께 풍주로 내려가기로 하였는데, 형님 소식을 듣는 바람에 출발을 하루 미루었습니다. 그래도 이리 강건하신 걸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하마터면 도성을 떠나는 걸음이 무거울 뻔하였습니다.”

“이거, 내가 괜한 걱정을 안겨 주었나 보군.”

“아닙니다.”

익제가 유순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어찌하여 하녀에 대한 일은 묻지 않으시나, 조용히 눈을 내리뜨는 그의 눈매가 예리하게 빛났다.

그때.

“그나저나 그 하녀는 어찌 되었나. 배후는 누구라고 하던가?”

옳거니.

그 말에 익제가 기다렸다는 듯 씁쓸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잇새로 참지 못한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배후를 말하기 직전, 괴한이 쏜 화살에 맞아 숨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괴한이 쏜 화살이라?”

인애대군이 눈살을 찡그렸다. 

“예. 훤한 대낮에 자객이 침입하였습니다. 그자가 뇌옥 창 너머에서 활을 당겼고, 하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숨이 끊겼습니다. 사병들이 황급히 뒤를 쫓았으나 어찌나 신출귀몰 한지 꼬리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 누구의 짓인지도 모른단 말인가? 저런, 쯧쯧쯧.”

남 일 같지 않은 사건에 인애대군이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익제가 쓴 목소리로 태연하게 덧붙였다. 

“범인이 남기고 간 흔적이라곤 검은 화살 한 대뿐이었습니다. 화살대와 화살촉이 모두 검게 옻칠이 되어 있더군요.”

그 순간.

“무어라!”

인애대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다리가 아픈 듯 미간을 찡그리며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두 눈이 부릅뜨였다. 

익제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형님?”

인애대군은 주먹을 움켜쥔 채 허공을 노려보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 사이로,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나를 노린 자도 검은 화살을 사용했네. 화살촉까지 새카맣게 옻칠이 되어 있었지.”

“그것이 정말입니까?” 

익제가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다 다음 순간, 주위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설마, 같은 자의 소행일까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나?”

“하지만 왜, 저와 형님을……?”

미처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 물음에 인애대군은 고심에 빠진 얼굴로 오랫동안 침묵했다. 익제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누그러졌다. 

인애대군이 보기에 익제는 황권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현재의 삶에 충분히 만족한 듯 보였고, 부인과 유유자적한 삶을 살 수 있으면 더 이상 바라는 게 없는 듯했다.

판단을 끝낸 인애대군이 익제를 향해 바싹 상체를 기울였다. 그의 목소리가 은밀한 기색을 띠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께 황위를 이양할 날이 머지않았네. 그러니 그 전에 야심 있는 황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래도 한 핏줄을 타고난 형제인데.”

“하.”

인애대군이 모르는 소리 말라는 듯 실소를 흘렸다. 그의 잇새로 차가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형제……. 남보다 못한 형제 말이지.”

“형님.”

익제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완곡하게 그를 만류하였으나 인애대군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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